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수도 개경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2022. 12. 16. 08:11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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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대터 발굴성과에 기초해 그린 고려 왕궁과 회경전 앞 태조 왕건의 행차 모습

고려의 수도는 개경이었습니다. 하지만 궁예의 폭정을 전복시키고 왕위에 오른 왕건이었기에 고려의 초창기 수도는 철원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해인 919년에 송악, 후일의 개경으로 천도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배경이 있었겠지만 왕건의 고려 창건은 궁예를 몰아낸 역성혁명이라는 측면도 배제할 수 없었고 이에 따르지 않는 무리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이러한 움직임이 부담이 되어 자기 가문의 근거지가 되는 개경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도읍을 개경으로 옮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 왕조가 시작되는 입장에서 본래의 도읍을 버리고 새로운 도읍을 정하는 것도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바꾸어 생각하면 궁예가 애초에 후고구려를 건국했을 때에는 도읍지가 바로 개경이었습니다. 철원으로 옮기기 전까지 이곳은 3년 동안 도읍지 역할을 하던 곳으로 도읍을 옮기는 것에 대한 부담을 최소화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기반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개경으로의 천도는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한반도에서 개경은 그 중심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 때 사용한 조운의 길은 고려시대 때부터 이어져온 것이니 지리적으로도 개경은 그 위치가 도읍지로서 합당한 곳이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천도과정에서 풍수지리설의 도움을 받았을 것도 생각할 수 있지만 왕건은 풍수로서는 개경보다 서경을 더 중요시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간혹 개경의 지세를 강조하는 옛 기록을 살필 수 있으나 이는 개경으로 천도한 이후 개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풍수지리설이 이용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개경이 수도에서 가장 외곽에 있는 성인 나성이 축조된 것은 1029년입니다. 그리고 이때가 도읍지로 정한 후 완연한 도시로서 개경이 완성된 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개경을 둘러싼 나성은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토성이었으며 성문도 25개에 달했으니 이는 석성으로 축조되어 8개의 성문을 조선의 나성과는 사뭇 다른 모습니다. 또한 나성의 길이는 총 3km로 개경으로 둘러싼 외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성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의 건축에는 30여 만명이 동원되었으니 당시 개성의 나성모습도 상당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약 110여 년 동안 도시계획으로 만들어진 곳이라는 이야기이지만 그 기나긴 세월동안 하나의 계획 아래 진행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조선의 수도 한양이 비교적 단기간에 궁궐과 종묘, 성곽이 들어선 것을 생각한다면 개경은 태조 때부터 꾸준한 보완과 개선을 통해 만들어진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시기에 세워진 만월대 인근의 첨성대 전경

“그 나라를 무마하기 위해 그 지경에 들어서면 성곽들이 우뚝우뚝하여 실로 쉽사리 업신여길 수 없다” 송나라 사신 서긍
고려는 불교국가였습니다. 그리하여 개경에는 300여 개의 사찰이 있었고 개경의 사람들은 1년에 두 번, 연등회와 팔관회를 통하여 축제를 즐겼습니다. 그렇다고 불교적인 색채로만 채색된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개경의 도시에는 풍수지리를 통해 자연을 거스리지 않는 사고방식이 적용되어 만들어진 도시였습니다. 실제로 현재 개성에는 고려의 화려한 궁궐에 모습 대신 그것을 바치고 있던 주춧돌만 남아 있는데 이것을 통해 당시의 건물배치를 가늠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건물들이 평지가 아닌 언덕의 경사면을 따라 지어졌다고 하는데 땅의 형세를 해치지 않고 지형에 따라 건물을 배치하는 풍수지리학적인 생각이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중국과 교류하고 그들의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율적으로 묘실을 운영하는 자세와 개경을 중심으로 그 주변을 경기라 하고 이후 개경을 황도라 부르는 모습에서 독자적인 모습으로 도시를 운영했던 고려의 모습을 살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개경에는 각종 궁궐이 있었을 것이고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회경전이었습니다. 
“동서 양계단이 붉게 칠해져 있고 난간은 동화장식으로 꾸몄으며 웅장하고 화려하여 모든 전 가운데 제일이다.” 송나라 사신 서긍

