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버린 땅, 잊지 말아야할 역사를 품은 녹둔도

2023. 6. 5. 19:32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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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지켜야할 땅이 있고 되찾아야 하는 땅도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바로 녹둔도, 이름이 생소한데요.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이기도 합니다. 
‘조산(造山)의 요충지 녹둔도(鹿屯島)에 농민들이 흩어져 사는데, 골간(骨看·여진족) 등이 배를 타고 몰래 들어와 약탈할까 염려된다. 진장이나 만호에게 단단히 방어할 수 있도록 하라.’ 『세조실록』
세조는 함길도 도절제사로 부임하는 양정(楊汀)을 경복궁 사정전으로 불러 이렇게 당부합니다. 세종이 6진을 개척해 영토를 두만강까지 넓혔다지만, 사실 어려운 것은 이를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6진의 행정체계가 완성된 뒤에도 여진족의 약탈은 계속된 것입니다. 
‘적호(賊胡)가 녹둔도의 목책(木柵)을 포위했을 때 경흥부사(慶興府使) 이경록(李慶祿)과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이 군기를 그르쳐 전사(戰士) 10여 명이 피살되고 106명의 인명과 15필의 말이 잡혀 갔습니다. 국가에 욕을 끼쳤으므로 이경록 등을 수금(囚禁)하였습니다.” 『선조실록』
적호란 여진족을 말합니다. 이때의 사건을 ‘녹둔도 야인사건’이라 일컫습니다. 이해 가을 경흥부사 이경록이 군사를 이끌고 녹둔도에 가서 우리 백성이 추수할 때 초도(椒島)에 있던 여진인이 쳐들어왔습니다. 이에 장군 오형과 임경번은 전사하고 납치당한 농민이 100여 명이나 되고 전사한 군인이 10명, 빼앗긴 말이 15마리나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녹둔도의 농사·인구·방위 정도를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때 경흥부사 이경록과 조산만호 이순신이 겨우 적을 몰아내었습니다. 북병사 이선은 이경록과 이순신이 사전에 막아내지 못하였다 하여 처벌할 것을 정부에 건의하기도 하였으나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뒤 이감은 초도를 정벌하고 여진인 32명의 머리를 베었습니다.
이 녹둔도 전투에 대한 것은 그림으로 남겨지기도 했습니다. 바로 북관유적도첩의 여덟폭의 그림 중 일곱 번째 그림이 바로 녹둔도 전투를 묘사한 ‘수책거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선조 정해년에 순찰사 정언신이 녹둔도에 둔전을 설치하고 조산만호 이순신에게 맡겼다. 가을이 와서 수확할 때가 되자 주변 오랑캐의 여러 족장과 내륙 깊은 곳의 물지개 등이 무리를 불러 모아 추도에 군사를 숨겼다. 수비군이 얼마 되지 않아 약하고 농민들이 들판에 퍼져 일하자 무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먼저 기병으로 포위하고 목책을 따라 노략질을 했다. 이때 목책 안의 군사들이 모두 들에 나가고 머릿수가 얼마 되지 않아 곧 버티기 어려워졌다. 족장 마니응개가 참호를 뛰어넘어 목책 안으로 들어오려 하므로 목책 안에서 화살을 쏴 거꾸러뜨리니 적들이 패해 달아났다. 이순신이 목책을 열고 쫓아가 잡혀간 농민들을 구해 돌아왔다." 『선조실록』
이 빛나는 승전을 기념하는 비석이 1762년(영조 38년)에 이순신 장군이 근무하던 곳에 세워집니다. 처음엔 주민들이 기념탑을 세우고 가까운 봉우리를 승전봉(勝戰峰)이라 불렀는데, 이순신의 5대손인 이관상(李觀祥, 1716~1770)이란 분이 관북절도사로 부임해 탑을 없애고 그 자리에 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이순신과 인연을 맺은 녹둔도는 함경북도 경흥에 있는 하천퇴적지형입니다. 녹둔도가 처음 우리역사서에 기록된 때는 『세종실록지리지』입니다. 4군 6진 개척 후 1432년 세종은 녹둔도에 길이 1천246척, 높이 6척의 녹둔토성을 쌓아 방비했습니다. 이후 세조 때 녹둔도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됐고 선조 때 이곳에 둔전을 설치하였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처음 발생한 녹둔도 전투입니다. 그 이유는 이순신의 상관 이일이 이순신의 증원 요청을 무시하고 책임을 이순신에게 떠넘겼기 때문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녹둔도가 처음 언급된 것은 세종시기인 1448년(세종 30년) 8월 세종대왕은 전국에 소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하게 하는 영을 내립니다. 병선의 주요 재목이므로 군사요충지 주변에서는 함부로 벌목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과 함께 두만강의 녹둔도(鹿屯島)를 군사요충지 중의 하나로 꼽았습니다. 
