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천사지 10층석탑 그 끝나지 않은 여정

2022. 9. 28. 10:46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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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경천사지 10층 석탑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거대한 불탑이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대리암을 만들어진 이 탑은 다른 한국탑들과 다른 이미지와 더불어 13미터가 넘는 위용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 탑은 바로 개성 경천사지 10층 석탑입니다.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지만 이 위치에 있기까지 슬픈역사를 간직한 탑이기도 합니다.
이 탑이 소재해 있던 경천사는 지금의 개성에 있던 절로 고려 전기에 건립된 사찰이었습니다. 이 절에서는 역대 왕과 왕후의 제사를 지냈다고 하니 엄청 중요한 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제하는 조선이 들어서면서 절은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절에 있던 탑이 바로 경천사 10층 석탑입니다. 이 탑은 당시 황제폐하와 황후, 황태자의 안녕을 기원하며 만든 것이라고 건립배경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럼 황제폐하와 황후, 황태자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 걸까요. 바로 기황후와 그녀의 남편인 순제. 바로 이들 아이유시리다라입니다. 
따라서 이 탑을 건립한 세력은 자연스럽게 그려집니다. 바로 친원세력으로 강융과 고용보 등이 그들입니다 .강융은 본래 관노 출신인데 26대 충선왕을 비롯하여 역대 왕들의 최측근이었습니다. 그가 권세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딸이 원나라의 승상 탈탈의 애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려출신의 환관 고용보는 원나라에 가서 황제의 신임을 얻었으며 기황후를 순제에게 소개해 황후가 되게끔 하는데 도움을 준 인물입니다. 당시 이들의 권력은 막강했습니다. 
친원세력이 건립에 중심이 되었던 탑이니만큼 원나라장인이 이 탑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 석탑의 대부분이 화강암인데 그보다 무른 대리석으로 조각된 것도 이러한 이유였고 우리나라 석탑들이 홀수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탑은 10층인 것도 원나라의 영향입니다. 그리고 당시 원나라에서는 라마교가 유행했는데 이러한 것에 영향을 받아 1층에서 3층까지 기단부가 아(亞)자 형태로 사면이 돌출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뛰어난 균형미와 화려한 장식, 정교한 솜씨가 어우러진 석탑으로 원나라 장인에 의한 작품이니 100% 원나라의 양식이겠거니 생각할 수 있겠지만 탑신부 4층부터 10층까지는 사각형 평면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전통양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기단부에 사자, 용, 연꽃, 서유기 장면 등 불법 수호자와 나한들이, 1층에서 4층까지는 부처의 법회 장면이, 5층에서 10층까지는 합장한 불좌상이 표현되었습니다. 경천사 10층 석탑은 외래적인 요소와 고려의 요소가 혼합된 예술작품인 것입니다. 

고려석탑의 전통적인 양식과 이국적인 형태가 조화를 이루며, 고려인이 생각한 불교 세계가 입체적으로 표현된 석탑으로 고려 충목왕 4년인 1348년에 만들어졌다.

