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초등교육기관 서당

2023. 5. 8. 06:38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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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교육기관은 무엇이 떠오를까요. 바로 서당입니다. 서당은 조선 시대에 초등 교육을 맡아 했던 사립학교입니다. 오늘날의 초등학교와 비슷하지만 규모는 훨씬 작았고, 주로 유학에 바탕을 둔 한문 교육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담은 그림으로 유명한 작품이 바로 김홍도가 그린 「서당도」입니다. 이 그림을 볼 때 서당에서 스승의 가르침은 지식뿐 아니라 생활 태도나 정신 자세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이루어졌을 것이며 공부를 게을리 하거나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종아리를 맞는 일도 낯선 풍경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초등교육기관은 이미 고구려 때 경당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했었습니다. 『신당서』에 보면 “고구려인은 학문을 좋아했다. 궁리의 시가에 이르기까지 또한 서로 학문을 힘써 권하며 큰길가에 모두 장엄한 집을 짓고 경당이라고 이름했다. 미혼의 자제가 무리지어 거처하며 경전을 일고 활쏘기를 익혔다”고 적혀있습니다. 『구당서』에도 신분이 낮은 형문이나 시양과 같은 자들도 경당에 다녔다는 기록이 적혀있어 고구려의 ‘경당’은 귀족 자제들을 위한 것보다 평민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당에서 유교경전을 공부했으니 고구려의 국립교육기관인 태학이 설립된 272년 이후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려 때도 마을마다 서당과 비슷한 학교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이도’와 서당로 보고 있습니다. 십이도는 국립교육기관인 국자감과 같은 수준으로 과거준비교육을 했고 서당은 훈장이나 학동의 능력에 따라 기초 문자 교육부터 주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고려도경』에는 “마을 거리에는 경관과 서두가 두 개, 세 개씩 서로 바라보고 있으며 민간의 미혼자제가 무리를 이뤄 선생에게 경서를 배우고 좀 성장하면 유(類)대로 벗을 택해 사관(寺觀)으로 가서 강습하고 아래로 졸오·동치도 역시 향선생(鄕先生)에게 배운다.”고 적혀있습니다. 이를 통해 고려의 서당은 풍족한 집안에서 독선생(獨先生)을 앉혀놓고 이웃의 자제들을 동석시켜 수업하거나 향중의 몇몇 유지나 마을 전체가 함께 훈장을 초빙해 마을의 자제를 교육시키는 등의 방식으로 운영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는 유학에 대한 중요성이 커졌습니다. 그러면서 일정한 조건이나 규정에 구애받지 않고 서당이 세워지고 없어지기도 했습니다. 또한 마을에서 선생님을 데려와 서당을 차리기도 하였고 양반유학자가 자기 집에 서당을 차려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상민들도 자식들을 공부시키려 하였고 몰락한 양반들도 많아졌기 때문에 이들이 생계를 위해 서당을 차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서당은 증가했고 그러면서 직업적인 훈장이 등장하였습니다. 당시 수업료는 봄과 가을에 곡식을 거둬 서당의 선생님에게 냈다고 합니다. 여기에 다니는 학생들은 7세에서 16세 사이가 가장 많았으며 『천자문』을 통해 한자의 음과 뜻을 익힌 후에 『명심보감』, 『격몽요결』같은 책으로 짧은 문장을 외우고 교훈적인 내용을 익혔습니다. 이러한 서당에서는 책을 읽고 외우고 질의응답을 가졌습니다. 학생들은 글자와 뜻을 깨우칠 때까지 읽고 외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학생에 따라 진도가 달랐고 자연스럽게 개별학습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배운 것은 매일 평가하고 정기적으로 시험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보통 5등급으로 결과로 나누었는데 가장 낮은 등급을 받으면 낙제를 받아 다시 배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성적이 좋은 하생은 상장을 붙이거나 종이와 먹 등의 상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0세 안팎의 나이대도 있었기에 접장은 훈장에게 직접 수업을 받으면서 자신이 속한 접의 학생들을 가르쳤고 보수는 없어도 학비가 면제되었습니다. 당시 책거리라는 풍습이 있었는데 한 권의 교재를 다 외우고 이해하면 훈장님께 감사하며 떡과 음식을 준비하여 돌린 것입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십팔사략』이나 『자치통감』같은 역사책을 익었으며 이후 서당을 벗어나 향교나 서원 혹은 과거시험을 거쳐 성균관으로 올겨가기도 했습니다. 훈장들도 학식이 천차만별이었습니다. 서당이 한문의 초보적인 문리를 가르치는 곳쯤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대부분 이 곳에서 과거시험을 준비하였고 성리철학의 심오한 이치를 탐구하는 서당도 많았습니다. 