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 간섭기의 고려왕들

2022. 9. 30. 20:27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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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공주를 왕비로 맞이한 충렬왕

1259년, 고려에서 화친론이 대두될 즈음 이를 해결하기 위해 후에 고려원종이 되는 태자 왕전이 대칸의 신하로 입조하기 중국으로 갔습니다. 그 때 4대 몽케 칸이 죽는 바람에 잠시 고민에 빠진 태자는 대권주자인 쿠빌라이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후 쿠빌라이가 대칸이 되니 그가 세조였고 국호도 원나라로 바꿉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조의 정권에 힘을 보태준 것이 바로 고려의 왕자 왕전의 입조였습니다. 아무래도 막내아들이 대를 잇는 몽골의 풍습상 쿠빌라이는 아리크부카에 비해 그 정통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동아시아에서 자신들에게 저항하던 남송과 고려 중에 고려가 자신의 신하로 자처하여 들어왔으니 힘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려는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어 과거 친히 정벌에 나섰던 당 태종조차도 굴복시키지 못했다. 지금 그 나라의 태자가 스스로 찾아와서 나에게 복종하니 이는 하늘의 뜻이로다.” ([고려사] 세가 ‘원종 원년’)
이러한 원종은 고려 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칼날을 뽑아드니 강화도에 남아 있던 무신정권을 무너뜨리는 데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원종이 원나라에 입조하면서 요구한 것이 바로 몽골공주와의 혼인이었습니다. 고려 원종은 태자를 원나라의 공주와 결혼시켜 원나라 황실이라는 어마어마한 뒷배경을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칸은 고려원종의 청을 받아들였다가 그 청을 이루니 고려의 39세 태자 왕심과 16세 공주 쿠두루칼리미쉬가 1274년에 결혼을 올린 것입니다. 이로써 고려는 원의 부마국이 되고 이 때부터 고려의 왕의 이름앞에는 몽골에 충성한다는 의미에서 ‘충’자가 붙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원종이 죽자 왕심이 왕위에 올라 충렬왕이 되고 그의 몽골인 부인은 제국대장공주가 되었습니다. 충렬왕은 제국대장공주를 소중히 여겼으나 나이가 한참이나 어린 제국대장공주는 철이 없었습니다. 1276년에는 흥왕사의 금탑을 대궐 안에 들여놨는데 이는 이 황금탑을 녹여서 쓰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충렬왕이 병에 걸려 시름하자 한 신하가 금탑을 돌려주어야 병이 낫는다는 말하여 돌려주습니다. 이후 병이 어느 정도 나아지자 충렬왕은 천효사란 절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는데 이 때 공주는 자신의 수행원이 적다며 화가 나 충렬왕을 때리자 충렬왕은 이에 화를 같이 화를 내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마음이 누그러진 제국대장공주는 충렬왕이 자신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들어갔다고 자신의 남편을 때리며 욕했습니다.
항간에는 이러한 제국대장공주에 대해서 고려와 원나라 사이에 평화의 가교역할을 하였다는 의견도 존재합니다. 『고려사』에는 여러 신하가 공주가 고려에 온 것을 두고 "100년간 칼과 화살을 맞부딪히던 끝에 다시 태평한 시기를 볼 줄을 생각지도 못했다."라고 평했습니다. 그리고 공주는 충렬왕과 동행하여 총 5차례 몽골에 다녀왔으며 5번째 방문 뒤에는 서북지역의 여러 성을 돌려받으면서 원나라가 서경에 설치한 통치기관 동녕부를 폐지하였다고 합니다. 6번째 방문 때는 쿠빌라이가 죽어 성종 테무르의 즉위식이 있었는데 이 때 충렬왕은 서열 7위에 해당하는 자리에 앉았습니다. 하지만 충렬왕이 사냥에 빠져 백성들의 곡식을 태워먹자 충렬왕에게 백성들이 힘들어하는 때에 사냥에 빠지는 게 말이 되느냐며 반문했고 충렬왕이 음악을 좋아해 틈만 나면 연주회를 열자 악기연주로 나라를 다스렸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며 연주회를 중단시켰다고 합니다. 충렬왕은 이러한 제국대장공주를 이용하여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가 한편 이를 통해 원나라 관리, 다루가치들의 간섭을 견제하려 하였습니다. 특히 제국대장공주는 황태자비인 활활진을 찾아가 선물을 전하는 등 우애를 다지는 등 교류를 하였습니다. 