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를 지킨 마지막 불꽃 최영장군
2022. 10. 6. 20:29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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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장군은 고려말의 장수로 특히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라는 말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최영의 본관은 철원, 아호는 철성으로 최영은 아버지가 남긴 유언 견금어석을 가죽 띠에 써서 허리띠에 차고 다녔습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사치스러운 모습을 경계하며 살았습니다. 당시에는 고위관리들이 돌아가며 집으로 초대하여 성대한 잔치를 벌이곤 했는데 최영의 집에서 잔치를 할 때 초대받은 사람들은 어떤 음식이 나올까 궁금해 했다고 합니다. 근데 막상 가니 음식상이 한참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손님들 입장에서는 잔치상이 왜 나오지 않느냐고 불평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게 해가 저물 즈음에 상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상은 밥과 나무물침이 전부였습니다. 모두 실망할 마음이 가득할 때즈음 사람들이 이 음식을 먹기 시작했는데 너무 맛있게 먹었습니다. 이에 그 비결에 궁금하여 최영에게 물으니 그는 이것이 군사들이 쓰는 술책이라며 사람 마음을 헤아리면 병사들로 하여금 스스로 따를 수 있게 만들 수 있다는 의미로 즉, 형식보다 실질이 더 효과적임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질이 강직하고 충실하며 청렴했다. 전선에서 적과 대치하여 태연하였으며 화살이 빗발같이 지나가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군대를 지휘함이 있어서는 규율을 엄격히 하여 필승을 기하였으며 병사가 한 걸음만 물러서도 곧 목을 베었다. 그러기에 크고 작은 많은 전투에서 가는 곳마다 공이 있었으며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고려사』
『고려사』에 나온 그의 설명은 그는 백전백승의 엄청난 장수입니다. 특히 최영이 활약할 시기에는 왜구와 홍건적으로 고려가 무척 힘들 때였는데 최영은 당시 장수로 고려를 구해내는 역할을 해낸 구국의 영웅이었습니다. 최영은 공민왕시기에서 우왕 때에 이르기까지 활약했는데 그가 전장을 누빈 공으로 특히 우왕 때에는 그의 권세가 왕을 능가했다고 합니다.
최영은 1316년 고려 충숙왕 때에 최원직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5대조 할아버지가 대학사를 지낸 최유청일만큼 그의 집안은 이름만 문관집안이었으나 어려서부터 몸집이 크고 당당했던 크는 글보다는 무예를 더 좋아했으니 그는 무관이 되고자 하는 꿈을 키웠습니다.
무관으로 성장한 그는 양광도에 침범한 왜구를 상대로 첫 전투를 벌여 공을 세웠으며 조일신의 난 진압에 참여하며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조일신은 공민왕을 믿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는데 이를 최영이 진압한 것입니다. 이후 원나라에서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어지러울 때 그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고려에 요청해오자 최영장군이 발탁되어 원나라로 파병을 떠났고 이 곳에서 전투에 대한 다양한 경험과 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356년에는 공민왕은 최영 장군으로 하여금 함경도 일대를 수복하라고 하였습니다. 최영은 이 지역을 수복하고 철령위를 세웠으며 이 과정에서 이자춘과 이성계를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후 최영은 김용이 반란을 꾀하자 이를 처단하여 공민왕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반발한 원나라가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삼아 쳐들어왔지만 이를 최영이 물리쳤으며 이 때 적과 맞서 싸우지 않고 도망치는 자가 있으면 그 병사의 목을 잡아 쳤습니다. 그렇게 최영은 군대의 규율을 강하게 잡았습니다.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습니다. 신돈이 공민왕과 정사를 의논하며 개혁을 추진할 때 최영은 유배당한 것입니다. 사서에서는 신돈이 사리사욕을 채우며 관리들의 뇌물을 받아먹는다고 전하는 바 최영과 친한 김란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김란은 자신의 딸을 신돈에게 첩으로 보내고 벼슬을 얻었는데 이를 비난한 최영이 경주 부윤으로 좌천된 것입니다. 하지만 신돈이 제거된 1371년 이후 다시 최영은 정계에 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정치적인 격변기에도 왜구와 홍건적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습니다. 당시 왜구들은 작고 빠른 배를 이용하여 노략질을 하고는 금방 사라졌기에 이를 막는 것이 무척 어려웠습니다. 더욱이 왜구는 점점 대담해져서 육지 깊숙이까지 들어와 고려를 침탈하고는 했는데 그들은 고려를 멸망시키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1376년에는 충청남도 홍산에 왜구가 침입했습니다. 당시 이미 최영의 나이는 60이었지만 전장으로 향했습니다. 최영은 삼면이 절벽으로 막힌 좁은 길로 진격을 명했지만 왜구가 매복해있는 것을 두려워해 병사들과 다른 장수들이 꺼려했습니다. 이에 최영이 앞장서 달려나갔습니다. 그 때 몰래 숨어 있던 왜구가 화살을 쏘아 최영의 입술을 맞춥니다. 하지만 최영은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화살을 빼고는 직전으로 돌격해가 적진으로 달려갔고 이에 용기를 얻은 고려군이 뒤따르며 왜구를 섬멸하기에 이르니 이것이 바로 홍산대첩입니다.
