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운명을 결정지은 위화도 회군

2022. 10. 7. 20:31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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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고려말기도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 휘말려 들어갔습니다. 특히 명나라가 요동에 철령위를 설치하고 그 이북지역은 본래 원나라 영토였기 때문에 요동지역을 귀속한다는 조치는 고려로서는 반발을 살만한 조치였습니다. 고려는 이에 대해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것은 철령 이북의 지역은 본래 고려의 영토로 원나라 때 잠시 빼앗기기는 했으나 공민왕 때에 다시 수복하여 수령을 파견하여 통치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명나라는 이 사실을 부정하고 철령위 설치를 고려에 알렸습니다. 이에 대해 1388년, 고려의 우왕과 최영장군은 반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세운 계획은 바로 요동정벌이었습니다. 
당시 고려 조정은 14년 동안 왕보다 더한 권세를 누리던 이인임을 몰아내고 성리학자들이 정치계의 전면에 다시금 나오던 시기로 이들 간에도 의견은 첨예하게 엇갈렸습니다. 이성계는 요동정벌에 반대했는데 그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여름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절하고 요동정벌로 남쪽이 비면 왜구가 침범할 우려가 있으며 무덥고 비가 오는 날씨에 활에 아교가 녹아 풀어지고 대군이 전염병에 걸릴 수 있다는 사불가지론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문하찬성사 정몽주는 이성계의 의견에 동조하며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습니다. 
“중원에서 원나라를 몰아낸 명나라의 사기는 욱일승천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군사를 일으키면 백성들의 원망이 클 것이고 백성들의 원망을 받은 우리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져 패할 염려가 있으므로 명나라를 치는 것은 시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그의 의견에는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는 성리학적 세계관도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영의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요동정벌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명나라가 원나라와 전쟁을 치르고 있으니 요동에 신경 쓸 겨를이 없고 요동은 곡창지대이기 때문에 지금 공격하면 많은 군량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명나라 군대는 비가 많이 오는 여름철에 싸움을 꺼려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우왕은 자신의 장인인자 문하시중인 최영과 함께 사냥을 이유로 해주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이 해주로 떠나는 사냥행차에는 수많은 군사와 더불어 이성계의 아들 방우와 방과를 대동하여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습니다. 사실은 사냥을 가장한 군사훈련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왕은 사냥을 마치고 나서 서경으로 들어와 이성계를 불러 요동을 정벌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성계 입장에서는 왕명을 거역하면 반역이니 이를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5만 병력을 지휘할 장수로 조민수가 좌군도통사, 그리고 이성계가 우군도통사가 되어 평양에서 요동으로 출발하였으며 팔도도통사인 최영은 서경에 남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의문점이 들었습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러 가면서 5만의 병력은 선뜻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또한 요동정벌군이 공략에 어려움에 봉착할 경우 이를 지원할 군대를 왜 평양에 주둔시키지 않았을까. 또한 요동정벌군이 최고 사령관이라는 최영 장군은 왜 평양에 남아 있었을까. 이 모든 것이 바로 전쟁에서 패할 경우 이성계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구석으로 몰아넣기 위한 작전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경에 증원군을 두지 않은 것은 최영장군의 악수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최영 장군은 그 다음상황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1388년 5월,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이킨 정벌군은 왕명을 어긴 꼴이 되었기 때문에 개경으로의 진군이 불가피했습니다. 