고려의 왕비이기도 했던 공주가 자신의 아들이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힘쓴 흔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다분히 개인적이고 권위적인 행동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제국대장공주의 행보가 고려와 원나라간의 친선을 도모하는 데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시선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원나라공주출신이었기 때문에 그의 권위적인 행동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제국대장공주가 17세의 나이에 훗날 충선왕이 되는 이지리부카를 낳자 제국대장공주 이전에 충렬왕과 결혼을 올렸던 1비, 정화궁주가 축하연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잔치에서 공주는 정화궁주와 같은 반열의 자리에 올려놓았다고 화를 내는 바람에 정화궁주가 무릎을 꿇고 사죄해야 했으며 이후 어떤 이가 다루가치가 있던 관아에 익명의 글을 던지니 그 글에는 “정화궁주가 왕의 총애를 잃자 무녀를 시켜 원성공주를 저주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공주는 형벌은 면했으나 별궁에 유폐되어 제국대장공주가 죽을 때까지 왕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반면 제국대장 공주는 1297년, 수령궁에 작약꽃이 활짝 피자 이를 만지작거리며 흐느껴 울었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후 병이 들어 세상을 뜨니 당시 나이가 39세였습니다. 제국대장의 죽음으로 충렬왕은 원황제의 사위자리를 잃게 되어 왕의 자리에 물러나니 그의 아들 이지리부카가 왕위에 올라 충선왕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충선왕은 세자로 있던 1292년에 조인규의 딸과 결혼한 후 1296년에는 성종의 조카딸이자 진왕 감마랄의 딸인 계국대장공주와 혼인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때 계국대장공주는 왜 조비만 이뻐하냐고 따졌고 충선왕은 아니라며 계국대장공주를 달래주었지만 실상은 충선왕은 계국대장공주에게 눈길을 주지 않으며 조비에게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개혁정치에 대한 반발과 맞물려 이후 조인규의 처가 무당을 불러 공주를 저주하는 굿을 했다는 글이 나붙으며 계국대장공주의 분노를 샀습니다. 분명 충선왕의 개혁정책에 반대하는 세력의 음모였지만 벽보사건은 원나라황실에도 알려져 조인규와 그의 처, 그리고 조비는 원나라로 압송되었고 이후 충선왕은 퇴위당했습니다. 원나라로 호송된 충선왕은 무시하는 신하들을 뒤로 하고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원충을 사랑하는데 이른바 남색을 즐긴 것입니다. 이후 충렬왕이 죽자 다시 왕위에 복귀하였으나 고려로 돌아오지 못하고 신하들에게 교지를 내려 정치를 행합니다. 
1313년에는 충숙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에게도 역시 복국장공주라는 원나라부인이 있었으나 그는 고려 여인 덕비에게 사랑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복국장공주는 후궁에게 깊은 마음을 두지 말라 했지만 충숙왕은 이에 아랑곳 않고 덕비와의 사랑을 즐겼으며 묘련사라는 절에서 덕비와 데이트를 즐기다 복국장공주와 마주치자 즐거운 기분을 망쳤다는 기분에 충숙왕은 공주의 얼굴을 주먹으로 쳐 코피를 냈습니다. 공주는 화병으로 자리에 누웠고 그럼에도 충숙왕은 이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이후 삶의 의욕을 잃은 공주가 죽자 이소식이 원나라 정부까지 들어갔습니다. 원나라에서는 조사원을 보내 조사를 하게 했으나 고려측에서 뇌물을 주어 사건을 무마시켰습니다. 하지만 충숙왕은 이 사건의 여파로 그의 아들 충혜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야 했습니다. 

충혜왕

이후 28대 왕으로등극한 것은 충혜왕이었습니다. 그는 여색을 너무나 밝혀 신분, 나이에 상관없이 여자를 취했으며 그 중에는 부왕의 후비인 수비 권씨와 숙공휘녕공주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단양대군 계집종 임씨에게 푹 빠졌는데요. 이후 충혜왕이 평리 홍탁의 딸을 아름답다는 말을 듣자 화비로 봉했습니다. 이에 화가 난 임씨는 화비를 들이시면 나가겠다고 말하니 충혜왕은 임씨를 달래주기 위해 은천옹주라는 칭호를 주고 시종 2명을 붙였습니다. 이후 충혜왕의 아들을 낳은 은처옹주는 사치를 부리며 왕에게 간교를 부렸고 왕도 비위를 맞추기 위해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아 선물을 주는 등 횡포를 부렸습니다. 이에 충혜왕의 문란함을 비판하는 편지가 원나라 조정으로 전해졌고 그 중에는 숙공휘녕공주의 비밀편지도 있었습니다. 이에 충혜왕은 왕위에서 쫓겨났고 귀양 가는 길에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고려에 들리자 고려백성들은 오히려 기뻐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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