동여비고 고려시대 경기도 주변을 그린 지도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고려궁궐은 현재 남아 있지 않아 가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만 고려 궁궐에 대해서는 일본에 건너가 고려불화를 통해 어렴풋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일본으로 건너간 고려 불화 중에 ‘미륵하생경변상도’라는 그림이 있는데 이 그림은 미륵불이 하생하여 세 번의 설법회를 열어 남은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하생경』의 그린 것입니다. 이그림의 하단에 가상 세계의 궁궐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의 모델을 고려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청자색의 지붕과 아름다운 기와지붕 형태인 합각지붕, 그리고 용무늬를 넣어 치미를 지붕 위를 장식하고 난간에는 동으로 문양을 넣어 화려하게 꾸민 것입니다. 그리고 또다른 불화 ‘관경변상서품도’에서도 궁궐에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도궁궐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고려궁궐을 모델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여러 개의 공포가 지붕을 받치는 다포식 공포양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를 토대로 고려  회경전을 상상한다면 배흘림기둥이 지붕을 받치되 그 지붕은 중층구조를 이루고 있을 것입니다. 겉으로는 2층 구조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2층이 지붕까지 뚫린 것입니다.

고려 궁궐터 서부 건축군

그리고 기둥의 밑에는 꽃무늬로 장식되고 촘촘히 받친 공포와 함께 지붕 끝에는 용무늬치미로 장식되어 그 위용을 자랑했을 것입니다. 이 곳은 왕이 공식적인 의식을 거행하는 기본정전으로 그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며 앞면 9간, 옆면 4간의 제일 큰 내래채 건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회경전 앞에는 문무백관들이 조회를 받는 마당이 있으며 이 외에도 정사를 보는 건덕전을 비롯한 여러 건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고려는 국왕이 거처하는 곳을 황궁이라고 칭했는데 이것은 고려가 황제국을 지향했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려 왕은 왕족들에게 공작, 후작, 백작이란느 작위를 주었는데 그러면서 각각의 다른 이름의 궁을 하사했으니 이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그리고 고려의 왕은 궁궐문을 나갈 때 다섯 개의 문을 지나니 이 역시 황제국의 나라에서 할 수 있는 건물배치입니다. 반면 조선은 제후국임을 자처했고 근정문, 흥례문, 광화문의 3개의 문을 지났던 것과 비교되는 것입니다. 그럼 고려가 이렇게 황제국임을 스스로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후백제와 신라는 물론, 수많은 지방세력을 통합하였고 동시에 주변의 여러 나라 즉 탐라나 여진, 말갈에 비해 강해진 국력을 과시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그러한 자신감이 밑바탕이 되어 고려가 스스로를 황제국이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에 고려 4대 임금 광종은 수도 개경의 이름을 황도라 고쳐 부르기까지 합니다.  
23km에 달하는 기다란 개경의 나성 안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았을까. 송나라 역사책은 『송사』에서는 12세기 고려의 인구를 210만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려사』에서는 몽고군의 침입을 피하기 위해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 개경의 인구를 10만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호의 인구 수를 4~5명으로 잡는다면 대략 40~50만 명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 인구가 개성의 나성 안에 살던 사람들로 보기는 힘듭니다. 아마 이 숫자는 개경과 경기가 포함된 왕경개성부의 호수와 인구일 것입니다. 
고려정부는 개경 근처에 부두를 만들어 무역을 하도록 했으니 그곳이 바로 벽란도입니다. 개경에는 사신과 상인들이 드나들었으며 송나라 사신을 맞이하기 위한 순천관을 비롯, 오빈관, 영은관, 영선관 등 10여 개나 개관이 있었고 대식국이라 불린 아라비아와 더불어 인도, 태국, 베트남에서 상인이 들어와 무역을 하였으며 사신선들이 도착하면 즉각 사람들이 몰려 저자를 만들고는 물건을 진열하였다고 합니다. 그 수가 1만 여명에 달했으니 무기, 갑마, 기치, 의장들을 늘어세우고, 구경꾼들은 담장처럼 모였다고 했습니다. 당시 고려 개경은 황제국의 자부심이 서려있는 고려의 도읍지이자 무역상인들이 모여드는 국제도시였고 자유로운 개방적인 도시분위기와 맞물려 개경에서 코리아라는 이름이 서양으로 퍼져 나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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