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후반 원나라 간섭은 어느 정도였을까.

2022. 9. 24. 10:37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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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가 고려정치에 간섭하며 많은 공물을 요구하던 시기는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로 원간섭기라고 부릅니다.  고려의 끈질긴 저항으로 고려는 독립된 나라의 지위는 유지할 수 있었으나 대신 원나라의 간섭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고려가 몽골과의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몽골의 요구조건을 들어주어야 했음을 말합니다. 원나라는 철령이북의 땅에 쌍성총관부를 두어 고려 땅을 직접 다스리기도 했으며 일본한테는 고려를 통해 조공을 바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이에 몽골은 정동행성을 마련하고 이를 통해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배를 만들고 군사, 식량을 마련하라고 하였습니다. 
고려에는 ‘충’자로 시작하는 왕이 많은데 이것은 익히 알고 있듯이 고려의 왕이 몽골에 충성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것입니다. 이러한 명칭은 원나라의 간섭을 받던 이 시기의 고려의 왕에게 붙여졌고 이 시기의 고려는 원나라 황실의 공주와 결혼하여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당시 고려의 왕을 ‘폐하’가 아닌 ‘전하’, ‘태자’를 ‘세자’라 불렀으며 왕자들은 원나라에서 성장하며 교육을 받고 머리도 몽골식 머리인 변발을 했습니다. 그리고 몽골의 옷을 입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원나라의 힘을 등에 업어 자기 욕심을 채우는 집단이 등장했으니 이는 바로 권문세족입니다. 이들은 넓은 농장과 많은 노비를 거느렸으며 이러한 것은 불법적으로 얻은 것들이었습니다. 충선왕을 비롯한 여러 왕들은 이를 시정하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았고 이 기간 동안 원나라의 간섭으로 인해 권문세족이 오히려 큰 소리 치는 상황이었습니다. 
원간섭기에는 원나라와 문화를 주고받아 고려도 발전을 이룩한 면도 있었습니다. 고려시대 무인정권기에는 신분과 배경보다는 실력이 중요시되는 풍조가 나타났는데 원간섭기에는 그러한 경향이 더 강해졌습니다. 그것은 원나라가 그 지역의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 실력있는 사람을 우선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당시 세계 공용어로 통하고 있던 것은 몽골어였는데 양반들은 몽골어를 오랑캐의 언어라 하여 배우지 않았지만 평민이나 노비들 중에는 몽골어를 습득하여 통역관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원나라와의 무역을 통하여 농업, 수공업, 상업이 크게 일어났고 따라서 신분이 낮은 평민이나 노비들 중에도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생겨났습니다. 물론 이면에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고려국왕의 사정도 있었습니다. 고려국왕은 원에서 성장하고 교육을 받은 후 왕으로 책봉되었습니다. 원나라에서 지내다 보니 자연스레 고려 내의 정치기반은 취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왕은 측근들을 중심으로 정치를 해나갔는데 국왕이 바뀔 때마다 측근이 바뀌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때 등장한 것이 권문세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일본원정이나 내란 등을 진압하면서 공을 세운 사람이거나 원나라 말에 능한 사람, 그리고 원나라 왕실의 환관이나 공주집안과 관련된 사람으로 구성되었는데 따라서 출생이 천하더라도 이러한 경로를 통해 출세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이 시기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무역이 활발했던 시기로 기억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문이 활짝 열려진 시대였습니다. 특히 동아시아 교역에서 한반도의 위치는 중요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만 이 시기의 무역상황에 대해 크게 언급되지 않은 이유는 아무래도 ‘원간섭기’라는 시대적 배경에 있을 것입니다. 