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관대첩비와 정문부
2023. 4. 17. 21:13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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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5년 일본으로부터 우리나라 문화재가 반환되었습니다. 그 문화재는 바로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보관되어 있던 북관대첩비입니다. 이 북관대첩비는 러일 전쟁 중이던 1905년에 일제가 강탈해간 것으로 북관대첩비는 임진왜란 발발 첫 해인 1592년, 함경도 의병장 정문부(鄭文孚)가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군을 무찌른 일을 기념해 숙종 34년(1707년) 함경도 길주에 건립한 것입니다. 북관대첩비란 북관(北關)에서 이뤄진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둔 일을 기념한 비석이라는 의미로 북관은 함경도를 말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은 파죽지세의 기세로 북쪽으로 치고 올라왔으며 함흥까지 도달했습니다. 당시 조선의 관군은 도망쳤으나 정문부가 의병을 모아 일으켜 이를 격퇴하였습니다. 이후 정문부는 인조반정 직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와병 중이었던 까닭에 왕명을 수행하지 못했는데 이게 빌미가 돼 거듭된 탄핵을 받아 인조 2년(1624) 11월 9일 향년 60세로 옥중에서 장사(杖死)했습니다. 그리고 41년 만인 현종 6년(1665), 당시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상소에 힘입어 신원이 회복되었고 이를 발판으로 숙종 40년(1713)에는 충의공(忠毅公)이라는 시호까지 받습니다. 그렇게 세워진 비는 높이 187cm, 너비 66cm 크기로, 정문부가 주도한 의병들의 활약상을 약 1천500자에 담아 상세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1905년 일제는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 지역에 주둔했던 일본군 제2사단 17여단장 이케다 마시스케(池田正 介) 소장이 북관대첩비를 일본으로 강탈해갔으며 아마도 이러한 것은 자신들의 치욕적인 패배를 감추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생으로 가 있던 조소앙이 야스쿠니 신사에서 북관대첩비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한흥학보」에 ‘함경도임진의병대첩비’라는 글을 기고하면서 “누가 이 사실에 분개하지 않을 것이며 (북관대첩비를 빼앗긴) 큰 죄를 면할 수 있겠는가.”라며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당시는 대한제국의 국권이 점차 일본에게 침탈당하던 시기였습니다. 동아일보 1926년 6월 19일자 기사에는 이생이라고만 알려진 무명의 투고자가 북관대첩비의 소식을 간략하게 전하면서 옆에 ‘대첩이라 하였지마는 그 때의 사실과는 전연 다르니 세인은 이 비문을 믿지 말라’고 쓴 나무패가 서 있었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이후 해방과 6.25 전쟁을 겪는 혼란 속에서 북관대첩비는 점점 잊혀져가는 듯 했습니다. 그러다 북관대첩비가 세상에 다시 알려진 것은 지난 1978년의 일이었습니다. 야스쿠니 신사 옆 숲 귀퉁이에 방치돼 있던 북관 대첩비를 도쿄에 사는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이 찾아낸 것입니다. 그리고 최 원장은 고문헌을 조사해가며 북관대첩비가 1905년 러 ㆍ일전쟁 당시 함경지방에 진출한 일본군 제2예비사단 여단장 이케다 마시스케 소장에 의해 강제로 일본에 옮겨졌음을 밝혀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한국정부에도 알렸고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직접 나서기도 했지만 일본 측은 원래 북한 땅에 있던 것을 한국에 마음대로 넘겨줄 수 없다는 이유로 반환을 거부했습니다. 그 후로도 20년 넘게 방치된 북관대첩비는 일본 최대 불교종파인 천태종 도반이자 일ㆍ한불교복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가키누마 센신 스님에 의해 다시 반환이 추진되었으며 가키누마 스님은 97년 6월 고 이구 조선 황세손을 일본에서 만나 야스쿠니 신사 측에 비석 반환을 공식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무산되자 가키누마 스님은 99년 한ㆍ일불교복지회장 한국측 이사장인 초산 엄태종 스님과 함께 유엔 등 국제사회에 비석 반환 문제를 호소하기 시작했고 2004년 7월에는 ‘만일 이번에도 한국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도 더 이상 반환운동을 펼치지 않을 것’이라고 하자 이에 한국대사관 및 문화재청을 비롯, 많은 민간단체들이 비석반환에 힘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가키누마 스님과 초산 스님은 야스쿠니 신사의 난부 도시아키 궁사(宮司)를 직접 만나 북관 대첩비 조기반환을 원칙 합의하였으며 이후 양국의 정부가 나서며 반환협상을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2006년 3월 1일에 개성에서 인도하기로 하였으며, 3월 23일 북관대첩비가 원래 자리에 다시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리를 찾은 북관대첩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보 제 19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북관대첩의 주인공 정문부는 본래 문관 출신으로 24세 때에 문과에 차석으로 급제하였고 27세에는 함경북도 병마평사로 부임했습니다. 그리고 1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나이 불과 28세였고 그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그는 등 떠밀려 의병장이 되었습니다. 싸움에 경험이 없던 그였지만 북으로는 여진(女眞)•말갈(靺鞨)을 평정해 국경을 튼튼히 했고, 안으로는 회령(會寧)•경성(鏡城)•명천(明川) 등지에서 일어난 반란(叛亂)을 진압, 후방을 안정시키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이어 함경도를 점령한 채 약탈을 일삼던 약 2만 명의 왜적들과 4개월 여에 걸쳐 혈전을 벌여 왜구를 함경도 땅에서 몰아냈습니다.