하지만 최영장군은 어떠한 증원군도 두지 않았고 이성계의 군대에 개경이 점령당하고 우왕이 강화로 추방당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성계가 최고 권력자의 위치에 올랐습니다. 그 당시 고려의 군사동원 능력은 30만 명이었습니다. 이를 요동벌군으로 동원하지 않더라도 서경을 수비할 군대를 만들었더라면 적어도 허무하게 위화도 회군이 성공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반면 고려의 위화도 회군을 알게 된 명나라는 철령위 문제에 대해서도 다음에 논의하기로 결정하였고 이 문제는 다시는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명나라의 이러한 조치는 고려의 요동정벌이 결코 허무맹랑한 계획은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당시 명나라는 도읍이 남경에 있었고 1422년에야 북경으로 천도했으니 요동정벌을 계획했을 당시 명나라가 자신들의 주력 병력들은 남쪽에 있었음을 이야기합니다. 아마 이 점을 고려는 간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설령 명나라가 군대를 동원하다고 하더라도 고려를 치기 전에 여진족부터 상대해야 합니다. 특히 금나라로부터 호되게 당한 기억이 있기 때문에 명나라는 이 부분 역시 우려했습니다. 게다가 우왕과 최영이 계획한 요동정벌은 고려 태조 시기부터 있었던 고구려의 옛 영토 수복, 즉 북진정책과 연관이 있었습니다. 물론 요동정벌이 실패할 가능성도 높았습니다. 하지만 고려 조정에서는 왕권에 대항할만큼 정치적 힘이 커진 이성계의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이러한 계획을 세웠으며 실패하면 이성계에게 책임을 물으면 될 것이고 성공하면 그 자체로 좋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계획은 우왕과 최영에게 자충수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계획이 고려의 멸망을 앞당기는 일이 된 것입니다. 요동정벌을 추진하지 않았더라면 고려는 좀 더 오래 존속되었을 것이고 조선이란 나라가 건국되는 일도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생각하면 고대로부터 우리나라에 세워진 국가들은 비교적 긴 존속기간을 나타내었습니다. 고구려, 백제도 600여 년이 넘는 시간을 버텨냈고 신라도 1000년에 가까운 시간을 이 땅에서 보냈습니다. 이전에 있었던 부여나 고조선도 만만치 않은 긴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고려만은 500년을 넘기지 못한 왕조가 되었습니다. 이후에 세워진 조선왕조도 500년의 역사를 넘긴 것을 생각하면 유독 고려의 역사가 짧게 느껴질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세계의 어떤 나라의 많은 왕조들과 비교해보더라도 고려의 470년에 이르는 역사는 결코 짧지 않습니다. 특히 고려는 수많은 외침 속에서도 나라를 지탱해왔는데 현실적인 외교와 강한 군사력으로 이를 버텨왔습니다. 그것은 고려란 나라가 한 곳에 고여있지 않고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국가라는 것을 이야기해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고려의 역사는 국제정세의 변화와 발맞추어 지배세력을 교체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으며 원명교체기라 할 수 있는 공민왕 시기에 지배층이 권문세족에서 신진사대부로 옮겨간 것도 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국제정세에 의해 영향을 받아 고려의 지배층들이 물갈이되었다고 보는 건 지나친 비약일지 모르나 결과적으로 지배층이 고여있지 않고 끊임없이 순환되고 있다는 점에 의의를 둘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군대를 되돌려 개경을 장악한 이성계와 조민수가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우왕이 추배당한 자리에는 창왕이 올랐으니 그의 등극에는 조민수의 역할이 컸습니다. 회군세력은 누구를 왕위에 올릴 것인가를 두고 대립하였고 이성계는 종친 중에 잘 골라 세우자고 하였고 조민수는 우왕의 외아들 창을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도움을 준 것은 바로 이색이었습니다. 당시 왕위 지명권은 공민왕의 제 3비인 익비 한씨에게 있었습니다. 익비 한씨는 이색의 부탁을 받고 당시 아홉 살이던 창을 왕으로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권력의 중심에 선 것은 조민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이성계와 뜻을 같이한 신진사대부들이 전제 개혁안을 들고 나왔습니다. 조민수는 이에 대해 거부했는데요. 창왕이 왕위에 올랐지만 선대왕이던 우왕이 3년 전인 1385년에 명나라에 책봉을 받았으니 우왕의 정치적 입지가 부족한데다가 당시 조정은 이성계를 비롯한 개혁파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개혁파가 내세운 것이 전세개혁이었으니 이를 거부한 조민수는 이인임의 친척으로 부패와 연루되었다는 명목으로 탄핵되었으며 홀로 남게 된 이색은 낙향하게 되니 조정은 이성계와 그 측근들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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