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약을 만들어 고려를 지킨 최무선

2022. 10. 5. 20:37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728x90

화약은 중국의 4대 발명품 중 하나로 송나라 시기 때 발명되었습니다. ‘초석, 유황, 목찬’을 혼합해 만든 흑색화약은 이미 당나라 때 사용되고 있었는데 송나라 때 화약을 이용한 다양한 무기가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은 진종 때 998년에서 1022년 사이의 일이었습니다. 12세기 이후에는 모든 분야에서 사용되었고 이슬람을 거쳐 유럽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당시 유럽은 중세봉건시대 후기였습니다. 기사들이 중장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화약의 전래로 대포와 총이 개발되었고 이것은 기사계급의 몰락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럼 우리나라에는 언제 전해졌을까요. 당시 고려시대 후기 왜구에 의해 골머리를 앓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몽골의 침략을 겪은 일본은 중앙정부의 힘이 약해지고 지방영주의 힘이 강해졌습니다. 이 가운데 일부 세력이 우리나라를 대상으로 노략질을 시작하였으며 그 범위를 넓혀나갔으니 그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왜구들은 무신집권기에 등장하였지만 본격적으로는 1350년부터  들어왔습니다. 처음에는 경상, 전라, 충청도 같은 남부지역에 들어왔다가 이후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강화도에 온 왜구는 무고한 주민을 3백 여명을 학살하고 약탈하고 재빨리 바다로 도망쳤으며 급기야는 개경 근처의 예성강까지 쳐들어왔습니다. 이러한 왜구는 조세를 운반하는 조운선도 약탈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조운선의 약탈은 국가재정의 열악 그리고 국방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하였는데 공민왕 때에는 재위기간 23년 동안 115회, 우왕 때에는 재위 14년 동안 378회나 기록이 될 정도로 침입이 잦았습니다. 해안가에는 사람들이 살지 못할 정도였으며 이에 따라 우왕은 도읍지를 내륙 깊숙한 곳으로 옮길 고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최무선은 화약의 제조하는 것에 염두를 두었습니다. 하지만 화약을 제조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는 화약제조에 관한 연구와 실패를 거듭하면서 염초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알려줄 사람으로 이원이라는 중국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쉽사리 알려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도 위험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화약을 제조하는 기술은 원나라만이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지키기 위한 보안이 철저했습니다. 그리하여 고려에서 불꽃놀이를 하더라도 그것들은 원나라에서 완제품을 수입해서 사용하는 실정이었습니다. 당시 국제정세는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교체되던 시기였습니다. 고려조정에서는 왜구를 무찌르기 위해 화약을 필요함을 알고 당시 떠오르는 대륙의 주인 명나라의 주원장에게 화약을 달라고 부탁하게 됩니다. 하지만 명나라는 고려에서 초(硝) 50만 근을 수집해 모으고 유황 10만 근을 구해서 가져오면 화약을 만들어 보내주겠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도 유황은 수입에 의존했으니 고려도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주원장은 고려에 화약을 만드는 방법은 알려줄 생각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원과 명 두나라 모두 고려가 화약을 가지고 무기를 만드는 것에 대해 달갑지 않아했던 것입니다. 
“상인 한 사람이 대강 안다고 대답하므로 자기 집에 데려가 의복과 음식을 주고 수십일 동안 물었다. 대강 요령을 얻은 뒤 도당에 건의해 시험해보려고 했으나 아무도 믿지 않았다. 심지어 최무선더러 ‘속이는 자’라고 험담하기도 했다.” 『태조실록』
 하지만 최무선의 노력과 설득에 감복해서였는지 이원은 자신이 알고 있는 염초 제조방법 하나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최무선은 이것을 토대로 화약을 만드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최무선은 여기서 더 나아가 고려조정에 건의를 합니다. 그것은 화약과 화약무기를 만드는 전문 관청을 설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설치된 것이 1377년에 만들어진 화통도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도 조정에서는 최무선을 모함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게 말이 되냐며 사기꾼이라고 최무선을 비아냥하였습니다. 왜구를 물리칠 생각만으로 화약 재료를 가마솥에 넣고 굽는 위험천만한 실험도 했고 이러한 실험 중에 맏아들을 잃는 불행도 겪었습니다. 화약에 대해 지식이 전무했던 그가 목숨 걸고 하는 일이었는데 당시 이런 그를 삐딱하게 보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최무선의 집념으로 바로 화약의 국산화에 성공했고 화통도감에서 대장군포, 화전, 주화 같은 신무기를 만들어냈습니다. 대장군포(大將軍砲)는 대포, 화전(火箭)은 로켓 불화살, 주화(走火)는 폭발물을 장착한 비행체로 오늘날의 미사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제 그 시험대만 남았습니다. 
“왜적의 배 500척이 진포 어귀에 들어와 큰 밧줄로 서로 잡아매고 뭍에 올랐다. 각 주군(州郡)으로 흩어져 마음대로 불사르고 노략질하니, 시체가 산과 들에 덮이고 곡식을 운반하다가 땅에 쏟은 쌀이 한 자 부피나 되었다.”(고려사절요)

