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수척 이야기
2022. 9. 21. 10:31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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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민이 고려무인집권기에 권력을 누리던 시기 그의 아들은 이지영은 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못된 짓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여인의 남편이 집을 비우면 그를 틈타 관계를 맺곤 했습니다. 그는 압록강 부군이 삭주분도장군으로 있을 적에 여러 여자들을 불러 술판을 벌였는데 그는 더욱 미색을 뛰어난 여자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지방관리가 조심스럽게 추천한 이가 바로 양수척 출신의 자운선이라는 18세의 여인이었습니다. 양수척은 본래 후백제의 병사들이 후예들로 변방으로 내쫓겨진 무국적의 무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사냥과 화전을 업으로 삼았고 여자들은 춤과 노래로 생계를 꾸렸는데 몸을 팔기까지 했습니다. 이들은 공동체 의식이 남달랐고 누가 벌어도 부족의 소유였습니다. 미인은 부족에게 큰 돈을 벌어다 줄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환영받았고 당시 양수척의 미인으로 자운선이 있던 것입니다. 자운선은 이지영의 첩이 되는 조건으로 양수척인 자신의 부족을 평민으로 만들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지영을 그리 해주겠다고 해놓고는 그들을 자운선의 종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국적이 없던 양수척은 호적에 등록이 되었으니 세금을 내야 했고 이지영을 이를 통해 세금을 착복하여 부를 축적해 나갔습니다. 자운선이 부족의 원망을 산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지영이 죽으니 최충헌이 또 자운선을 첩으로 삼고 인구를 계산하여 공물을 징수함이 더욱 심하므로 양수척 등이 크게 원망했다. 거란병이 침구해오자 항복하고 향도했기 때문에 산천의 요해와 도로의 원근을 모두 알게 되었다. 양수척은 태조가 백제를 칠 때에 제어하기 어려웠던 유종으로 본래 관적과 부역이 없었다. 즐겨 수초를 따라 옮겨 사는 것이 무상하여 오직 사냥을 일삼고 유기를 엮어 파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대개 기의 종족은 본래 유기장의 집에서 나왔다.” 『고려사』
양수척이 자운선이 원망한 이유는 본래 무국적의 사람들이었으나 이지영이 이들을 자운선의 노비로 만드는 바람에 각종 부역과 세금에 시달린 것입니다. 본래 자운선의 의도는 이게 아니었기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뜻과 다르게 자신이 속한 부족민들을 평민이 아닌 고려의 노비신분으로 만들게 하였으니 부족민들의 원망은 컸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 양수척은 거란이 침범해 오자 항복을 하고 길안내를 하였으니 고려에게 있어서는 큰 타격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양수척의 무리는 익명서를 붙여 다음과 같이 입장을 밝혔습니다.
“우리들이 반역한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다. 기생집의 수탈을 견디지 못하여 거란 외적에 투항하여 길 안내가 되었다. 만약 조정에서 기생의 무리와 순천사주(順天寺主)를 처단해 준다면 당장 창끝을 돌려 나라를 위하여 일하겠다.”
