조선시대 책 중개상인 책쾌

2023. 4. 24. 07:4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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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사고 싶으면, 수표교 아래 북쪽 수문 입구에 있는 하한수의 집으로 찾아오시오.’ 『고사촬요』
이 이야기는 1576년 선조 임금 때의 일을 적은 것인데요. 책을 사고 싶으면 수표교 아래의 하한수의 집으로 오라는 것입니다. 이는 조선시대 민간인의 집에서 책을 판매했다는 최초의 기록입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책은 구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특히 이러한 책은 양반 등 특권층에게만 필요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백성들에게까지 보급이 된 것일까. 사실 위와 같은 기록이 전해지지만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서점이 존재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고려사』에서는 이미 10세기부터 책을 사고 팔았다고 하지만 이것이 서점의 존재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1435년(세종 17)에 올린 허조(許稠)의 계(啓)에는 “책값 대신 쌀이나 콩으로 ‘소학집성’을 교환하는 것이 좋겠다.”라는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1457년(세조 3)에 승정원에서 교서관에 있는 오경(五經)을 팔았다는 기록이 있고, 1470년(성종 1)에 한명회가 교서관에서 책을 팔게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요. 교서관은 조선정부에서 운영하는 관영서점이었습니다. 교서관에서 한문책을 한글로 번역하여 여러 권을 찍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보급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교서관에서 돈을 받고 책을 판매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책쾌’가 등장하였습니다.
‘틈 사이로 저녁 햇살 비스듬히 비쳐 떠도는 먼지를 희롱하는데
정히 앉아 향을 태우며 이 몸을 돌아보네 하루종일 닫힌 문 왕래하는 이도 없건만
때때로 책 장수가 찾아오네‘ 「우연히 읊다」, 김흔


조선의 문인 김흔의 시에는 저녁 시간에 이따금 찾아오는 책장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조선은 문치주의의 나라였으므로 책을 숭상했겠지만 나라에서는 책을 팔 수 있는 서점의 설립을 제한하였습니다. 따라서 조선후기가 될 때까지 책은 시장 좌판에서 소규모로 팔리거나 물물교환 형태로 거래되었습니다. 다만 이보다 훨씬 전인 조선 중종 시기에 책방에 해당하는 서사(書肆)를 설치하자는 논의가 등장하였습니다. ‘서적을 인출하는 곳이 교서관 한 곳 뿐이니 학문에 뜻을 두는 사람이 있어도 책을 구할 수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한다.’며 도성 내에 서점을 만들어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책이란 것이 당대의 지식이요, 지식은 곧 힘이기 때문에 이러한 서적의 유통에 대해 조정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조정은 이를 장려하기보다는 책방의 개점을 금지하여 책의 자유로운 유통을 막고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책의 유통은 대부분 양반 사대부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양난을 겪고 나서 상업이 발달하고 신분제가 동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에 따라 양반이 아닌 다른 계층에서도 책을 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책을 사기 위한 사무역이 성행하였고 낯선 문화를 갈망하는 지식인들이 등장하면서 책을 더욱 원하게 되었습니다. 
 책쾌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책을 팔던 서적중개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책쾌란 이름 말고도 서쾌나 책거간꾼으로 불렸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가난하거나 권세를 잃어 망해 가는 집안에서 흘러나온 책을 시세의 반값에 사서 제 제 값에 팔았습니다. 이러한 것은 책쾌가 엄청난 폭리를 취한 것처럼 생각할 수 있으나 당시에는 종이가 귀했고 편지도 빈 공간 없이 쓰던 시절이었습니다. 따라서 책이 귀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책쾌는 고객이 원하는 책이라면 바로 갖다 줄 수 있어야 하는 정보력도 갖추고 있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고서를 수집하는 직업이었으므로 해당 분야에 대해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어야 했고 당시의 책쾌들은 난해한 옛 고서를 필사하고 해제를 달 정도로 학문의 조예가 깊었습니다. 게다가 원만한 대인관계와 더불어 영업에도 능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책쾌들은 영조 시대에 들어 수 백명이 서울에서 활동할 정도였습니다. 영업능력과 더불어 해당 분야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 직업이므로 이 일을 하는 사람에는 양반도 포함되었습니다. 몰락한 양반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 일을 뛰어들었으며 책쾌들은 책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함께 판매하는 투잡형 등 다양한 형태로 책을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합강(合綱)’과 같은 판본의 책이라면 경사(經史)와 제자서(諸子書), 잡기(雜記), 소설(小說)을 따지지 말고, 한 책이든 열 책이든 백 책이든 구해오기만 해주시오.”(유만주·흠영·欽英·1784년 11월 9일)
이는 이덕무(1741∼1793)는 생활이 궁핍해지자 ‘맹자’ 한 질을 200전에 팔아 처자식을 먹였다는 내용입니다. 단권으로 엮인 ‘대학’이나 ‘중용’도 품질이 아주 좋은 옷감인 상면포 3∼4필을 주어야 살 수 있었으며 이는 2∼3마지기 논의 1년 소출과 맞먹었습니다. 이덕무가 ‘맹자’ 한 질 값으로 받은 200전(2000푼)은 지금으로 치면 40만∼100만 원 정도였다고 합니다.
