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이 만들고 대대로 지켜온 팔만대장경
2022. 9. 26. 10:41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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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은 불교성전의 총칭으로 부처의 가르침을 수록한 경장, 부처의 가르침을 해석한 문집인 논장, 그리고 불교의 계율을 수록한 경전을 의미하는 율장 이렇게 3가지 기록을 의미합니다. 석가모니가 6년 고행 끝에 35세에 득도하여 80세에 열반할 때까지 4년 동안 제자들과 대중들을 가르치고 깨우쳐주었던 진리와 이것을 풀이한 것을 기록한 것이며 이 내용을 나무판에 글자로 새겨 종이에 박아내도록 한 것이 바로 대장경판입니다. 그리고 팔만대장경이라는 것은 물건의 많음을 의미하는 8만 4천의 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번뇌를 많음을 들어 이것은 팔만사천진노라고 하기도 하고 탑파(塔婆)가 아주 많을 때 팔만사천탑이라 하는데 부처가 이러한 인간의 번뇌를 없애기 위해 8만4천의 경전을 설교하였고 이를 팔만사천법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팔만이라는 숫자가 비롯되었으며 부처의 가르침을 집대성을 대장경에 팔만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입니다.
이렇듯 부처의 가르침을 묶은 대장경은 그의 제자들의 의해 기록되어 각국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최초로 대장경을 완비하여 경판을 새긴 것은 중국 송나라 때 태조 4년, 즉 971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983년에 완성되었습니다. 이를 개보판대장경 또는 촉본(蜀本)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개보판대장경은 8년 후인 991년, 고려 성종 10년에 한언공이라는 사람에 의해 우리나라에 들어왔습니다. 아마 이러한 것은 고려 사람들에게 큰 감탄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주변국들에게도 자극이 되었는데요. 거란도 역시 대장경을 1054년에 완성했으며 고려에서도 현종 대에 어머니의 명복을 빌고 거란군을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판을 새겼다고 전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1011년에 제작한 초조대장경입니다. 하지만 1232년에 몽골의 침략에 의해 불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에 당시 고종은 강화도로 피난 와서 대장경판을 다시 새기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1236년에 대장도감을 강화에 분사(分司)를 진주지방에 두어 경판을 새기기 시작하여 16년 만에 완성한 것이 지금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으로 그 수가 팔만 장이 넘는 방대한 양입니다.
국가가 주도하는 사업에 귀족과 백성 그리고 불교 내의 여러 종단들이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수많은 경판들 그 중에서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것은 81258장입니다. 이것이 한 장씩 쌓으면 무려 3200미터에 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게도 1톤트럭 280대에 이릅니다. 그리고 여기에 새겨진 글자는 5천 2백 만자가 넘습니다. 게다가 경판에 글자를 새기는 사람들은 글자를 새길 때마다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절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목판을 글자 하나라도 틀리면 경판 자체를 다시 제작했기에 이것을 제작하는 이들은 엄청난 긴장감과 압박감, 그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 번 절을 할 때마다 고려인들의 불심까지 더해졌을 것입니다. 고려인들의 팔만대장경을 만드는 정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국가사업이니 만큼 가장 좋은 나무를 골라 1~2년 동안 보관합니다. 이것은 나중에 나무를 사용할 때 갈라지거나 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보관한 나무를 경판 크기로 자르고 소금물에 삶습니다. 그리하여 나무의 진액이 빠지고 소금기가 표면에 흡착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다시 1년에서 2,3년을 바람에 건조시키면 드디어 글자를 새기기 위한 재료가 준비된 것입니다.