녹둔도는 섬이었으나 상류의 토사가 쌓이면서 18세기 이후에는 육지로 연결되었습니다. 섬이 늪지로 바뀌면서 농사짓는 사람들이 떠나갔습니다. 문제는 두만강의 잦은 범람으로 인한 토사의 퇴적으로 녹둔도 북쪽의 물줄기가 차츰 가늘어져 언제부터인가 녹둔도와 연해주가 이어진 것. 동해의 수위 변화도 두만강 수로 변화의 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1709년 청나라 강희제의 지시로 만든 지도에 이미 녹둔도와 연해주는 붙어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고종 때 제작된 듯한 경흥읍지의 녹둔도도 그렇게 돼 있습니다. 따라서 15세기 당시 녹둔도의 위치를 특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다만 최근 발견된 녹둔토성 추정지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높이 6∼7m, 길이 4km의 토축물은 함경도 조산에서 4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그에 따라 녹둔도와 연해주를 갈랐을 두만강 지류(일명 녹둔강)의 위치도 추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관심이 멀어져 가던 때, 청나라는 몰래 녹둔도를 러시아에 넘겼습니다. 청과 러시아는 1860년 흥개호조약, 1861년 훈춘조약을 맺고 두만강 인근의 국경을 정했습니다. 녹둔도는 이때 러시아의 땅이 돼버렸습니다. 훈춘조약을 체결할 때 우리나라는 참여 의사를 밝혔음에도 통고를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나라가 모르는 사이에 청과 러시아가 녹둔도를 러시아 땅으로 되었습니다. 1883년 10월 어윤중은 녹둔도를 순시하고 돌아와서 고종에게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녹둔도는 본래 우리 땅입니다. 신이 조산에 도착하여 지형을 살펴보니 섬 동쪽에 모래가 쌓여 저쪽 땅과 연결되어 있고, 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 국민이고 다른 나라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조선후기 조정은 녹둔도가 청나라와 인접한 국경지대에 있었기 때문에 상주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하지만 1869년 대흉년과 기근이 겹치면서 백성들은 먹을 것과 땔감을 구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비옥한 땅 녹둔도는 훌륭한 대안으로 여겨졌습니다. 러시아 또한 이곳에 러시아인들을 이주시킬 수는 없었고 따라서 조선인들의 이주로 마을이 형성되는 것도 막지 않앗습니다. 이를 통해 국경지대 안정화를 꾀했기 때문입니다. 즉 베이징조약 체결 이후에도 녹둔도는 엄연히 조선 사람들의 땅이었던 것입니다. 고종은 또 김광훈과 신선욱을 밀사로 파견해 녹둔도 현황을 파악하도록 했습니다. 이들은 녹둔도에 113가구, 822명의 조선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내용을 아국여지도를 새겨 넣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선 녹둔도는 나라 잃은 한인들의 근거지였습니다. 독립운동가 신필수가 1921년 옛 녹둔도인 녹동에 머물면서 남긴 일기에는 한인마을이 40가구에 이른다고 적혀 있습니다. 세르게이 간지 부소장은 “1930년대까지 녹둔도를 포함한 연해주에 한인 7만여명이 거주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정부는 조·러 수호조약 이후 조선은 몇차례 녹둔도 반환을 요청했으나 허사였습니다. 급기야는 1990년 9월, 북한은 아예 국경조약을 통해 러시아 영토임을 인정했습니다.
녹둔도에 대한 원주인이 누구인지 증거를 찾은 것은 러시아학자들이었습니다. ‘수류봉(水流峰) 산성’이라 불리는 둘레가 2.5km인 성터, 이 유적은 공교롭게도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으로 양분돼 하나의 유적이 중국과 러시아에서 동시에 문화유적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러시아 학자들은 조사가 어려운 저지대 대신에 당시 군사적 요충지인 수류봉을 조사하였고 조선시대에 해당하는 유물들과 함께 ‘대왕(大王)’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도 발견합니다.  ‘대왕’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은 조선만의 풍습은 아니지만 정황상 세종 때 설치한 6진과 관련한 큰 군사적 거점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러시아 학계의 1차 결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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