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는 왜 항쟁을 시작했나
2022. 9. 22. 10:33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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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서는 원래 특별히 선정해 뽑은 병사들로 이루어진 부대를 별초(別抄)라 하였는데, 최씨 무신정권 시절 최우는 자신의 권력을 보호하고 신변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힘세고 기골이 장대한 장정들을 뽑아 사병조직 야별초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몽골과의 전쟁이 계속되자 야별초를 확대해 정규군 조직으로 재편해 좌별초, 우별초로 나눴고, 여기에 몽골제국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하거나 송환된 사람들을 모은 신의군까지 합쳐서 마침내 삼별초를 이루었습니다. 삼별초는 정규군으로서 역할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최씨 정권을 보호하기 위한 사병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삼별초는 무신정권 그리고 몽골의 침략과 관련 있는 집단이었습니다. 이들은 강화 천도 후에 몽골군과 가장 치열하게 싸운 무사집단으로 따라서 경별초라는 칭송도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1258년, 최씨의 마지막 집권자 최의가 김준, 임연 등에 의해 피살당하고 왕정이 복고됩니다. 이어 1259년에는 몽골군이 고려에서 철수하고 태자 전이 몽골로 건너가 화의를 맺게 되었는데 이즈음 원종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최씨 무신정권이 무너졌지만 원종은 여전히 무신들의 눈치를 보아야 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이를 타개할 방법으로 원나라의 의지하기로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고려라는 나라가 30여 년간 몽골의 저항한 역사를 뒤로 하고 원나라의 그늘아래 스스로 가두는 것이었으며 이는 고려가 원나라의 간접적인 지배하에 놓이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실제로 당시 원나라의 황제 쿠빌라이는 고려의 원종을 신뢰했던 바, 다음과 같은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첫째, 불개토풍, 즉 고려풍속을 그대로 유지해도 좋다.
둘째, 개경 환도시기를 고려형편에 맞게 정한다.
셋째, 몽골 군대와 다루가치를 철수시킨다.
이것은 어떤 의미로 보면 원나라가 고려의 요구를 수용한 결과이기도 했지만 고려는 이를 위해서 답을 해야 했으니 그것은 바로 고려왕의 친조였습니다. 1264년, 교정별감이던 최고의 권력자 김준을 비롯한 세력은 이에 대해 정치적인 굴욕이라며 반대를 밝혔고 반대로 문신들은 찬성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원종은 ‘사소한 명분으로 전쟁이 재발되면 안된다,’고 하여 입조를 결정합니다. 그러던 중 김준과 그를 양아버지라 부르며 따르던 임연 사이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김준은 임연을 만나주지 않았고 이 갈등을 확인한 원종은 임연을 불러 김준을 제거하도록 하니 임연이 곧 교정별감이 되었습니다. 이후 원종은 임연이 자신에게 충성할 줄 알았으나 실상은 달랐습니다. 최고 권력자가 된 임연은 자신의 권력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숙청작업을 단행합니다. 특히 개경으로 환도할 경우 자신의 최고 권력자로서의 지위가 상실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친원파를 숙청하고 원종을 폐위한 다음, 원종의 안경공 창을 내세웠습니다. 이러자 몽골이 압박해오고 문신들이 반발하자 임연은 다시 원종을 복위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임연의 뒤를 이어 교정별감이 된 이는 그의 아들 임유무였습니다. 그도 역시 개경환도를 반대했으나 이미 대세는 기운 상태였습니다. 원종의 명을 받은 송송례와 홍문계가 거리에서 임유무를 살해했고 이로써 1170년에 시작된 무신정권기는 100년을 이어지다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무신세력이 사라졌으나 이를 통하여 고려의 왕이 제대로 된 권력을 회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힘의 공백을 몽골이 치고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몽골과 강화한 지 10년 만에 1270년 개경으로의 환도를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이 때 뜻밖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삼별초가 반발을 일으킨 것입니다. 