이에 후에 영의정은 지낸 정태화는 조선 현종에게 정문부에 대한 신원(伸寃)과 추증을 주청(奏請)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습니다.
‘병마평사 신 문부가 몸소 의병을 거느리고 청정(加藤淸正.가토 기요마사)을 토벌하여 육진 밖에서 적군의 깃발을 뽑아버렸으며, 백탑 아래에서 (왜적을)대파했습니다. 위엄으로 말갈을 복종시켜 변경을 온전히 했고 오랑캐의 기세를 꺾어 빛나는 공훈을 세웠으니, 이는 만력(萬曆•명나라연호)이래 선무(宣武)공신이 된 장수들 중에는 없었던 바입니다.’
그가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우고 나라를 구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인품이 한 몫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정문부가 의병을 모은다고 하자 숨어 있던 지방수령과 관원, 선비, 장사들이 그의 밑으로 모여든 것입니다. 그렇게 의병을 모은 그는 반란군 척결에 힘을 쏟았습니다. 반란군 수장 국세필에게 함께 북변을 어지럽히는 오랑캐들을 치자고 제의하는가 한편 경성으로 쳐들어온 왜적을 섬멸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듣고 회령 땅에서 유생과 장사들이 일어나 국경인 일당을 쳐 죽였으며 명천의 정말수 반당도 오촌 구황과 강문우의 기병들에게 분쇄당했습니다. 이에 국세필도 반격을 노렸으나 오히려 정문부에게 간파당해 참수를 당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정문부의 밑으로 모여들어 그 힘은 6천 여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장평전투를 앞두고 부장인 정현룡이 ‘적세가 강하니 우선 경성을 지키면서 기회를 엿보는 게 좋겠다.’고 말리자 정문부는 ‘안방을 지키는 여인네를 본받으라는 것이냐?’며 진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또 한 사람이 같은 이유로 길을 막으려 하자 그를 참수해 그 목을 깃대에 매달고 진격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관북의병들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후로도 정문부의 부대는 병력의 열세를 딛고 왜적이 뒤를 치거나 전방을 차단, 혹은 갑자기 뒤로 빠져 적들의 허리를 끊어놓는 방식을 적을 교란시켰습니다. 그의 지략과 전술 그리고 백성과 병사들의 신뢰, 후방을 안정시키고 정보 및 첩보 활용, 매복, 기습작전으로 적에게 공포심을 심어주었고 지형지물을 이용한 유격전 또한 정문부 부대의 승리요인이었습니다. 그리고 함경도의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약한 왜적의 습성을 이용, 승리를 거두었고 정문부의 의병은 왜적과 북방오랑캐, 그리고 왜적과 내응(內應)•결탁한 반란세력으로부터 함경도를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문부를 유영립의 후임으로 함경감사로 부임해온 윤탁연이 미워했고 윤탁연이 조정에 올리는 장계에 정문부의 이름을 빼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에 마음에 들었던 경성 부사 정현룡 등에게 공의 전과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정문부가 죽은 뒤 41년이 지난 뒤인 1665년에 함경도 북평사였던 외재 이단하와 관찰사 민정중이 힘을 모아 북관대첩의 진실을 조정에 알렸으며 후에 관북의병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렸습니다.
‘고단하고 보잘것없는 몸을 일으켜 도망가 숨은 자들을 분발시켜 단지 충의로써 서로 감격하여 끝내 오합지졸로 전승을 거둬 한 지방을 수복한 것으로는 관북의 군대가 으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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