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점과 목화이야기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2022. 10. 3. 20:34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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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 이미 배우는 단어 중에 의식주란 것이 있습니다. 그만큼 입고 먹고 사는 집이 있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그 중에서도 의가 가장 앞에 있습니다. 셋 다 중요하지만 옷을 입어야 어디에 밥을 빌어먹을 수 있고 집도 지을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옷도 안 입고 생산 활동에 종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 조상들은 부유층들은 비단을, 서민들은 삼베를 입었습니다. 지금은 여름에 입는 모시나 삼베를 옛날에는 겨울에도 입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우리 땅에 살던 조상들도 겨울에 비교적 따뜻하게 입고 지낼 계기가 생겼는데요. 바로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문익점은 1331년에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에서 태어나 1360년에 과거에 합격했습니다. 그리고 서장관 자격으로 원나라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 그는 고려 왕족 덕흥군 쿠데타에 연루되어 파직당합니다. 당시 고려의 왕은 공민왕이었는데 공민왕은 친원파 기철 일당을 숙청하게 됩니다. 이에 원나라의 제2황후로 권세를 누리던 고려사람 기 황후는 자신의 동생이 죽음을 당한 것을 분함을 느끼고 황제의 힘을 빌어 친원파인 덕흥군을 고려의 왕으로 임명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고려조정에서는 이를 바로잡고자 사신을 파견했는데 이 사신단에 문익점이 포함되었습니다. 기황후의 권세가 워낙 강해 이에 따르는 무리가 많았습니다. 문익점은 이에 따르지 않다가 덕흥군의 저택에 42일이나 구속되었습니다. 원나라 황제는 문익점을 불러 왜 자신의 명을 따르지 않느냐고 묻자 이에 문익점은 옛 사람의 말을 빌어 두 군주를 섬기지 않는다고 하고는 차라리 죽여달라고 원나라 황제였던 순제에게 고합니다. 원나라 황제는 더욱 노하여 그를 사형에 처하려 했지만 원나라 조정대신들은 그의 충직함을 아까워 황제에 간언하여 사형만은 면하게 되었습니다. 대신 그는 1363년 11월 교지 지금의 베트남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1366년 그는 황제의 용서를 받아 연경으로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얀 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따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따게끔 하였으나 한 노파가 다가와 나라에서 금지하는 꽃을 누가 감히 따냐며 다그쳤습니다. 관에서 알면 엄벌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노파는 문익점을 어떻게 보았을까. 관에 수색을 당하지 않도록 주의를 주며 꽃을 돌려주었고 그는 연경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문익점은 황제에게 고려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황제는 오히려 벼슬을 내리고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부모가 연로하다는 문익점의 말에 황제는 귀국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5년만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교지에서 붓 속에 숨겨서 가져온 목화를 재배하였습니다. 하지만 목화 재배를 몰라 겨우 한 그루만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3년 만에 살린 이 한 그루가 전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불과 재배에 성공한 지 10년만의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서민들의 사랑을 받은 것이 무명이었고 누구나 쉽게 재배할 수 있고 제조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시 혼수용품은 비단이었는데 무명이 혼수용품이 되어 서민들의 가계 부담도 크게 줄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익점의 손자인 문래는 목화에서 실을 뽑는 수레를 만들어 문래라 하였고 문영은 베 짜는 방법을 만들어 문영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각각 물레와 무명이 된 것입니다. 즉, 한 가문에 의해 우리나라 복식 역사에 커다란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한편 위에서 문익점이 덕흥군의 반대편에 서서 충정을 지킨 신하로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고려사』에서는 위에서 설명한 것과는 다른 문익점의 정치적 입장에 서술되어 있습니다.  
‘문익점은 진주 강성현 사람인데 공민왕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번 올라 가 정언(正言)이 되었다.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덕흥군에게 붙어 있었던 바 덕흥군이 패배하니 본국으로 돌아오면서 목화씨를 얻어 가지고 와서 자기의 외삼촌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부탁하여 그것을 심었다. 처음에는 재배하는 방법을 몰라서 거의 다 말라 버리고 한 그루만 남았었는데 세 해만에 마침내 크게 불었다. 목화씨를 뽑는 물레와 실을 켜는 물레들은 다 정천익이 처음 만들었다’ -고려사-
  <고려사>에서는 문익점이 덕흥군에 붙은 인물로 기록되어 있지만 문익점의 시문과 실기를 모은 책인 <삼우당실기>에는 공민왕을 끝까지 섬기면서 덕흥군의 회유를 물리친 인물로 기록되었습니다. 아마도 당시 문익점은 원나라의 힘이 고려조정에 미치는 것을 생각하면서 공민왕의 편에 서야 할지 덕흥군의 편에 서야할지 고민이 많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때에 따라 공민왕 편에 섰다가 덕흥군을 옹호했다가 했을 수도 있습니다. 문익점이 귀국한 후 처벌받지 않고 공민왕으로부터 벼슬을 제수받았다는 점과 여말선초의 여러 군주들로부터 충신으로 대우받았다는 것은 그가 친공민왕적인 행보를 보인 것 아니냐는 해석이 따릅니다. 반면 남평 문씨 후손들이 문익점을 <삼우당실기>에서 사실과 다르게 공민왕 쪽 사람으로 묘사해 사실을 왜곡했을 수도 있습니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온 공로가 크기 때문에 그에게 정치적 행보에 과가 있더라도 그것을 덮고 그의 공적을 더욱 높이기 위해 후대에 이야기가 덕흥군 사람이 아닌 공민왕 사람으로 기록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붓속에 숨겨왔다는 사실은 사료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고려사>에서는 ‘문익점이 목화씨를 얻어 가지고 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문익점이 길가의 목면(木)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우리가 알고 있는 산업스파이같은 장면은 볼 수 없었습니다. 다만 문익점이 백성들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그냥 지나쳐도 목화씨를 따서 가져온 것은 사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흥미로운 것은 목화를 문익점이 처음 들여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백제에도 이미 솜이 존재하였으니 2007년 국립부여박물관이 부여 능산리 절터 유물을 정리하다가 백제의 면직물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기록으로도 있는데 1595년 미수 허목이 지은 기언 제 33권 원집 외편 동사 신라세가 상편에는 유례이사금이 솜 장수였던 인관과 서조에게 벼슬을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신라왕이 고구려 왕 안승에게 면(목화)를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200년대 몽골이 고려에 면을 바치라고 요구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만 백제의 목화는 중앙아시아의 건조한 지역에서 들여온 종자라 그 수가 얼마 되지 않았고 일반백성들에게 보급되지는 못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즉, 문익점이 처음 목화씨를 가져온 것은 아니지만 문익점이 가져온 목화씨가 일반 백성들에게 널리 퍼진 것은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비단이나 짐승털, 아니면 중앙아시아에서 온 토종목화에서 나온 솜으로 옷을 지어 입었지만 일반 백성들은 삼베나 모시로 옷을 지어입어 추위를 견뎌냈습니다. 따라서 보온성이 떨어지는 옷들로 인해 얼어 죽는 백성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문익점이 들여온 목화씨가 전국적으로 재배되고 그로써 일반백성들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게 되었기 때문에 문익점의 일반 백성들에게 은인으로 기억될 수 있었고 그에 대한 일화도 부풀려진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지만 정작 살아있을 때는 문익점의 공로는 크게 인정받지 못하고 그가 죽은 이후에 빛을 발했습니다. 문익점과 관련된 이야기가 어디까지 진실이고 허구인지 정할 수는 없겠지만 백성을 생각해서 목화씨를 고려로 가지고 들어온 것만은 변하지 않을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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