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나무꾼 시인 정초부

2023. 4. 25. 07:45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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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1년, 양평군이 추진 중인 노비시인 정초부(鄭樵夫:1714~1789) 지게길 조성사업이 완공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021년 10월 17일 양평군에 따르면 군은 지난해 1월부터 그가 살았던 ‘월계(月溪)마을’로 추정되는 양서면 신원리 528-5 일원 4.3㎞ 구간을 스토리텔링 지게길로 만들어 왔다고 밝혔으며 지겟길 곳곳에는 초부 주막, 전망 데크, 쉼터, 정자, 도강도(渡江圖) 전망대(포토존), 정초부 초당 등이 들어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정초부란 사람은 낯섭니다. 그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의 인연이 맞닿아 있는 사람 중에 우리가 알만한 인물로 조선후기의 화가 김홍도가 있습니다. 단원 김홍도 작품 ‘도선도(渡船圖)’의 화제는 ‘동호범주( 東湖泛舟)’로 이 그림은 오늘날 서울 옥수동 앞 한강인 동호( 東湖)를 건너던 나룻배 한척을 그려넣었습니다. 그리고 그림에는 에사(哀詞)를 읊은 한시(漢詩)도 적혀 있습니다. 
‘동호의 봄 물결은 쪽빛보다 푸르고(東湖春水碧於藍)
또렷하게 보이는 건 두세마리 해오라기(白鳥分明見兩三)
노젓는 소리에 새들은 날아가고(柔櫓一聲飛去盡)
노을진 산빛 만이 강물에 가득하다.(夕陽山色滿空潭)’


이 정도의 시를 남길 정도면 그는 당대 제일가는 사대부 집안의 사람일 것 같지만 이 시를 남긴 사람은 노비 신분의 나무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는 한시로 되어있었으니 더욱 놀라운 일인데요. 신분사회가 철저했던 조선후기에 사대부들만 썼을 법한 한시란 장르에 천민이 읊어 후세에도 그 이름을 알린 것입니다. 그럼 한시를 짓는 일은 얼마나 어려웠을까. 당시에는 한시란 아무나 지을 수 없는 것이었고 한자에 대한 깊은 이해는 물론이고 15개 내외의 규칙들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시를 한 수 지을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운율과 음의 높낮이를 맞추는 것은 물론, 기승전결에 맞게 한자를 풀어내야 했습니다. 이러한 것은 보통 10년 이상 공부해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고난도의 예술작업을 노비가 해낸 것입니다. 물론 당시에도 글 좀 안다는 노비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초부의 경우는 좀 달랐습니다. 한시까지 짓는다는 것은 그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려운 일을 해낸  사람은 정초부는 정씨 성을 가진 나무꾼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었으며 국내의 한 교수는 그의 이름에 대해 이재라고 발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발표가 있을 정도면 사실 그의 이름에 대해서 정확하게 내려오는 기록은 없는 셈입니다. 그러나 그의 재주 덕분에 당시에 그는 알려지지 않은 본명에 비해 시는 많은 사람들이 알아봐주었습니다. 그만큼 그의 시가 빼어났으니 당대에는 그는 중국 당나라 시선인 이백이나 시성인 두보가 환생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시 정초부를 찾아 한양의 고관대작은 그가 살고 있는 양평으로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찾아와 그를 찾을 테면 그는 “내 성명을 알고 싶다면 광릉에 가서 꽃에게나 물으시게.”라 답했다고 합니다.
그는 노비신분이었으므로 그에게도 모시는 주인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여동식 (혹은 여춘영), 그는 다행히도 정초부의 재능을 알아보았습니다. 정초부의 생김새는 범상치 않았다고 하는데요. 기록하는 사람에 따라 그를 '예스런 선비의 멋진 용모를 가졌고 수염이 아름답고 흉금이 툭 터져 구김살이 없다'는 인물평을 남긴 사람도 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것을 매력적인 그의 시의 팬이었던 사람이 남긴 글로 볼 수 있을 텐데요. 이런 그를 데리고 있던 여동식은 아들 글공부에 함께 하도록 배려했다고 합니다. 
그럼 그의 재능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정초부는 낮에는 산에 가 나무를 해서 지고 내려오고 밤에는 주인을 모시고 사랑채에서 잤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주인은 늘 책을 읽었는데 정초부는 주인이 글을 읽는 소리를 듣고 모두 외웠다고 합니다. 당시 주인은 이런 그를 특별히 여겼다고 합니다. 여동식의 아들 여춘영은 자신보다 스물 살이나 많은 정초부를 스승이자 친구로 여겼으며 여춘영의 문집에는 정초부에 대한 시와 두 사람이 함께 지은 시, 그리고 그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까지 실렸습니다. 재밌는 것은 그에 대한 소문으로 주인집 자제들을 위해 과거 시험장에 들어가 대리시험을 쳐서 주인집 자제를 합격시켰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진위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시인의 남은 생애는/늙은 나무꾼 신세/지게 위에 쏟아지는/가을빛 쓸쓸하여라'. 