이 시기가 일방적인 수탈의 시대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국가차원에서 무역선을 만들어 중국과 교역하거나 원의 해상단속이 강화된 시점인 1330년대 이후에는 충혜왕은 육로위주의 교역정책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당시의 고려는 인도의 마이바르국과 이란의 일칸국과 접촉하기도 했으니 이는 원나라가 유례없이 세계적인 제국을 이룩했기에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그에 따라 빈부 차가 커지니 가난한 농민들은 토지를 잃어 노비로 전락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때 들어온 원나라의 과학은 훗날 조선 전기 과학에 발전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1259년 고려 원종의 태자 시절, 그는 쿠빌라이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이 만남에서 몽골이 고려의 풍속을 고치도록 강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냅니다. 이 말은 고려가 몽골의 제후국이 되는 대신 고려의 왕실을 포함한 제도, 영토와 주민을 유지하는 것에 대해 원나라가 인정해주는 것으로 사실상 원나라와 고려가 사대관계를 맺은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하지만 몽골은 이러한 약속에도 몽골 천하라는 야심을 버리지 않았으니 그들은 고려조정을 향하여 엄청난 공물을 요구한 것입니다. 인질과 식량, 군사지원을 요구했고 다루가치를 두어 고려를 감시하며 횡포를 부렸습니다. 그리고 이후 왕위에 오른 충렬왕은 원세조의 공주를 맞아들여 부마국이 되었는데 그러면서 1278년 쿠빌라이를 찾은 충렬왕은 선대 왕이 맺은 약속에 이어 원 주둔군의 철군과 조세징수권한의 반환 등 국권을 회복하는데 힘을 쓰는 한편 원나라와 고려의 사대관계를 재확인합니다. 고려의 수동적인 관계에서 벗어나기 위한 조그만 노력라고 할 수 있었는데요. 이후 원은 고려로부터 약재와 청자, 비단, 종이, 담비가죽, 사냥매 등 진귀품을 조공이라는 명목으로 요구하였고 세자들은 인질로 잡아가 자신들의 요구에 맞게 교육시켰습니다. 
그 중 고려를 공포에 떨게 만든 원나라의 요구는 바로 공녀였습니다. 공녀 이전의 우리나라 혼인은 자유혼이 대세였습니다. 『삼국지』위지 동이전에서는 고구려의 혼인에 대해 ‘남자와 여자가 서로 좋아하는 사이에서 이루어진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원나라는 고려와 한 집안이 되었으니 통혼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청녀진공사신이라는 이름으로 50여 차례나 와서 해마다 150명의 여자들을 데려갔고 그 외에도 수시로 여자를 데려갔습니다. 이렇게 끌려간 공녀들은 몽골 군인의 아내가 되거나 지배층의 아내 또는 첩이 되었습니다. 고려는 처음에 과부를 보냈지만 몽골에서는 어린 10대들을 요구했습니다. 그리하여 고려정부는 마을로 군인들을 보내어 강제로 여인들을 끌어내니 이 때부터 조혼이 유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어린 남녀 간의 혼인은 당사자의 의견보다는 부모 의사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조혼의 성행은 나중에는 중매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공녀제도에 가슴아파한 고려의 학자 이곡은  ‘언관을 대신해 어린 여자를 취하는 것을 혁파할 것을 청하는 상소’라는 이름으로 원나라 황제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고려의 풍속에서는 아들을 따로 살게 할 지언정 딸을 내보내지 않습니다. 부모 봉양은 딸이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공녀로 뽑히면 부모와 친족이 모여 곡을 하니 그 우는 소리가 밤낮으로 끊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우물에 빠져죽는 일도 일어납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소에도 공녀 선발은 원나라의 간섭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건너간 수많은 고려의 공녀와 원에 유입된 고려의 문물로 인해 원나라에서는 고려의 복식과 음식, 기물이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두고 고려양 혹은 고려풍이라고 불렀습니다. 명나라의 초기의 복식이 조선의 한복과 닮은 것도 이러한 이유로 원나라에서 유행한 고려양이 100년간 유지되니 그것이 명나라 초기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명나라 제 9대 황제인 홍치제가 고려양은 중국의 풍습이 아니라며 고려양을 금지시키고 송나라 복식으로 회귀하였습니다. 그리고 한족복식은 시대별로 봐도 날씬한 스타일인데 고려양은 풍성한 스타일이고 중국양식은 원피스형태이며 고려옷은 유목민족의 의복을 기본으로 한 투피스형태입니다. 반대로 고려에서도 몽골풍이 유행하였는데 이 때 유행한 몽골식 철릭이 조선에 들어와서는 문무관료의 평상복으로 변화하였으며 신부가 쓰는 족두리, 만두, 양을 잡아 삶아먹는 술루라는 음식에서 유래했다는 설렁탕이 있으며 왕과 왕비에게 붙이는 ‘마마’라는 단어와 임금의 음식을 부르는 ‘수라’, 궁녀를 뜻하는 ‘무수리’ 등도 궁중에서 쓰인 몽골어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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