이름만 서당일 뿐 그들이 가지는 지향점과 시설 등에는 차이가 컸습니다. 심지어 이러한 서당이 당쟁의 전초기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한편 경(經)·사(史)·자(子)·집(集)에 두루 통한 훈장이 드물었고 주석과 언해를 참고해 겨우 뜻을 해득할 정도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신분질서가 무너졌으며 전통 윤리관이 변화하면서 따라오는 변화였습니다. 이에 훈장에 대한 사회적 대우도 낮아졌습니다. 어찌되었든 18세기 이후가 되면 서당교육이 활기를 띠었고 살림이 조금 유족한 평민들도 서당을 세우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있던 서당의 수는 헤아린다는 것은 워낙 많아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더해 이러한 서당의 보급으로 19세기 조선은 문자해독률이 높았으니 이는 유교 지식도 지배층의 전유물이 아니었음을 의미했습니다. 당시 바깥에서는  서구 근대국가들은 국력을 쏟아 경쟁적으로 의무교육을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은 그와 같지는 않았으나 다만 조선에는 민간 주도의 서당교육이 크게 발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공부한 이들이 새 세상을 꿈꾸기도 했는데요.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이끈 전봉준과 김개남도 훈장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다 1910년대 들던 일제가 조선인을 황국신민으로 교육하기 위해 전국에 근대식 학교를 세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일본의 조선 교육령이 발표되었습니다. 
‘제 2조 교육은 충성스럽고 선량한 국민을 육성하기 위한 것이다.
제5조 보통의 지식 기술을 가르치고 일본어 보급을 목적으로 한다.’
서양식 교사에 책상, 걸상이 구비된 당시로서는 근사한 모습이지만 일본 교사들은 칼을 차고 교단에 올랐습니다. 그들은 조선인이 보통학교만 졸업하고 곧바로 노동할 수 있는 것에 목적이 있었으니 이른바 조선인 우민화정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보통학교 설립에도 일제가 생각한 것처럼 서당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일제는 이러한 서당들이 자연스럽게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서당관리에 소홀했는데요. 예상과 다르게 전국에 서당의 수는 점점 늘어났고 학생들의 수도 급증하고 있었습니다. 1911년부터 6년간 1만 6540개이던 서당이 2만 5831개로 증가하였고 서당의 학생수는 14만 1604명에서 25만 9513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이는 당시 초등학교 대상자의 70%에 달하는 수치였습니다. 서당이 증가한 것은 바로 일제의 교육정책이 반발했기 때문입니다. 1910년 이전 애국적 지식인들이 세운 보통학교에서는 운동회를 열고 애국심을 고취시켰습니다. 운동회는 총을 메고 행진하는 등 마치 군사훈련을 연상케 했는데 이러한 모습들이 일제를 긴장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후 일제는 1910년에 운동회를 금지시켰습니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독립운동가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서당을 세우기 시작했고 조선인들은 우리의 말과 역사를 가르치는 서당으로 모이게 된 겁니다. 이에 놀란 일제는 곧바로 엄중한 단속을 시작하는데요. 기존의 서당은 갖가지 이유를 대며 폐교시켰고 새로운 서당 설립은 허가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서당을 찾아가는 아이들이 있다면 일일이 찾아가 협박을 했는데요. 일본의 잔혹한 교육침략! 바로 서당사냥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서당과 사립학교는 점차 사라져갔습니다. 그렇다고 민족교육이 사그라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애국적인 지식인들은 다음 세대를 위한 교육에 힘을 아끼지 않았으며 의병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집안을 수색하는 일본 경찰, 그리고 이들이 조선의 농민들을 깔고 가는 모습을 보며 배움의 의지를 키워나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서당에서 배운 학생들이 3.1만세 운동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리고 서당은 신식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조선의 역사나 지리 외에도 산술, 조선어, 일본어, 이과 등 실용성이 강한 교과목을 신설하며 서당도 자체적으로 개량하게 되었고 어린 훈장이 소학교선생에게서 영어를 배워 학생들에게 가르치며 서당의 마지막을 장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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