그는 그가 불려진 이름 정초부처럼 나무를 해서 파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그가 양반집 자제 대신 과거시험을 봐서 합격시켰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했잖아요. 그래서인지 그는 이후에 양인으로 상승되었습니다. 그가 만약 이러한 재주를 가졌고 명성이 높아졌음에도 그를 계속 노비로 부린다면 그것은 분명 사대부 사이에서 입방아에 오를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양인이 된 정초부는 여전히 나무를 해서 팔았습니다. 그에게 오직 잘할 수 있는 일이 바로 나무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위의 시는 그가 나무를 해가며 느꼈을 애환이 스며든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산새는 옛날부터/산사람 얼굴을 알고 있건마는/관아의 호적에는 아예/들 늙은이 이름이 빠졌구나./큰 창고에 쌓인 쌀을/한 톨도 나눠 갖기 어려워라/강가 다락에 홀로 올라 보니/저녁밥 짓는 연기 피어오르네'.
그는 이렇게 시를 통해 자신의 가난을 표현했습니다. 그는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관아를 찾아가 쌀을 꾸려했으나 여의치 않았습니다. 호적에 그의 이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시인으로 먹고 사는 일은 조선후기에나 지금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당시 군수는 이 시를 듣고서 천한 신분의 자가 이런 시를 지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정초부를 불러내어 다른 제목을 주어 지어보라고 했습니다. 이에 그는 바로 시를 지었고 군수가 깜짝 놀라 크게 칭찬하고 쌀을 하사한 뒤, 그 사실을 널리 알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알려진 그의 명성에 많이 사대부들이 만나고 싶어 했고 그 중에는 신광수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는 여주를 가기 위해 월계를 지날 때  “여기에는 노비 정봉이란 사람이 시를 잘한다.”며 만나려 했습니다. 하지만 나무하러 떠나서 만나지 못하자 몹시 아쉬워하며 “아침에는 나무 팔아 배 위에서 쌀을 얻고, 가을에는 나무에 기대 산 속의 종소리를 읊네”라는 시를 써서 만나고 싶은 마음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러한 그의 시들이 다시 한 번 알려진 것은 바로 2011년 한 대학 도서관에서 조선시대 필사본 시집으로 『다산시령』이 발견되었고 이 안에 또다른 시집 『초부유고』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 시집에는 약 90수의 한시가 담겨 있었으며 ‘유고’란 말이 붙었으니 이는 작자가 사망한 후에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책이었습니다. 이 책뿐만 아니라 그를 기억하는 글은 더러 있었습니다. 『추재기이』라는 책을 쓴 조선의 시인 조수삼은 “동호의 봄물결은 지금도 푸르건만 그 누가 기억하랴? 시인 정초부를”이라고 하며 그를 기억하였으며 정약용의 아들 정학연과 함께 지은 시에서는 “오백년 문명이 영조 정조 때에 꽃피웠으니 나무꾼과 농사짓는 여인네까지 시를 잘 짓네”라고 하였으니 이 때 나무꾼은 아무래도 정초부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문화적으로 르네상스시기를 맞았던 영정조 시대에 정초부는 그 상징적인 인물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조선사회에서 시를 잘 짓는 천민출신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양반들에게 시를 잘 짓는 정초부가 마냥 신기한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그가 더 이상 배고프지 않아도 되었을 때 1789년 그의 나이 76세였습니다. 정초부가 세상을 떠나자 여춘영은 그의 시에서 “어릴 때는 스승, 어른이 되어서는 친구로 지내며, 시에서는 오로지 내 초부뿐이었지”하며 그를 회상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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