책쾌 중유명한 사람이 바로 조신선이란 사람이 있었으며 그는 조선 팔도에서도 그 이름이 유명하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정약용과 조수삼 등 문인의 글에서도 등장하니 당대 최고 책쾌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천하의 책이 모두 내 책이요, 이 세상에서 책은 아는 이는 오직 나 밖에 없다’
그는 추울 때오 더울 때오 삼베옷을 입고 다녔으며 그러한 까닭에 그는 조신선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실학파 선비들은 물론, 양반 세도가, 규방의 규수, 기생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의 단골이었으며 ‘한양에서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조신선이라는 자는 책을 파는 아쾌로 붉은 수염에 우스갯소리를 잘하였는데, 눈에는 번쩍번쩍 신광이 있었다. 모든 구류, 백가의 서책에 대해 문목과 의례를 모르는 것이 없어, 술술 이야기하는 품이 마치 박아한 군자와 같았다.’ 『조시선전』, 정약용
한편 조신선이 조선이 국가기록에 등장한 것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금서인 『명기집략』파문이 일어났을 때의 일입니다. 당시 이 책은 인조반정을 부정하고 광해군을 옹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이 책에 사대부 사회에 유통되자 처벌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이 이미 조선에 들어와 유통되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읽혔던 것입니다. 그에 따라 책을 소지한 사람과 책을 전파한 책쾌, 그리고 책을 들여온 역관등이 처벌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음험하고 참혹한 글을 책쾌에게 팔고 사서 몇 차례 왕복했다니 이를 생각하면 오싹하고 몸서리쳐진다.’라고 하였으니 책쾌가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입니다. 이 때 책쾌들은 효시되거나 노비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 때 조신선의 행적은 묘연해졌다고 합니다. 
하여간 책에 대한 수요가 커졌고 또한 당시 책에 대한 수요란 것은 당시 유행하던 소설에 대한 흥미가 상당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자 책을 전문적으로 필사하는 직업이 생겼고 책을 빌려주는 세책점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면서 한문소설을 국문으로 번역, 필사하게 되었고 소설은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그리하여 사대부 집안 여성들이 경쟁적으로 돈을 주고 소설책을 빌려 읽었으며 그러한 책에는 『삼국지』, 『수호전』, 『서유기』, 『초한연』, 『구운몽』, 『사씨남정기』, 『장화홍련전』등이었습니다. 한편 사대부들은 “세책에 빠져 지내는 사회풍토가 걱정된다.”고 한탄할 정도였습니다. 여기에 더해 방각본 소설도 유행하였습니다. 이 때 방각본은 상업적인 민간 출판도서로 목판에 글자를 새겨서 인쇄한 책을 말합니다. 전국의 서당에서 쓰인 한석봉의 『천자문』도 이러한 방각본의 일종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책쾌는 이러한 책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을 작가, 세책업자, 혹은 필사자에게 전해주는 정보원으로서의 역할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은 서점이 생긴 것은 조선말기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 외국에서 신식인쇄기가 들어왔고 출판사가 생겨난 것입니다. 또한 당시에는 소학교가 생겼고 따라서 교과서를 판매한 서점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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