원종은 상장군 정자여를 보내 배중손 등을 회유하도록 했으나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원종은 장군 김지저를 보내 왕명을 전했습니다. 그것은 삼별초를 해산하니 각자 생업을 찾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크게 분노한 삼별초의 지휘부는 항몽을 결의해고 섬에 남아 있던 몽골인들을 처단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개경으로 미처 나가지 못한 조정 신하의 가족들과 일부 사람들이 강화를 떠나기 위해 해안가로 몰려들자 삼별초는 이를 막고 화살을 쏘아 탈출하지 못하게 막은 것입니다. 그리고 삼별초는 승화후 왕온을 새 왕으로 추대하고 새로운 정부를 추대하니 이들도 곧 고려국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호응했습니다. 그만큼 몽골에 대한 반감이 컸기 때문입니다. 삼별초의 항쟁은 삼별초를 해산하고 개경으로 환도하려는 왕의 결정에 반발해 일어난 운동으로 곧 무신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려 한 왕과 문신세력들, 그리고 이에 대항한 무신들의 정치적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삼별초는 강화도를 떠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곳이 육지와 워낙 가까웠기 때문에 탈출하는 사람이 많았고 고려 정부에 반기를 든 만큼, 고려의 수군과 상대해야 했기에 본토와 멀리 떨어진 진도로 근거지를 정합니다. 삼별초는 서해안을 따라 내려가면서 여러 섬을 공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곳에서 지역의 군인들이 이에 동참했고 항해 74일 만에 진도에 도착하였습니다. 삼별초는 자신에게 호응하는 민심을 기반으로 빠르게 전라도 지역과 여러 고을 그리고 밀양까지 장악했습니다. 그리고 고려정부의 수탈이 심해 개경에 반감이 심했던 탐라가 삼별초에 적극 호응했습니다. 한편 원종은 이를 토벌하기 위해 김방경을 전라도 추토사에 임명하고 몽골 장수 아해와 함께 공격하도록 했으나 오히려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1271년에는 원나라에서 삼별초에게 화친을 하면 과거를 묻지 않고 용서하겠다라는 친서를 보내옵니다. 배중손은 이를 받아들여 잔치를 베푸는 듯 했으나 잔치 도중 원나라 사신을 억류하고 따라온 군사 90명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내륙으로 퍼졌고 급기야 개경에서는 관청 노비 숭겸과 공덕의 주도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삼별초가 진도에 거점을 정한 것은 이른바 해도입보 정책으로 몽골을 대하는 무신정권의 대표적인 수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내세운 것 중에 하나가 바로 고려왕실이 12대에 끝난다는 도참설로 따라서 남쪽으로 내려가 새로운 도읍을 정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고려왕조에 반기를 든 것은 몽골의 압력이 거세지는 와중에 자신들의 권력기반이 흔들렸기 때문이고 이 때문에 그들은 항쟁과 도참설을 근거로 고려정부에 저항한 것입니다.
이렇게 고려정부에 반대하고 자신들의 권력기반을 지키기 위한 삼별초의 항쟁에 백성들은 애 동참했을까요. 그것은 몽골과 고려정부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습니다. 몽골의 침략과 이를 방관한 고려왕실에 대해 백성들은 지치고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몽골의 침략했을 때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며 내륙이 몽골군에게 침탈당하게 된 것은 무신정권 탓이 컸고 무신정권은 삼별초를 동원해 백성들을 강제로 해도로 들어가게 하여 감시하는 등 백성들의 불만을 야기했으니 삼별초에 대한 원망도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하지만 백성들은 자신들을 지키지 못한 고려정부에 반기를 든 삼별초를 환영했고 지지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앞서 이야기한 노비 숭겸과 공덕의 반란 계획 이외에도 1271년 2월에는 대부도(경기 남양)의 주민들이 노비 숭겸과 공덕의 이야기를 듣고 몽골병사를 죽이는 일이 벌어졌으며 3월에 강원도 양양에서는 장세, 김세라는 사람이 수령과 아전들을 죽이려고 모의했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당시 고려백성들의 불만이 상당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으며 아마 이들 각각의 난이 성공하였다면 삼별초의 항쟁에 동참하여 그 규모도 커졌을 것입니다. 따라서 삼별초의 항쟁 과정에서 삼별초가 남부 일대에 크게 세력을 떨친 것은 백성들이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호응했기 때문이고 바로 몽골에 대한 항전이라는 뜻이 통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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