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했던 고려불교계의 희망 보조국사 지눌
2022. 9. 20. 10:30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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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불교는 국교의 위상으로서 국가의 지도이념으로서 그 역할을 해왔습니다.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은 「훈요 십조」에서도 불교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개인적인 신앙의 차원을 넘어서는 당부였습니다. 삼국시대 때부터 이어진 불교의 대한 백성들의 믿음은 고려시대에도 이어져 불교가 고려의 대부분의 백성들을 불교를 신봉하는 것은 물론 국가를 지키는 의미와 사상, 일상 생활에까지 깊이 관여하였습니다. 고려시대의 불교는 고려왕실을 유지하고 고려사회를 통합하는 사상적 밑그릇이었습니다. 고려는 불교를 통해 민심을 수습하려고 하고 국난을 물리치려고 했으며 문종이 건립한 흥왕사와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만든 초조대장경이나 강화로 천도하여 만든 팔만대장경도 불교가 단순히 신앙적인 차원을 넘어서 호국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고려시대의 불교는 그야말로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려시대의 사찰은 국가로부터 세금을 면제받으며 사찰 소유의 땅, 사원전 이외에도 왕실과 귀족들이 시주한 토지와 노비들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부도 만만치 않았으니 인재와 물질이 사찰에 몰려 고려 농토의 8분 1에 달하는 10만 결 이상의 토지가 고려사찰의 소유였고 사원노비가 8만을 넘어선 것입니다. 그리고 불교의 귀의하는 것은 고려시대에는 사회적으로 부와 명예를 얻는 하나의 방법이었ㅅ브니다. 대각국사 의천도 본래 왕자의 신분으로 스님이 된 것을 보면 고려시대에 불교의 위상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고려시대의 과거제도에는 승려를 대상으로 하는 승과제도도 있었고 왕실에서는 불교와 관련한 일을 하는 왕사 혹은 국사를 두었는데 이들은 매우 우대 받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아마 이런 식으로 불교의 힘이 커지면 폐단도 따라오는 법이었습니다. 의례를 앞세운 고려의 불교는 수행은 뒷전이 되었고 고려 왕실과 돈 많은 고려문신들의 후원을 받은 고려 불교가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일반 백성들에게 수탈자의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고려시대의 사찰은 당대 지배층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막대한 부를 가져가는 대신 도덕적인 기강을 잃어버리는 모순에 봉착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불교 간에 갈등이 빚어졌습니다. 나말여초에 유입된 선종과 그 전에 있었던 교종 간의 갈등은 고려시대 내내 존재했고 이들 간의 갈등으로 인해 본래의 목적인 내팽겨졌고 고려불교계가 풀어야 할 숙제의 양은 점점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무신정권기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여러 절에 있던 승려 2000여 명이 이의방 형제를 죽이려고 했으며 그에 따라 승려 100여 명이 죽었습니다. 또한 최충헌 시기에 거란병이 쳐들어오자 기회를 틈타 최충헌을 죽일 것을 모의하기도 했습니다. 이 때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승려의 수가 800여 명이 이른다고 하니 우리로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중시해야 할 스님들이 왜 당대 최고 집권자를 죽이려 했는가입니다. 아마 무신정권이 세워지고 고려왕실과 문신귀족의 힘이 약해지자 이에 기반을 잃은 고려불교계는 자신들의 입지를 되찾고자 이런 일을 벌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의도는 한국 불교 역사상 유례없는 참사로 이어진 것이며 수행에 매진해야할 고려의 불교가 그만큼 세속화가 되어 개혁의 대상이 될 만큼 부패되어 있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나타난 승려가 지눌 법사였습니다. 지눌법사는 1165년(의종 19년) 여덟 살의 나이에 출가하이 마음을 수행하고 스승을 찾아 참선하며 불도에 매진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수행하며 본 고려불교의 모습은 그가 온전히 수행의 길을 걷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당대 승려들은 세속화되어 있었고 지눌법사는 이를 안타까워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고자 지눌법사는 ‘권수정혜결사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는 세속을 떠나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매진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으로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산 속으로 들어가 결사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눌의 뜻에 대부분 고려시대의 승려들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저 아미타불이나 외우면 되지, 선정과 지혜를 닦을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래의 심성이 깨끗하다면 굳이 수행을 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냈습니다. 