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 항쟁의 의미와 영향

2022. 9. 23. 10:35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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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0년 삼별초의 항쟁이 일어났고 진도에 거점을 잡은 이후 한동안 그 세력이 컸습니다. 진도는 당시 서남해의 조운선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이었는데 삼별초가 여기를 틀어막았으니 고려입장에서는 난감했습니다. 특히 고려 정부가 몽골에 보낸 국서에 따르면 경상도와 전라도의 조세와 공물은 육지로 운항할 수 없어 반드시 강이나 바다로 옮겨야 했는데 삼별초가 진도를 장악하여 조운선을 운항할 수 없다고 하였고 1271년 4월에 몽골에 보낸 국서에 따르면 삼별초가 30여개의 섬을 빼앗았으며 경상도 김해, 밀양, 남해, 창선, 가제도, 합포 등의 해안가의 마을이 삼별초의 공격을 받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한편 삼별초는 전라도 안찰사에 명하여 백성들의 조세를 진도에 바치게 할 뿐만 아니라 많은 군현이 삼별초에 항복하여 진도 정부가 세운 왕을 알현하기까지 했습니다. 
이에 다급한 건 고려정부였고 몽골 역시 민감하게 반응하였습니다. 당시 삼별초는 연전연승하며 자신들의 세력이 커지자 몽골군이 강화도로 침범하지 못했던 것처럼 자신들도 어쩌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편안히 있었습니다. 이전의 고려장수 김방경과 몽골 장수 아해의 여몽연합군이 삼별초에 패하자 몽골은 다시 장수 흔도로 하여금 치게 하였습니다. 고려 쪽에서 6천 명의 군사를 징발하였습니다. 1271년 5월 홍다구가 합세한 몽골군이 주축이 된 여몽연합군은 진도로 쳐들어갔습니다. 방심했던 삼별초는 크게 패하고 말았고 그렇게 세운 전도정부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 때 살아남은 김통정만이 패잔병을 수습하여 탐라로 들어갔고 남해도에 있던 유존혁도 병선 80여 척을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다급해진 삼별초는 제주도에 들어가 일본에 사신을 보냈습니다. 삼별초는 고려정부의 해산명령에 따르지 않을 것이며 몽골군이 곧 일본을 공격할 것이니 삼별초와 힘을 합쳐 저항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삼별초에 대해 잘 몰랐으니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주도에 들어온 삼별초 정부는 바깥공격을 멈추고는 방어진지 쌓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방어진지를 구축하는 동안 몽골과의 접촉이 없었던 것은 몽골 역시 일본에 대한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부담을 고려정부가 떠안았기 때문에 고려로서도 삼별초를 신경쓸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숨을 죽이던 삼별초 정부는 몽골인과 몽골에 협조한 고려인을 납치할 것과 조운선을 탈취한다는 목표를 정한 뒤, 내륙을 공략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 고려정부는 크게 당황하였습니다. 삼별초는 활동을 재개한 지 두 달 만에 조운선 20척을 나포하고 세미 3200석을 탈취하는데 성공합니다. 이에 고려 조정은 이들을 회유하기로 했습니다. 이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삼별초를 진압하기 위한 여몽연합군이 다시 결성되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고려정부는 다시 회유를 시도하면서 당시 삼별초의 우두머리였던 김통정의 조카를 선유사에 포함시켜 보냈습니다. 하지만 김통정은 다섯 명의 선유사 중 4명을 단칼에 베어버렸으며 조카만 살리며 오랑캐의 앞잡이가 되려 한다며 부끄러운 줄 알라며 꾸짖었습니다. 자신이 보낸 선유사들이 모두 살해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 원나라 황제는 즉각 군대를 출동시킵니다. 

제주 항몽유적지에 전시된 삼별초의 마지막 전투 기록화.

