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돈은 요승인가, 개혁가인가.

2022. 10. 2. 20:32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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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편조, 자는 요공인 신돈은 출생연도가 불분명한 영산의 사람으로 그의 어머니는 계성현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에 위치한 옥천사라는 절의 여종이었습니다. 따라서 신돈의 출신은 미천하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래서인지 승려들 사이에서도 끼지 못하는 신세였으며 산속 깊은 암자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공민왕은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는데 누가 칼로 자기를 찌르는 것을 어떤 승려가 곁에 있다가 구해주는 꿈이었습니다. 다음날 태후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이후 김원명이 신돈을 데리고 공민왕에게 보였는데 그 모습에 꿈에서 본 모습과 닮아있었습니다. 왕은 이를 이상하게 여겨 그와 이야기해 보았는데 무척 총명하고 지혜롭다고 느꼈습니다.
신돈은 글을 읽지 못했지만 개경을 돌아다니며 불교를 권하고는 허황된 마로 과부를 꾀어 간음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공민왕을 만난 이후로는 낡은 헝겊을 모아 기워 만든 승려의 옷차림을 하고 다녔는데 이러한 행색은 왕으로 하여금 더욱 그를 신뢰하게 하였습니다. 왕은 신돈에게 주는 음식을 정갈하게 하고 주었으며 버선도 머리 위까지 받들어 그에게 주니 이를 지켜본 이승경은 나라를 어지럽힐 놈은 이자일 것이다. 라고 말했으며 이 말에 정세운도 동조하며 요승이라 하였습니다. 이에 정세운은 신돈을 죽이려 했으므로 공민왕은 미리 알아채고 신돈을 피신시켰습니다. 
이승경과 정세운이 죽은 이후 신돈은 머리를 기르고 의식주에 대한 미련을 버린 채 심신을 수련하는 자의 모습으로 왕을 찾아왔습니다. 이 때부터 신돈의 정권장악이 시작되었습니다. 신돈을 만나기 전에 공민왕은 당시 재상들에게 만족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권문세족이거나 그들과 얽혀있는 자들로 서로 비리를 감추고 신진관리들도 명망을 얻으면 자기의 가문을 부끄럽게 여기며 문벌귀족과 혼인한 것입니다. 게다가 유생들도 과단성이 적고 기백이 없다고 생각되니 공민왕에게는 마음에 드는 부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신돈은 그가 도를 깨우치고 욕심이 없었으며 미천한 신분으로 친척이 없으니 사사로운 의리나 인정에 이끌려 공정성을 그르치는 없을 것이라 판단하였습니다. 이에 공민왕은 그에게 남의 말을 듣고 신돈에게 의혹을 품는 일을 없을 것임을 약속하며 신돈과 정사를 의논하기 시작했습니다. 
 공민왕은 신돈에게 청한거사라는 호를 지어주었고 사부라 부르며 그에게 국정을 자문하였습니다. 그의 권세가 점차 올라가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아부하였으며 사대부의 처들도 그에게 복을 구하려 선교를 듣곤 했는데 이를 통하여 신돈은 이들과 간통하였습니다. 신돈은 김란이란 사람의 집에 기거하면서 처녀를 겁탈하고 이를 보고 최영이 김란을 책망하자 신돈은 최영을 참소하여 계림윤으로 강직시키는가 한편 자기의 뜻에 반대하는 자들을 파면하고 자기자신과 친한 사람들을 그 후임 자리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는 이러한 권세로 자신을 비방하는 사람들을 내모니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신돈은 과부와 정을 통하며 뇌물을 받기를 밥먹듯하였으나 왕 앞에서는 채소, 과실, 차만 들며 청담을 나누니 이에 정 3품직인 밀직제학에 있던 이달충이 지적하자 신돈이 이를 불편하게 여겨 그를 파면시켰습니다. 당시 신돈의 권위는 공민왕을 능가했으며 신돈은 공민왕과 같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공민왕은 그를 공손히 받들었다고 하며 신돈의 복장이 왕과도 같았다고 전합니다. 