그렇게 개경 보제사에서 있었던 결사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얼마 뒤에 승과시험이 치루어져 당락에 따라 각자 이해관계가 얽히며 길을 떠난 것입니다. 지눌은 이 시험에 합격했지만 그는 초심을 유지하기 위해 지방으로 수행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보제사에서의 결사가 있은 6년 후, 지눌과 함께 뜻을 함께 하겠다는 승려의 편지가 날아들었고 지눌은 팔공산 거조사에 거처를 마련하고 승려를 모으니 겨우 서너 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이들의 뜻에는 인원이란 것이 의미가 없었습니다. 세속의 이익을 버리고 산 속으로 들어가 부처님의 말씀대로 수행하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인원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190년에는 <권수정혜결사문>을 내고 종파, 신분, 종교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뜻에 동참할 이들에게 마음을 열었습니다. 특히 <권수정혜결사문>은 승려들이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을 것[定慧雙修]을 호소하면서 지은 책으로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수행자들이 갖기 쉬운 의문을 제시하고 그에 답한 다음, 정혜결사를 하게 된 경위를 설명한 책입니다. 이 책을 근거로 하여 지눌의 수선결사가 사회변혁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불교계의 개혁운동으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불교계의 타락과 부패를 꼬집으면서도 근본적인 문제와 해결책보다는 항상 정을 익히고 혜를 고르게 함을 본분으로 삼고, 예불하고 독경하고 울력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각자 소임에 따라 경영하자는 데에 그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지눌의 이러한 모습은 당대 고려 불교를 문제점을 인식하고 불교 문제를 자발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의 모습으로 보았습니다. 불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자는 지눌의 생각은 세속화에 찌들어 있던 당대의 불교에 새로운 바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바람의 오히려 대중들의 공감으로 이어졌습니다. 정통 불교의 복구를 외치며 산속으로 들어갔지만 이러한 지눌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그 아래로 스님들이 모여 들었으며 출가하는 이들도 생겨났습니다. 특히 세속화에서 벗어나겠다는 지눌의 노력과는 별개로 최씨 무신정권과 왕실 그리고 귀족의 관심까지 받았습니다. 불교의 본연의 모습을 찾기 위한 노력이 오히려 대중들의 발걸음을 거조사로 향하게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늘어나니 거처를 옮길 수밖에 없었으니 그 곳이 바로 전라남도 순천시에 있는 길상사 터로 지금의 송광사 자리라고 합니다.
지눌은 폐사 직전의 길상사를 지방민들의 힘을 빌려 수선사로 중창하였습니다. 특히 수선사를 중창하는 과정에서도 당시 고려의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절은 고려왕실과 귀족가문의 후원을 받은 것이 아닌 향리층과 지방민의 도움을 받은 것입니다. 지눌 역시 귀족 출신이 아닌 지방 향리의 자식이었습니다. 당시 무신정권기라 기존의 문신귀족들이 도태되었고 그 틈을 향리들이 파고들어 중앙으로의 진출을 모색하던 시기였습니다. 또한 전국적인 농민항쟁으로 피지배계층의 의식도 성장했습니다. 따라서 이전의 불교와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 지눌의 사상에 새로운 사회계층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1205년에는 수선사가 완성되어 지눌의 결사운동이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돈오점수와 정혜쌍수를 오한 수행을 강조한 지눌은 자신의 수행에만 그치지 않고 중생의 구제에 대해 관심을 가졌습니다. 또한 지눌은 참선을 중요시하는 선종을 중심으로 경전 공부를 중요시하는 교종을 아우르는 조계종을 창시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눌이 적극적으로 불교개혁에 투신했다고 보지는 않지만 넓게 보면 그의 행적은 여러 사람에게 귀감이 되어 고려불교계의 변화를 일으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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