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로 귀화한 이용상과 귀화인들

2022. 9. 29. 20:26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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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왕조의 초대황제

1010년 베트남에서는 리왕조가 건설되었습니다. 이공온이 세운 이 왕조는 현재의 하노이를 수도로 정한 나라였습니다. 베트남 국민들은 스스로 황제라 칭한 이공온을 베트남의 정체성을 확립한 군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2대 태종 대에는 국호를 대월이라 불렀으며 성종·인종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후  리왕조는 송나라의 침략을 물리치고 베트남 역사에서 유일하게 중국침공을 시도한 왕조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왕조 시기의 리트엉끼엣은 송나라의 전쟁을 통하여 유명한 노래를 만들었으니 이 노래는 오늘날 베트남인들에게 독립선언문처럼 여겨진다고 합니다. 
그러던 1175년 즉위한 고종은 리왕조의 이전부터 보인 쇠퇴를 부추겼습니다. 백성들에게 많은 세금을 부과하고 부역을 강요하는 등 백성들을 괴롭게 한 것입니다. 이에 반란과 천재지변이 잇따라 일어났고 1210년에는 고종의 뒤를 이어 혜종이 왕위에 올랐지만 당시 17세의 어린 왕이었습니다. 어린 혜종은 외척인 진수도에게 정사를 위임하였으며 1224년에는 진수도는 왕위를 찬탈한 목적으로 혜종을 협박하여 그의 둘째 딸에게 왕위를 물려받게 하니 그는 바로 베트남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인 이 소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진수도는 그 공주를 자신의 조카인 진경과 혼인시켰고 남편에게 왕위를 넘겨주는 방식으로 새로운 왕조를 열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왕조가 열렸고 그리하여 리왕조의 왕손들은 더욱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의 생각은 맞았습니다. 진수도가 리왕조의 왕손들을 처단할 목적으로 혜종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할 것이라고 말하며 왕족들과 고관들을 궁궐로 불러들였습니다. 이에 초대를 받은 이는 이용상도 있었으나 그는 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불참한 뒤, 그는 부하 몇 명과 함께 해안가로 나갔고 그 길로 배를 타고 먼 항해길을 떠났습니다. 때는 1226년 베트남의 리왕조의 왕족 이용상의 도착지가 어딘지 모르는 망명길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몇날 며칠을 고생하여 도착한 곳에서 그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합니다. 한 해안가에 다다랐는데 해적들이 여자들과 아이들을 강제로 배를 태우는 것이었습니다. 이용상과 일행은 이 해적일당을 소탕하였고 붙잡힌 백성들을 데리고 마을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곳 관리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알렸습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바로 고려의 황해도 옹진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이왕조에서 빠져나온 이용상의 이야기는 고려의 임금에게도 전해졌습니다. 고려 임금은 그들을 안타깝게 여겨 옹진에 집과 논밭을 내려주고 살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던 1253년 몽골군에 고려에 쳐들어왔습니다. 이용상은 이 때가 고려에 은혜를 갚을 기회라고 생각하고 토성을 쌓고 백성들과 함께 다섯 달을 버티며 몽골군에게 저항했습니다. 그러던 몽골군이 화친의 선물이라며 황금 상자를 보내왔습니다. 하지만 이용상은 이를 쉽게 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궤짝 안에 구멍을 뚫어 무엇가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고려군은 이 궤짝에 뜨거운 물을 부었습니다. 그리고 그 궤짝 안에 있던 자객은 말 그대로 숨어있다가 꼼짝없이 끝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고려군은 이를 원래대로 몽골군에게 보내주었습니다. 몽골군이 쓴 트로이목마 잔적은 통하지 않았고 몽골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퇴주로에도 고려군이 숨어 있어 그들을 다시 공격하여 큰 전공을 세웠습니다. 이에 고려임금은 이용상에게 높은 관직을 주고 많은 땅을 하사하였습니다. 그리고 더불어 그에게 성씨를 내리니 이용상은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된 것입니다. 이에 선왕에 대해 제사를 지낼 수 있게 제수와 함께 수항문을 하사햇으며 수항문기적비에서는 이용상의 망명과 귀화사실을 알리고 있습니다. 이용상이 베트남을 떠날 때즈음 왕조가 바뀌던 시기였기 때문에 리왕조의 왕족에 대한 박해가 심했고 그로 인해 현재 베트남에서는 이씨성을 가진 사람이 드물다고 합니다. 
하노이 근처에는 리 왕조의 사당이 있습니다. 1019년에 리왕조의 영원한 번영을 기원하며 지은 것입니다. 이 곳은 화산이씨의 기원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화산 이씨 일가가 베트남을 찾았습니다. 당시 그들은 뜻밖의 환대를 받았습니다. 이유인 즉슨, 고려의 화산 이씨일가는 베트남 리왕조의 유일한 혈육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베트남에는  베트남국민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리왕조 8대 사당이 있다고 합니다. 1952년에 이 사당이 훼손되었을 때 제사를 지내는 기구들을 찾아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화산 이씨 일가가 1995년에 방문해 이곳에 제사를 진래 적에 땅에 묻혀있던 우물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와 함께 베트남국민들에게는 선조들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숲에 나무가 떨어지고 강물이 다 마르는 그 날, 리씨가 돌아온다는 전설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화산 이씨의 유적으로 봉화군의 충효당이 있습니다. 이 곳은 조선 선조 때 인물 이장발의 충효를 기리고자 세워진 곳입니다. 이장발의 유허비에는 그의 시조 이용상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이 곳은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이용상과 관련된 유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당대 왕조의 변하는 시기에 후대 쩐왕조가 이들의 흔적을 지우려고 노력했건만 결국 리왕조의 이용상이 고려로 귀화해 들어와 살았고 쩐왕조는 이는 막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들어와 화산 이씨가문은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벼슬을 하면서도 자신의 뿌리가 베트남에 있음을 잊지 않고 오늘날에 오르고 있습니다. 우린 이미 아주 오래전 우리 선조들은 다양한 외국 사람들을 받아들이며 다문화시대를 이미 겪으면서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사례 중 하나가 바로 안남국에서 고려로 망명하여 귀화한 이용상의 이야기인입니다. 