때는 1380년이었습니다. 왜구는 500여 척의 선단을 이끌고 진포를 거점으로 침략해왔습니다. 한 척의 배에 30명의 인원이 탑승한다고 생각하면 15000명이 들어온 셈이니 왜구는 거의 군대급의 규모였습니다.
고려는 최무선을 부원수로 하여 맞서 싸우게 하였습니다. 당시 왜구는 고려수군을 얕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왜구는 고려에게 이제 화약을 이용한 무기가 있다는 것을 아직 몰랐습니다. 왜선 500선에 맞서 고려는 100척의 군선이 출동하였습니다. 수적으로 열세에 놓였지만 화약무기를 이용해 왜구가 탄 배들을 불바다로 만들었습니다. 고려의 포탄이 왜적의 배를 날아들며 초토화를 시킨 것입니다. 왜구들은 바다로 뛰어들거나 산 속으로 숨어들었고 진포해전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를 수 있었습니다. 이 때 공신은 단연 화약무기였습니다. 하지만 이 때 사용된 화약무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포탄과는 달랐습니다. 내부의 화약이 함께 터지는 것이 아닌 화약의 추진력으로 쇠포탄을 엄청나게 멀리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화약과 함께 터지는 포탄은 조선시대 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이러한 포탄은 긴 사정거리를 갖고 있었고 배를 파괴하거나 구멍을 내어 침몰시키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배에 꽂히는 불화살은 왜구에게는 공포였습니다. 그럼 육지로 달아난 왜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실상 퇴로를 차단당한 왜구들은 육지로 들어가 노략질을 하였으며 고려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남원산성 공략에 실패한 왜구들은 이성계에게 섬멸당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황산대첩입니다. 진포대첩의 승리가 황산대첩으로 이어졌으며 이 전투로 이것은 이성계가 정치적으로 입지적으로 다지는 데 크게 도움을 주었으며 조선왕조 개창에 어느 정도 기여를 하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보복으로 왜구는 3년 뒤에 120척의 군선을 이끌고 침입했으나 전술과 화포의 사용으로 왜구에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것은 관음포해전으로 이후 왜구의 기세도 크게 꺾이게 되었습니다. 
 이들 왜구는 도둑질은 기본이요, 사람들은 마구 죽이고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서 이들이 쳐들어올 경로 또한 예측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배가 모든 해안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고려에서는 이들을 소탕하고자 해군을 육성하고자 하였지만 해군을 육성하는 것은 장기적인 일이고 왜구의 침탈은 지금 당장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육성된 해군이 왜구를 상대로 승리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최무선의 화약개발은 이러한 힘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획기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처음에는 인정받지 못했으나 끈질긴 요구와 설득 끝에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승리들이 고려의 멸망은 막지 못했지만 화약무기의 연구개발은 조선에서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임진왜란의 어려움 속에서도 이순신의 수군이 연전연승을 거두었던 데에는 화약을 사용한 총통들이 배에 장착되어 위력을 발휘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어긋난 시선에도 화약을 제조하는 데 모든 걸 걸었던 최무선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들이었습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