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요동정벌은 어디까지 이루여졌나.

2022. 12. 18. 08:12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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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교 역사 교과서에 표시된 우리의 영토사.

고려말의 국내외 정세는 혼돈의 시기였습니다.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교체하는 격변의 시기였고 고려 국내적으로 사대부와 신흥무인세력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넓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으며 고려말의 중흥의 마지막 의지를 불태운 공민왕은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민왕의 많은 업적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것 중에 바로 요동정벌이었습니다. 
고려는 고구려를 이어받은 나라를 대외적으로 알려왔고 그러면서 시기에 따라 북진도 추진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 왕조 창건을 부른 위화도 회군도 이러한 요동정벌의 연장선상에 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국내 교과서에서는 “공민왕은 고려의 자주성을 강화하기 위해 몽골식 풍습을 폐지하고 관제를 복구하였다. 또한,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하였고, 원·명의 정세 변화를 틈타 요동지방을 공격하였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 공민왕 대에 공격했다는 내용만 나올 뿐,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학교교육에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 당시 고려군은 요동지역의 어디까지 갔었고 그에 대한 성과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재추(宰樞)부터 이서(吏胥)에 이르기까지 사람마나 활 하나, 화살 쉰 개, 칼 한 자루, 창 하나를 갖추게 하고 사열하게 했다.’ -공민왕 즉위 원년-
공민왕은 벼슬의 최고위직부터 말단직까지 무장을 시켰으니 이것은 바로 북벌의 의지였습니다. 형 충혜왕이 실정으로 독살당하고 충목왕, 충정왕이 왕위를 오르는 사이 고려의 정치는 더욱 혼란해졌습니다. 당시 몽골에 볼모로 와 있던 공민왕은 원의 내부사정을 파악하는가 한편 고려를 다시 일으키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고려왕으로 등극한 후 적극적인 반원자주정책으로 이어졌고 그 중에는 옛 고려의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의지로 나타났습니다. 
공민왕 시기의 고려는 1369년(공민왕 18)과 1370년, 두 차례에 걸쳐 동녕부를 공격했다고 합니다. 동녕부는 1270년 원(元)나라가 고려의 서경(西京)에 설치한 통치기관인데 1290년에 고려의 끈질긴 요구를 받아들여 이 지역을 고려에 돌려주고, 동녕부를 요동(遼東)으로 옮겼습니다. 즉, 요동으로 옮겨진 동녕부를 두 차례 공격했다는 것은 이미 공민왕 대에 두 차례의 요동정벌이 있었던 셈입니다. 그럼 이 정벌을 통해 어떤한 성과를 얻었을까. 

프랑스 당빌이 1737년에 그린 〈조선왕국전도〉(랴오닝성과 지린성 일부를 포함).

"여러 성들도 이러한 형세를 보고 모두 항복했으므로 항복 받은 민호가 1만을 넘었다. 노획한 소 2000두와 말 수백 필을 모두 그 주인들에게 돌려주었다. 북방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여 귀순해 오는 사람들이 저자에 가는 것 같이 많았다. 그리하여 동으로 황성(皇城)에 이르기까지, 북으로 동녕부(東寧府)에 이르기까지, 서로 해(海)에 이르기까지, 남으로 압록(鴨綠)에 이르기까지 이 일대가 텅 비게 되었다." 『고려사』
이 정벌을 통해 주변의 여러 세력들이 이성계에게 항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이 성계는 동녕부의 우라산성을 공격해 항복을 받았고 위와 같은 전과를 올린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럼 우라산성은 어디일까요. 기록에 따르면 우라산성의 동쪽에는 황성이 있다고 했으니 황성은 고구려의 옛 수도인 졸본이나 집안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으로 동녕부가 위치하고 서쪽으로 바다에 접한 곳이며 이는 압록강 너머에 있는 만주 어딘가 쯤입니다. 
 "이성계와 지용수 등이 의주(義州)에 이르러 부교(浮橋)를 가설하고 압록강을 도하하여 요성(遼城)으로 진격하였는데 급히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고려사』
‘요양과 심양 일대는 고려의 땅이요, 백성은 고려의 백성이다. 이제 의로운 군대가 들어와 백성을 어루만져 편안케 하오니…’ 『고려사』
공민왕의 북진정책은 한반도의 안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건국초기부터 있었던 북진정책의 일환이었으며 치밀한 준비와 정세변화를 이용한 시대감각으로 얻어낸 산물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정벌은 발해 이후 잃었던 북방 영토를 탈환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대략 발해 멸망 이후 400년, 혹은 고구려 멸망 이후 600여 년만의 영토수복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을 부정하게 만드는 송나라 관료 서긍의 기록이 있습니다. 
 “남쪽은 요해(遼海)로 막히고 서쪽으로 요수(遼水)에 이르며, 북쪽은 옛 거란 땅과 접하고 동쪽은 금(金)나라와 맞닿았다(高麗, 南隔遼海 西距遼水 北接契丹舊地 東距大金)”『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이른바 국사학계의 태두라는 이병도가 [국사대관]에서 그린 고려강역도, 함경남도도 차지하지 못했다고 그리고 있다.