이지란은 본래 여 진 사람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역사에 남은 귀화인들은 상당히 많습니다. 후주의 사신으로 고려에 왔다가 병이 나 고려에 눌러앉게 된 쌍기도 대표적인 귀화인입니다. 특히 그의 건의로 과거제가 실시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특히 고려초기에는 100년 동안 중국인들과 유민, 포로 신분으로 발해인과 여진인, 거란인이 대거 귀화하였고 그 수가 약 17만 여명이 달했습니다. 그리고 원제국 간섭기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고려에 왔다가 귀화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이들은 고려사회에 어울려 살며 고려의 개방성과 다채로운 문화형성에 일조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외교사절로 기용되었고 외국어 교육이나 외교문서 작성에도 활약하였습니다. 고종 때 귀화한 동여진인 주한은 여진문자를 가르쳤으며 고려로 끌려온 거란 포로들 중에는 의관제작자와 토목기술자들이 상당수 포함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말총으로 의관을 만들어 그 기술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황산대첩에서 이성계와 함께 활약한 이지란이란 장수가 있었습니다. 1380년 우왕 시기에 이성계는 여진족의 귀화병과 고려군을 이끌고 황산에서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성계는 천하의 명궁으로 이성계와 이지란은 함께 작전을 짰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활을 쏘아 투구를 쏘아 아지발도가 입을 벌리면 다른 한 사람을 입을 맞추자는 것입니다. 이에 이성계가 먼저 활을 쏘아 아지발도의 투구를 맞추었고 이에 당황한 아지발도가 벗겨지려는 투구의 끈을 잡으려고 입을 벌리려는 순간 이지란이 쏜 화살이 아지발도의 입을 명중시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고 이 피가 벌겋게 물든 바위를 이후 사람들이 피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후 이지란은 조선으로 귀화(歸化)해 개국공신 1등에 올라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졌습니다.
“한국인은 중국인과 체격이나 용모가 서로 똑 닮았으며, 만일 중국인을 닮지 않았다면 다른 이웃인 일본인을 닮았다는 것이 대부분 사람의 지배적인 생각이었다. 그런데 사실상 그들은 어느 쪽도 닮지 않았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새비지 랜도어 
1890년 일본과 중국 등을 여행하고 조선에 도착한 영국인 탐험가이자 화가인 새비지 랜도어는 여러 한국인의 인물화를 남겼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옛 우리 땅에 살던 조상들에 대해 다민족혼혈국가로 보았습니다. 아마 예부터 우리나라에 많은 이방인들이 들어와 살았고 탐험가 새비지 랜도어는 우리 선조들의 얼굴을 보고 알아낸 건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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