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는 정말 선죽교에서 죽었을까.

2022. 10. 8. 20:3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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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우리나라 역사에 많은 충신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나라의 멸망의 앞두고도 충절을 지킨 신하들은 깊은 감동을 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도 나라에 대한 곧은 마음을 지킨 고려시대의 신하가 있었으니 그것은 아직도 회자되는 정몽주입니다. 
정몽주는 고려 말기에 새로운 이념 체계로 도입된 주자학을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오부학당과 향교를 세워 널리 보급하는 데 공헌했습니다. 또한 예(禮)를 대중에 전파하기 위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가묘(家廟)를 세우고 신주(神主)를 처음 세웠습니다. 고려에 성리학의 기초를 세우고 그 명분을 지키며 죽었기 때문에, 후에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로 추앙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를 후대에 알려지게 한 것은 고려에 대한 충절입니다. 바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선죽교 이야기 때문입니다. 
당시 고려 말의 국제정세는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이 당시 그간 고려에 막대한 영향을 펼쳐오던 원나라가 북으로 쫓겨나고 명나라가 중국 본토를 차지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명나라는 철령 이북의 땅을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내놓았습니다. 이 지역은 원나라가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공민왕 때 회복한 영토였습니다. 고려조정은 이에 크게 반발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려는 최영장군과 이성계, 조민수 등에게 명나라의 전지기지인 요동정벌을 계획하였습니다. 이성계는 반대하였지만 어쩔 수 없이 왕명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성계는 지원받은 군사와 개인군사로 쿠데타를 일으키고 개경을 점령하였습니다. 이른바 위화도 회군이었고 이를 통해 최영 장군이 제거되고 고려의 신진사대부와 결탁하여 우왕을 폐위시켰습니다. 하지만 신진사대부 내에서 의견은 갈리게 되었습니다. 고려왕조를 유지하자는 온건개화파와 새로운 국가건설에 동참하겠다는 급진파로 갈린 것입니다. 
당시 정몽주는 온건파였습니다. 그렇다고 이성계의 의견이라면 무조건 반대하는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이성계가 요동 정벌에 반대할 때 이에 정몽주도 동조하였습니다. 이성계의 뜻과 함께 했다기보다는 성리학의 대가인 정몽주 입장에서는 충효를 근거삼아 명나라를 친다는 것을 반대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대국 명나라를 친다는 것은 성리학에 이야기하는 기본적인 도리 그러니까 신하가 임금을 섬기고 자식은 어버이를 섬기는 것에 어긋난다고 보았을 것입니다. 이를 국제관계에 빗대어보면 신하의 나라가 임금의 나라를 친다는 것은 성리학입장에서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명나라로 갔던 세자가 돌아오기 하루 전, 이성계는 하루 일찍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냥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말발굽 아래 있던 쓰러진 고목나무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그만바위 아래로 떨어져 부상을 당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정몽주는 이성계를 문병 갔습니다. 정몽주는 새로운 국가건설에 반대한 신하로 이성계 입장에서는 걸림돌 같은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국가건설을 위해 인재가 필요하므로 이방원은 정몽주를 마주 앉아 시조 한 수를 읊게 됩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년까지 누리리라.‘
일종의 회유의 의미를 담은 하여가였습니다. 

단심가

‘이 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없고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에 정몽주는 고려를 버릴 수 없다는 단심가로 응수하게 됩니다. 이는 정몽주와 이방원이 같은 배를 탈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방원은 정몽주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정몽주는 이방원과 헤어지고 자주 가던 주막집에서 술을 마신 후 다시 말을 타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선지교란 다리에 이르렀을 때 그 앞에 나타난 것은 바로 판위위사사 조영규였고 그의 손에는 첱퇴가 들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정몽주는 피습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 선지교 다리에는 대나무가 돋아났다고 합니다. 대나무는 겨울에도 푸른 잎을 지니고 있으며 속은 비었으나 곧게 자라기 때문에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식물로 여겨졌습니다. 그리하여 충절을 지키는 이에게 대쪽같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그러한 식물이 다리 위에 나온 것입니다. 이후 선지교는 선죽교로 불리게 되었고 정몽주의 핏자국이 남아 있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비가 올 때마다 핏자국이 다시 나타난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으며 조선시대의 명필 한석봉이 쓴 선죽교비가 있습니다. 
그렇게 고려에 끝까지 충절을 지킨 정몽주의 상징적인 남아 있는 장소로 기억되는 곳이 바로 선죽교입니다. 그런데 정몽주가 죽었다는 곳이 선죽교가 아닐 수 있다는 의견이 제시되었습니다. 일단 그가 이방원의 하여가에 답한 시조로 알려져 있는 단심가가 1439년 편찬된 정몽주의 문집인 ‘포은집’에는 빠져있습니다. 1719년 정몽주 후손 정찬휘가 포은집을 제작하면서 단심가가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단심가가 진짜 정몽주의 작품인지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ㅅ브니다. 또한 정몽주가 순절한 곳은 선죽교가 아닌 개성시내 태묘동 입구였으며 당시 철퇴가 아닌 칼로 목이 베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몽주가 순절하기 5년 전인 우왕 14년에 고려사권 137의 열전권 제 50면에 이미 선죽교란 교량이름이 나옵니다. 즉, 정몽주가 이곳에서 순절하고 나서 대나무가 돋아나와 선죽교라 바뀌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이 외에도 용비어천가에 부록된 ‘포은사실’과 생육신인 남효온이 쓴 송경록에도 당시 정몽주가 순절한 곳은 개성시내 진고개인 태묘동입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후 정몽주에 평가가 올라가고 그 와중에 정몽주의 충절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덧붙여진 이야기가 바로 선죽교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정몽주의 혈흔이 밝히지 못하도록 그의 후손 정호인은 돌나간을 설치하고 별도의 돌다리를 만들었다. 선죽교에서 정몽주는 진짜 사망했던 것일까.

그러던 1780년 당시 개성부 유수로 있던 인물은 정호인으로 그는 포은 정몽주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선죽교에 돌난간을 설치합니다. 이것은 정몽주의 혈흔을 짓밟히지 못하게 하려는 것으로 대신 별도로 돌다리를 세웠습니다. 그러면 진짜 정몽주는 이곳에서 고려를 위해 충절을 지키다 죽음을 당한 곳일까. 한편 정몽주의 평가는 조선개국초기에는 역적으로 평가되었습니다. 그런데 태종이 즉위하고부터 재평가되었습니다. 조선은 건국초기였기 때문에 새왕조의 안정을 위해 그리고 왕권 강화를 위해 이를 뒷받침할 이야기가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포은에 대한 평가가 많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태종은 포은에게 관직을 추증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이라는 작호와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세종 때 편찬된 삼강행실도에 충신으로서 수록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세월이 지나면서 높아지는 평가와 함께 그를 기리는 문충당이 정몽주의 옛 집터에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높아지는 평가와 더불어 정몽주의 충절이야기는 만들어진 것일까요. 아니면 선죽교는 실제로 그런 안타까운 사연과 함께 정몽주의 충성심이 스며들어 대나무가 돋아났던 다리였을까요. 선죽교 이야기가 진실이든 후대에 조작했던 간에 정몽주가 고려에 대해 충절을 지킨 신하라는 점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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