만약 서긍의 기록대로라면 고려 전기에 이미 요동땅을 차지한 바 있고 몽골 때 영토를 일부 잃었다가 회복한 것이 됩니다. 따라서 공민왕이 추진한 북벌정책은 비단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뜻 이전에 고려전기의 영토였던 요동을 회복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공민왕 대에 서쪽으로는 요동의 요양까지 넓혔습니다.
그럼 당시 공민왕의 북진정책으로 얻어낸 북방한계선은 어디까지였을까. 
‘지정(至正) 16년에 이르러 공민왕이 공험진 이남을 본국에 환속하고 관리를 정하여 나라를 다스렸다.’ 조선왕조 『태조실록』
이는 쌍성총관부를 쳤던 1356년의 기록입니다. 그리고 국내 교과서에서는 이 쌍성총관부에 대해서 함경도 원산에 설치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공민왕 대에 회복한 곳도 이 곳이며 철령위도 이 근처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모순이 생깁니다. 원나라가 1368년 북방으로 밀려나고 중원의 자리에 명나라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명나라는 원을 이어받은 중원의 강자임을 내세워 원나라가 차지했던 땅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며 본래 고려의 땅이었다가 원나라에 뺏긴 땅에 철령위를 설치합니다. 당연히 고려는 반발하고 이에 대해 원정을 단행합니다. 그러면 그 원정길은 교과서대로라면 함경도를 향해야 하지만 중국 요동으로 향합니다. 
“철령위는 도사성(요양성) 북 240리에 있다. 옛날에는 철령성이었고 지금의 철령위 치소 동남 오백리에 있었다. 고려와 경계를 접했다” 『명일통지』
하지만 중국의 사서에서 전하는 철령위의 위치는 오늘날의 요녕성 일대입니다. 그런 조선왕조실록에서 말하는 공험진 이남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조선 세종 때의 지도 「조선국희도」에서는 백두산과 두만강 근처에 공험진이 표시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공험진은 두만강 너머에 있는 곳이었습니다. 또한 고려예종 때 여진을 쳐서 3성을 빼앗고 6성을 쌓은 것에 대한 기록으로 남긴 그림 「척경입비도」가 있는데 공험진의 선춘령에 세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철령은 강원도에 없었다

‘경원도호부에서 북쪽700리에 공험진이 있고 동북쪽으로 700리에 선춘현이 있다.’ 『세종실록』
조선의 기록과 고려의 기록의 토대로 보면 공험진은 적어도 두만강 이북의 간도지방이 위치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동안 알아왔던 고려의 영토와 확장과정은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 영토는 발해가 멸망한 이후로 한반도 안에서만 영역이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대동강에서 원산만을 잇는 영토를 완성하고 고려는 공민왕 대에 이르러 의주의 압록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국경까지 넓혔으며 조선 세종 대에 4군 6진 개척을 통하여 현재의 한반도 영토를 완성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고대부터 꾸준히 만주일대까지 우리 민족의 영역으로 여겨 왔고 이러한 것은 고려시대의 영토확장으로 보인 것입니다. 비록 공민왕 대의 요동정벌과 그 성과가 일시적인 것이었고 명나라의 압박과 왜구의 침탈로 인해 지속적으로 가져갈 수 없었지만 어쩌면 세종 시기의 4군 6진의 개척도 이러한 만주고토를 수복하기 위한 국방정책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만주고토 수복전쟁에 대한 마지막으로 달성한 군주가 바로 고려 공민왕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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