이러한 최영장군은 그야말로 무신으로서 고려를 끝가지 지키고 권력욕이 없던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우왕으로부터 많은 신임을 얻었습니다. 우왕은 공이 많은 최영에게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시중이란 벼슬을 주고자 했으나 그는 이를 사양하였습니다. 그가 시중이 될 경우 전장을 누빌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당시 정치적 실권자는 우왕을 등극시키는데 공을 세운 이인임이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현명한 충신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인임에게 유일하게 큰 소리 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최영이었으며 그는 이인임더러 나랏일보다 사리사욕을 더 채우려 한다며 호통을 쳤습니다. 이후에 염흥방, 임견미가 실권자로 나섰는데 이들은 정치적인 능력은 없었고 백성들을 수탈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이 때 우왕은 최영과 이성계로 하여금 문벌귀족을 숙청하도록 지시하여 염흥방, 임견미, 왕복해 등이 제거되고 이인임이 유배를 떠났으므로 이제 권력은 최영에게 넘어갔습니다.
당시 떠오르는 중원의 주인 명나라가 고려에 철령위의 영토를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이 땅을 최영이 회복한 영토였기 때문에 최영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었고 이에 우왕에게 요동정벌을 건의하였습니다. 이성계와 신진사대부의 반대는 있었지만 출정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명나라로 진군해야 할 군대는 회군하였고 이를 계기로 이성계가 권력을 장악하고 최영은 참수되었습니다. 무리한 요동정벌계획으로 국가를 위기에 빠뜨렸고 권세를 탐했다는 이유였지만 고려왕의 신임과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최영의 존재는 새로운 국가를 계획하는 세력들에게 제거대상이었습니다. 권세를 탐했다는 죄목으로 참수형을 당했지만 그는 참수를 당하기 전 그가 무언가를 탐하지 않았다면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말대로 최영의 무덤에는 무덤이 자라지 않아 붉은 무덤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최영은 고려를 걱정하고 전장을 누비기를 꺼려하지 않는 타고난 무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유언 “황금보기를 돌 같이하라.‘라는 말을 그대로 실천, 그는 신념대로 청렴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강직함 속에 유연함은 부족했던 것일까. 그는 자신의 뜻을 함께 할 든든한 정치적 동지를 만들지 못한 듯합니다. 그는 오로지 왕에게 충성한 장군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이성계를 요동정벌을 지휘하도록 보냅니다. 원칙을 지키며 엄격한 최영장군은 이성계를 요동정벌군으로 보냈는데 아마 이성계가 정도전, 정몽주 같은 신진사대부와 친하게 지내며 정치적 세력을 형성했던 것이 부담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실 강대한 원나라를 밀어낸 명나라를 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실패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무패의 최영장군은 또다른 무패의 장군 이성계에게 1패를 안기려고 이러한 작전을 계획한 건 아닐까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성계의 쿠데타도 염두에 두고 최영이 믿는 장수 조민수를 같이 보냈지만 조민수를 비롯한 여러 장수들은 이성계에 설득당하고 위화도회군에 동참합니다. 최영인생의 유일한 1패는 이성계에 당한 것입니다. 고려의 마지막불꽃이었던 최영이 모시는 군주가 우왕보다 현명한 군주였다면 아마 고려는 역사 속에서 더 오래 존재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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