때는 1273년, 삼별초는 끝까지 항쟁했으나 역부족이었습니다. 제주도에 있는 삼별초를 진압할 당시 진도공략과는 다르게 고려군이 주력이었다고 보여집니다. 이 때 고려군을 지휘한 것은 나유와 김방경이었는데 김방경은 몽골황제로부터 포상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또한 몽골의 고려에 대한 수탈은 매우 컸다고 알려졌는데 제주도의 삼별초를 진압한 이후에는 고려가 자체적으로 무기를 제작하고 몽골의 과도한 공물요구도 자제되었다는 점은 당시 제주도의 삼별초를 토벌하면서 고려군의 활약이 엄청났음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고려정부군이 활약한 여몽연합군의 공세에 견디지 못하고 삼별초의 지도부 70명은 김통정과 함께 산속으로 들어가 자결하는 것으로 삼별초의 항쟁을 끝냈습니다. 삼별초의 항쟁은 고려가 본격적으로 원나라에 종속됨을 의미했습니다. 삼별초가 버텨줄 때만 하더라도 원나라는 고려에 대한 입장을 고려해 주어야 했는데요. 자칫하면 몽골의 압박에 고려의 민심이 돌아서 삼별초를 지지하고 합류하게 된다면 원나라 입장에서는 이도 부담스러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삼별초가 없어진 마당에 원나라를 고려를 어느 정도 인정해 주는 그런 것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개경천도하며 약속했던 불개토풍을 포함한 여러 약속들은 지킬 필요가 없었고 고려도 어쩔 수 없이 몽골에 대한 요구를 수용하며 따라가야 했습니다. 이러한 삼별초의 항쟁은 기득권층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반왕조운동에 지나지 않았을까. 아니면 몽골과 결탁한 고려왕조와 문신, 그리고 원나라에 대한 저항운동이었을까. 
그전에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바로 최씨정권이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이유입니다. 그건 바로 최씨정권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수의 반대 의견이 있었음에도 이 의견은 당시 최고 집권자의 결정이라는 이유로 진행되었고 별다른 대책 없이 백성들은 차후에 있을 몽골의 침략 아래 방치되었습니다. 물론 몽골에 대해 항전도 이어졌지만 이 기간동안 희생도 많았고 1254년 한 해 동안에만 206800여 명이라는 엄청난 고려인들이 몽골로 잡혀갔습니다. 그럼에도 강화도정부는 아랑곳없이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였고 이에 반감을 품은 일부 고려백성들은 몽골군을 반기며 그들에게 투항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계속된 몽골군의 침략으로 최우가 굳게 가지고 있던 항전도 명분을 차츰 그 힘을 잃어갔고 이는 최씨무신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졌습니다. 이후 무인들이 원종을 폐하자 원종은 몽골의 도움을 받아 다시 왕위에 복귀하였으며 1270년 길고 길었던 무신정권기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전남 진도의 남도석성에서 배중손은 여몽연합군을 상대하다 최후를 맞이하였다.

하지만 강화도에 남아있던 삼별초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세력을 구축하여 고려와 몽골과의 일전을 준비하였습니다. 이들이 계속하여 항전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삼별초의 병력 뿐만 아니라 고려 백성들의 지지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들의 항쟁은 기본적으로 정권변화가 가져온 반란의 성격이 더 강했습니다. 무인정권의 붕괴는 더 이상 삼별초가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삼별초는 투쟁을 결의하였고 1930년대 일제강점기의 치하에서 이들의 활동은 민족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한 역사적 사건으로 포장되었습니다. 또한 후에 5.16 군사 쿠데타도 그들의 정치적 행보를 정당화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들 정권은 당시 무인정권을 진취적이고 민족적인 것으로 묘사하였고 이러한 역사인식은 삼별초에 행적에도 적용되었습니다. 사실 이들이 몽골에 항전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민족적이라는 모습으로 엮는 데에는 무리가 따릅니다. 삼별초의 행적은 오히려 권력투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삼별초가 몽골에 대한 항쟁이라는 이면에는 그들이 생존하기 위해 강화도의 백성들을 사실상 인질로 삼았고 진도로 근거지를 삼았을 때 인근 고을을 노략질하여 필요물자를 획득하였습니다. 하지만 고려중앙정부의 수탈을 당해온 많은 백성들이 삼별초에 호응한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어찌보면 대몽항쟁이란 단어는 삼별초가 아닌 당시 이에 협조한 고려민중들의 몫일 것입니다. 
한편 삼별초의 항전에 대해 일본도 주목했습니다. 삼별초가 제주도로 옮겨가며 끝까지 저항한 결과 몽골군의 일본 침략이 늦어졌다는 것입니다. 몽골은 이미 일본을 공략할 계획을 세우고 제주도를 그 전초기지로 삼았으니 쿠빌라이가 제주 성주를 불러들인 것도 제주도가 갖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신정권기에는 이미 제주도의 중요성을 알고 진작에 이곳을 최후의 기지로 생각하고 남송과 일본과 연합하여 대몽연합전선을 연계하려던 것 아닌가 싶은데요. 무신집정자들이 제주도를 최후의 보루로 생각했다면 제주도가 삼별초의 몰락지이자 최후의 항쟁지역이 된 것도 우연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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