“국왕과 태자 공후백과 문무백관들은 목욕재계하고 분향하며 고합니다. 몽고의 잔인하고 흉포한 것은 말로 형언할 수 없으며 어둠을 다 모은 것 같습니다. 제불보살은 이 간절한 기원을 들으사 신통의 힘으로 몽고군이 멀리 달아나 다시는 이 강토를 짓밟지 못하게 하시고 나라 안팎이 평안하기를 기원합니다.” -1237년 대장경판을 새기면서 불력에 기원하는 군신기고문 중- 이규보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팔만대장경판은 주변국들의 불교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것은 당시 동아시아 지역에 있던 모든 불교경전의 내용을 집대성한 것으로 동아시아 대장경을 연구, 혹은 제작할 때 팔만대장경은 필수 자료가 되었습니다. 제작과정과 내용에서 큰 가치를 지닌 팔만대장경판은 2007년에 ‘해인사 고려대장경판과 제경판’이란 이름으로 세계 기록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그럼 고려시대 때 팔만대장경판이 어떻게 800년이 넘는 시간동안 보관될 수 있었을까. 팔만대장경은 본래 강화도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다가 강화도에 있는 선원사에서 보관되었습니다. 이 절은 무신집권자 최우가 세운 절입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 때부터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서 보관하게 되었습니다. 장경판전은 통풍을 중요시하여 창의 크기를 남쪽과 북쪽을 다르게 하였으며 각 칸마다 창을 내어 자연스러운 대류현상이 일어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책을 꽂을 수 있게끔 꽂이를 만들어 꽂아두었는데 이렇게 보관하여 바람이 잘 통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장경판정의 흙바닥에는 숯, 횟가루, 소금, 모래를 순서대로 넣어 습도조절에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고려 이후에 들어선 조선이 유교를 숭상하게 되고 당시 일본은 불교를 믿으면서 조선으로부터 대장경을 얻으려고 하는 노력은 집요했습니다. 조선 태조대에는 조선인 포로 570명이 돌아오자 답례로 인쇄본을 하사하였고 이후 대장경의 가치를 알아본 일본은 지속적으로 포로와 대장경의 교환을 요구했습니다. 태종 역시 일일이 대장경을 인쇄해서 준다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었으므로 대장경을 주려고 했으나 마음을 바꾸었는데 신하들이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지속적인 일본의 요구에 조선 안의 대장경책이 사라질 정도였고 이를 통해 일본의 불교는 발전해갔습니다. 1411년을 코끼리를 선물로 주며 대장경판을 요구했으나 이 코끼리는 먹거리가 엄청나 애물단지로 전락했으며 세종 대에는 토산물을 바치며 대장경을 요구한 일본 사절단은 단식투쟁까지 하였습니다. 빈손으로 돌아가면 처벌받는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세종은 우리에게 의미 없으니 일본에 내어주자고 했으나 신하들이 반대했습니다.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경우 다른 요구를 해올 것이라는 판단이었지, 대장경판이 갖는 가치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일본 측 입장에서는 조선은 불교를 배척하기 때문에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 대장경판을 줄 거라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일본의 법사가 팔만대장경판을 건들면 일본이 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고 일제강점기에도 반출하려 하자 해인사 승려들이 대장경을 불태워 같이 죽겠다고 저항했습니다.
해인사는 오랜 세월을 버티면서도 화재가 나기도 해서 건물을 짓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해인사의 대부분은 19세기에 지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해인사 장경판전만은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전쟁 때에도 위기가 있었습니다. 당시 지리산 일대에 빨치산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를 토벌하기 위해 전투기 4대가 출격했습니다. 이 중에는 김영환 대령도 탑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 공군이 김영환 대령이 이끄는 전투기에게 연막탄을 떨어트려 해당목표물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기 장소가 공교롭게도 해인사였습니다. 당시 김영환 대령은 명령 불복종에 의한 처벌을 각오하고 폭격이 아닌 기관총으로 위협사격을 가할 것을 명령합니다. 작전이 끝나고 미 공군의 소령은 연막탄 연기를 보지 못했는지 왜 지시대로 이행하지 않았는지 따졌으나 김영환 대령은 2차 세계 대전에서도 미군이 교토 폭격을 하지 않았던 것을 이야기하며 무장공비를 소탕하기 위해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파괴할 수 없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분노한 미군을 비롯한 상부는 김영호나 대령을 군사재판에 회부했고 사형이야기까지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가 세운 전공과 동료들의 증언으로 처분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고려인들의 숨결과 노력으로 만들어낸 팔만대장경판을 조선은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이 기록물을 장경판전에 옮겨 귀하게 보관하여 오늘날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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