최충헌이 이를 듣고는 자운선과 상림홍을 고향으로 돌려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이는 문구 중에 기생집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자운선은 고려시대의 기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의 기생은 고려시대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 중기의 실학자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기생이 양수척에서 유래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양수척은 백제 유기장의 후예로서 버드나무로 소쿠리ㆍ키 등을 만들어 팔며 떠돌이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고려 중기 무신 정권의 최고 지도자였던 이의민이 이들을 붙잡아 남자는 ‘노(奴)’를 삼고 여자는 기적을 만들어 ‘기(妓)’를 삼았습니다. 그리고 관청에서 기녀로 하여금 노래와 춤을 익히게 하여 기생이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편 고려에서는 소나 돼지를 잡는 사람을 ‘화척’ 혹은 ‘양수척’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들에 대해서 북방에서 흘러들어온 유목민으로 보았습니다. 후백제의 후손이라고 하지만 여진족이나 거란족의 후손으로 보고 있는 견해도 있습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국적없이 떠도는 존재였기 때문에 고려 국가에서는 보호해야 할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고려에서는 이들은 고려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층이었으며 그것은 조선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종 대에는 ‘화척’이나 ‘양수척’같은 명칭보다는 일반백성을 뜻하는 ‘백정’으로 합쳐 부르기로 했습니다. 조선의 백성들은 이를 싫어했고 그 이유는 이들이 북방에서 흘러들어온 천민집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백정은 ‘도살업을 하는 무리’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국적이 없었던 탓이었는지 아니면 고려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멸시받았던 때문인지 고려말 왜구의 침입시에도 길잡이역할을 했습니다. ‘고려사절요’ 에 나오는 1382년(우왕 8)과 이듬해 양수척(楊水尺)과 재인 등이 가짜 왜적이 돼 강원도 일대를 약탈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에 나아가 어떤 일본학자는 “왜구의 주체는 왜인 복장을 한 고려인이며 일본인은 10~20%에 지나지 않았다.”며 ‘왜구=고려·조선인 주체설’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고려의 제주도민과 재인 등도 포함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주장은 고려에 침입한 왜구의 인원이 많다는 점과 선박, 왜구가 소유한 말이 너무 많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하였습니다. 실제로 왜구는 침입할 때 500척의 배를 동원하기도 했으며 말도 1000필을 끌고 다녔는데 일본인이 이 정도의 말을 동원하기에는 너무 많고 밀도살을 전업으로 하는 화척과 연합하여 얻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고려말 왜구는 실제로는 10 명 중 1~2명이 지나지 않는다며 세종 28년에 판중추원사 이순몽이 “본국의 백성들이 거짓으로 왜인의 의복을 입고서 무리를 지어 난을 일으켰다.”는 발언 또한 주목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현재 학계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으나 왜구의 침입이 있었을 때 간혹 길잡이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고려말에는 왜구가 조류가 복잡한 한반도 서해안을 타고 올라가거나 내륙 깊숙이 들어와 활동을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들에게는 현지사정에 밝은 고려인이 있었다는 것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럼 고려말 왜구는 왜 대규모가 가능했을까. 당시 일본은 남북조의 혼란한 시기였는데 궁지에 몰린 세력이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고려로 침탈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시 왜구는 단순히 해적이 아닌 남조의 수군이 동원된 것으로 이를 이용하여 고려의 섬과 목장을 약탈하며 말도 탈취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양수척과 관련된 이야기는 조선에서도 전해집니다. 조선시대 때 4군을 개척한 장군 최윤덕은 아버지가 최운해입니다. 그는 고려말 무장으로 이름을 날린 인물로 참판승추부사를 역임하였습니다. 하지만 서거정의 슨 『필원잡기』에 의하면 최윤덕의 친모는 최윤덕을 낳자마자 사망하였고 아버지 최윤덕이 변방의 장수로 나가있던 탓에 이웃집에 맡겨졌는데 양수척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활쏘기를 잘해 서거정의 아버지인 서미성에게 발탁되었습니다. 한편 조선후기에는 양수척과 관련된 효자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조선시대 청주의 한 마을에 부부가 아들을 낳았는데 성격이 괴팍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밑으로 동생이 둘이 있었으니 이 둘도 성격이 포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출신성분에서 유래하여 지금은 흔히 양수척 삼형제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부모에게는 물론 동네 사람들에게 골칫덩어리였습니다. 부모에게 불효하고 잔치집이나 초상집을 엉망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노모가 병들자 고려장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런데 인근에 살던 경연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문신으로 효자인데다가 청백리였습니다. 어느 날 경연의 집에 심부름을 갔다가 경연이 부모보다 먼저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를 보고 욕했는데 알고 보니 부모를 위해 자기가 먼저 이불 안은 따뜻하게 하고 그 다음에 부모를 이불 속으로 들어가게 한 것입니다. 이에 마음을 고쳐 먹은 양수척 삼형제는 효자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병이 나자 양수척은 약을 지어 집으로 향했는데 폭우로 물이 내를 건너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에 건너편의 자신의 집을 바라보며 걱정하고 있을 때 물길이 갈라져 어머니를 살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늘도 감동한 양수척의 이야기가 우리나라 유일의 천민 효자비가 세워지니 이른 바 ‘양수척 효자비’가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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