  후에 조선에서는 숭유억불정책을 썼습니다. 하지만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왕실에서는 더러 불교를 신봉하기도 했습니다. 제 7대 세조가 불교신자였고 그는 효령대군(세종대왕의 형)에게 명해 원각사를 짓게 하고 탑을 세우는데 원각사탑은 경천사를 모방하여 만든 것이었습니다. 당시 기록으로는 일본에서 구경 올 정도로 원각사와 원각사탑은 명물이었다고 하지만 연산군 때에 절은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남아 있으며 이 탑이 있는 곳은 탑골공원 안인데 조선 세조 때에 이 원각사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교사찰의 석탑들은 대개 2층, 5층 7층 등 홀수 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이유는 단순합니다. 고대부터 짝수보다 홀수를 좋아한 것입니다. 전통명절도 홀수가 겹치는 날 1월 1일은 새해, 3월 3일은 삼짇날, 5월 5일 단오날, 그리고 7월 7일은 칠석이 되는 식이었습니다. 초가삼간, 칠첩반상, 음양오행 등 홀수에 대한 선호는 집착을 넘어 거의 하나의 문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건국설화에서 곰이 인간이 된 것은 21일이고 이 21일이란 숫자도 3과 7의 곱이니 옛 선조들의 홀수사랑은 소름끼칠 정도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석탑들 중에 예외가 있으니 바로 경천사지 10층 석탑과 그에 영향을 받은 원각사지 10층 석탑이라고 합니다. 10이란 숫자는 10진법의 근원이자 완전함을 의미하기도 하며 또한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탑에서 그 숫자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던 세월이 지나 20세기 초, 대한제국의 일본의 위협에 시달리던 그 때, 우리나라 문화재도 그 운명을 같이 해야 했습니다. 1907년 3월 수십 명의 일본인들이 경천사 10층 석탑을 해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일본의 궁내부 대신 다나카 미스야키가 시킨 일로 그들은 이를 제지하려는 마을 사람들을 총과 칼로 위협하며 일본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마을 주민과 군수의 저항을 막기 위해 고종황제가 이 탑을 하사했다는 거짓말을 하였고 경천사 10층 석탑은 다나카의 집 정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이 사실은 영국인 베델이 발행인으로 있던 <대한매일신보>에 실려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폭압적인 언론통제에 국내에서만 시끄러워지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던 미국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구한말 조선에 입국해 한글 연구 및 확산에 기여하였고, 고종을 도와 대한제국 말기 국권수호를 적극 도운 헐버트 박사로 그는 이 사건을 철저하게 취재했습니다. 주민들의 증언과 증거를 수집하고 이 일이 일본이 저지른 만행으로 그 주동자로 일본의 궁내대신 다나카를 지목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1907년 4월 4일 일본 고베의 지역 언론 ‘재팬 크로니클(The Japan Chronicle)’에  ‘한국에서의 만행(Vandalism in Korea)’이란 이름으로 기고합니다. 헐버트의 르포와 함께 사설에서는 이 일을 약탈이라며 일본황실에 대해 비난했스니다. 또한 봉건시대에 만들어진 문화재가 잘 보존된 것은 일본황제의 덕분이라던 일본이 문화재를 약탈한다는 건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며 일본의 황제가 그것을 받는다면 기뻐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리한 지적을 한 것입니다. 당시 일본은 식민지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던 입장에서 주변국들의 눈치와 국제여론을 의식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 약탈소식을 세계 곳곳에 전해졌는데 뉴질랜드의 지역신문에 실릴 정도였습니다. 이에 일본은 더 이상 망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 1918년 경천사 10층 석탑을 돌려주게 되었습니다.

1960년 복원되었으나 보존상의 문제로 인해 1995년 다시 해체되었다. 그리고 10년간늬 보존과정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이전개관에 맞추어 현재의 위치에 이전복원된 것이다.

일본이 약탈해간 문화재를 되돌려 받았지만 복원은 고스란히 우리의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복원기술은 뒤떨어졌기 때문에 훼손이 심한 이 탑에 별다른 조치도 못하고 경복궁 회랑에 방치되었습니다. 그리고 40여 년이 흐른 1959년에 보수하기 시작했습니다. 1년 동안 작업했지만 훼손된 부위를 시멘트로 메우는 정도였고 그 상태로 경복궁 내에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야외에 있던 이 탑은 또다른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재질이 대리석이었던 탓에 풍화작용과 산성비 등에 취약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국립문화재연구소는 1995녀에 해체와 보수를 결정합니다. 1960년 복원하면서 채워 넣은 시멘트를 제거하고 오염물을 없앤 뒤, 강원도에서 대리석을 공수해와 보수를 했습니다. 2005년 탑은 조립에 들어갔고 완성된 탑은 국립중앙박물관 실내에 전시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훼손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경천사 10층 석탑에 대한 이야기와 여기에 얽힌 슬픈 역사도 알아보았습니다. 혹시 경천사지 10층 석탑이 원나라 장인이 만들었다고 해서 문화적 가치를 깎는 사람은 없겠지요.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가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준 것입니다. 그렇다고 프랑스인이 만들었다고 해서 미국인들에게 자유의 여신상이 갖는 의미가 깎이는 건 아니듯이 경천사 10층 석탑이 갖는 의미는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특별할 것입니다. 어쩌면 슬픈 역사가 배여 있기에 우리는 이 석탑을 보면서 더더욱 문화재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개성에 있던 이 석탑을 일본인들이 반출하려고 할 때 개성의 백성들이 막아섰습니다. 우리나라에게도 소중한 문화재이지만 개성 주민에게도 경천사 10층 석탑은 중요한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경천사지 10층 석탑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남과 북이 하나가 되어 국립중앙 박물관에 있던 경천사지 10층 석탑이 개성 안에 있는 박물관 실내로 옮겨져 제자리를 찾는다면 경천사지 10층 석탑의 이야기의 진정한 완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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