이후 신돈은 왕에게 건의하여 전민변정도감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이 기관을 통해 탐학한 관리들이 부당하게 강탈한 토지와 사람에 대해 원래대로 되돌릴 것을 명하며 서울에서는 15일 이내로 지방에서는 40일 이내로 시정하면 과거를 묻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한이 경과한 후에 일이 발각되면 처벌할 것이라고 하니 세도 있는 집들이 강제로 보유한 토지와 백성들을 원래대로 돌려놓았고 이에 많은 백성들이 기뻐했습니다. 한편 신돈은 이 과정에서 자신에게 소송하는 여자들 중 얼굴이 아름다운 여자와 관계를 맺었으며 그 송사는 반드시 이기게 하니 선비들을 이를 벼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신돈을 음흉하다고 생각하며 신돈을 제거할 계략도 꾸며졌습니다. 하지만 일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밀고가 있었고 이로 인해 오히려 신돈을 제거하려던 사람들이 발각되어 귀양 가게 되었습니다. 이후 신돈에게 죽은 사람들의 식구들은 신돈이 두려워 고소도 하지  못했다으며 신돈은 귀양 보낸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고자 하고 간청하였으나 사람들을 많이 죽이는 것은 이로울 것이 없다는 같은 도당인 홍영통의 말에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한편 신돈은 5도 도사심관이 되고 싶어 관제의 회복을 주청하니 왕이 거부하였으며 충주로 국도를 옮길 것을 청하니 이를 거부했습니다. 이에 신돈은 공민왕이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자 이에 두려움을 느끼고 반역을 꾀하게 됩니다. 이 음모는 누설되어 신돈은 변명으로 일관하게 됩니다. 이후 신돈은 다시 반역을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을 당했습니다. 
이렇게 역사서에 전하는 신돈은 여색을 밝히는 승려로 국정을 농단하고 고려 왕실을 어지럽힌 자로 인식되었습니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 신돈의 평가는 개혁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는 총명하고 자애스러웠으며 매사를 명백하게 논증하고 스스로 도통했다.’ 『고려사』
이상하게 같은 역사서에서도 요승과 그에 대치되는 명민한 승려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럼 신돈에 대한 진실한 모습은 무엇일까. 이후에 들어서는 조선의 입장에서는 고려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조선이 세워져야만 하는 당위성을 이야기해야 했습니다. 

그럼 당시 공민왕 대에 홍건적이 침입해 왔는데 이는 공민왕의 개혁에 제동을 걸었고 왜구의 침입은 농민들의 농사를 방해했습니다. 고려의 경제에 타격을 가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침입은 공민왕은 개혁이 어려워졌습니다. 노국대장공주마저 사망하자 신돈이 나타났는데 당시 신돈은 불교계의 주류세력은 아니었습니다. 개혁의 대상은 권문세족이 되어야 했는데 기존의 불교셰력이 권문세족과 연결되었으므로 비주류세력이 필요했고 화엄종 세력인 신돈이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신돈은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은 사람이고 자유로운 개혁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라 공민왕이 그를 믿고 의지하였습니다. 신돈은 집권한 것은 1365년, 신돈은 동시에 개각을 단행하니 『고려사』에서는 신돈이 최영장군을 질투해서 쫓아내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당시 신돈은 무장세력의 해체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최영을 포함한 많은 무장세력이 곧 권문세족이었고 이들을 청산하여 병권을 장악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토지를 되돌려 주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를 양인으로 되돌리니 해방된 백성들은 그를 성인으로 불렀습니다. 이러한 그의 정책은 세금을 낼 수 있는 백성들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신진세력을 양성하기 위해 성균관을 중수했습니다. 바로 관료들을 양성하기 위한 것인데요. 당시는 자신을 과거에 합격시켜준 인물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니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연고주의를 해체시키고 신진세력이 대거 정치계에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공민왕은 신돈을 개혁의 가속페달로 삼은 것입니다. 신돈은 그의 개혁은 워낙에 빨랐습니다. 하지만 명나라가 새로운 패권국가로 되면서 친서를 보내 고려왕이 불도를 닦는 데만 열중한다며 비판하며 내정간섭을 시사하였습니다. 바로 공민왕의 왕권의 위협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신돈의 개혁에 불만을 품은 기득권층이 신돈제거에 나섰고 신돈을 지지하는 백성들은 신돈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고려사회를 지배했던 불교에 대한 비판도 수반되었습니다. 불교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고려의 사찰이 대토지를 소유하고 노비를 다수 보유하고 있던 점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고 자연스레 척불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지지 세력이 거의 없었던 신돈은 처형을 피할 수 없었고 개혁의 실패로 인해 그는 역사서에 요승의 이미지로 남게 되어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전해졌으나 요근래에는 다시 개혁가로 재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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