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로 유배간 충선왕

2022. 12. 20. 08:15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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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몽골에 항전하였지만 결국 강화를 결정하고 개경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러면서 원종은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기를 자청했으니 고려의 왕이 원나라 공주와 결혼하기로 하였고 그가 충렬왕이고 충렬왕의 부인은 세조 쿠빌라이의 친딸인 원성공주였습니다. 다음을 이은 충선왕은 몽골인 어머니를 둔 최초의 고려왕이 된 것입니다. 세자였던 충선왕은 1297년 자신의 어머니가 3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그 탓을 아버지인 충렬왕에게 돌렸습니다. 충렬왕이 사냥에 집중하고 외도하는 바람에 마음의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실 충렬왕에게도 나름 사정이 있었는데 절에 행차할 때마다 원성공주를 모시고 가야하는 형편이었고 1277년에는 자신의 수행원이 적다며 공주가 화를 내고 돌아 가버리기도 하였습니다. 아마 이런 일련의 일들이 충렬왕이 몽골왕비에게 정을 붙이지 못했을 수도 있었고 눈길을 다른 후궁에게 돌린 것입니다. 하지만 충선왕은 고려인인 아버지 편을 들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는 몽골인 어머니를 둔 데다가 할아버지가 쿠빌라이였습니다. 아마 고려의 세자라는 생각보다 원나라 황제의 손자라는 인식이 더 강했고 이를 바탕으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자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충선왕은 충렬왕의 후궁은 물론 후궁 측근들까지 처벌하니 충렬왕은 황제에게 왕의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이야기하여 충선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사실 충렬왕은 몽골입장에서 달갑지 않았는데 몽골과 일치하는 관제에 대해서는 개정하면서 나머지 고려의 독자적인 관제는 유지하였으며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때도 성심성의껏 지원하여 이를 빌미로 다루가치 철수, 탐라 반환, 고려 백성 송환등을 요구했습니다. 이러한 과도한 요구가 아마 충렬왕을 왕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충렬왕의 뒤를 이은 충선왕은 1298년에 왕이 되었다가 7개월이 되었을 때 돌연 폐위당했습니다. 그 뒤 몽골 수도에서 생활하다가 1308년 다시 고려로 돌아와 다시 왕이 되었습니다. 무슨 사연이 있던 것일까. 

티벳 서부 샤카사의 벽화

충선왕은 훌륭한 평가를 받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후대의 평가를 받을 만한 업적이 몇몇 있습니다. 1298년 당시 고려정부에는 문한서(文翰署)라는 관청이 있었는데 실력은 있지만 가문이 약한 이들이 근무하는 곳이었습니다. 충선왕은 이에 정방을 폐지하고 해당 권한을 문한서에 넘겨주고 사림원으로 바꾸고는 왕명출납기능까지 맡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1313년 왕위 자리를 충숙왕에게 물려주고 대도에 머무르면서 만권당이라는 학술기관을 만들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만권의 책을 모아두고는 고려와 중국의 학자들을 불러 모아 학술교류의 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는 중국의 학술이 고려로 흘러가도록 하기 위한 조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활동한 것이 바로 이제현입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유교의 분파인 성리학이 고려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왕권강화를 위해 비주류인사들을 등용하여 자신의 지지기반을 삼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조처는 후에 그가 키운 신진사대부는 공민왕 대에는 지배층으로 성장하였으며 나중에는 조선 건국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충선왕은 자신의 아버지의 외도로 어머니가 세상을 떴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도 아버지와 비슷한 길을 따라갔습니다. 그의 부인은 역시 몽골인으로 쿠빌라이의 증손녀 계국대장 공주 보탑실련이었습니다. 사실 그에게는 이미 4명의 왕비가 있었고 그 중에서 조인규의 딸 조비를 아꼈습니다. 이에 계국대장공주는 조비를 질투하고 있던 차에 대궐 문에 “조인규의 처가 왕이 공주를 사랑하지 않고 자기 딸만을 사랑하게 하고자 무당을 불러 굿을 하며 저주하였다”라는 익명의 글이 나붙게 되자 화가 난 계국대장공주는 원의 황태후에게 무고편지를 보냅니다. 그에 따라 원나라는 조비일가를 국문하고 원으로 잡아갔으며 극심한 고문을 이기다 못해 조인규의 처가 거짓자백을 하게 됩니다. 충선왕은 즉위한지 7개월 만에 폐위당하고 그의 아버지 충렬왕이 다시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른바 ‘조비 무고 사건’, 하지만 이 사건을 구실일 뿐, 아마 충선왕의 개혁적인 조처가 도화선이 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충선왕이 폐지한 정방은 본래 부원배 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것이었고 사림원(詞林院)과 광정원(光政院) 등 새로운 기구를 설치해 왕권을 강화했으며 신진관료를 등용하였으며 이에 해당하는 인물은 장인 조인규를 비롯해 이승휴, 정가신, 안향 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존 기득권의 성향을 무시한 조처와 당시 왕으로서 원나라 황실의 압박을 받아야 했던 부마국의 지위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밀어붙인 조처에 반발을 불보듯뻔했고 조비무고사건으로 인해 반개혁세력들은 충렬왕의 복위를 도모하여 충선왕은 7개월만에 폐위된 것입니다. 


폐위당한 충선왕은 원나라 태자궁에 머물며 훗날 원나라 황제가 되는 무종, 인종 형제와 가까이 지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충선왕의 정치적 의도도 숨어 있었습니다. 당시 원나라의 성종황제의 아들이 세상을 뜨자 무종과 쿠빌라이의 손자인 아난타 세력 간에 갈등이 일어났고 이 경쟁에서 무종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면서 충선왕은 황제가 된 무종으로부터 1308년 ‘개부의동삼사 태자태부 상주국 부마도위’라는 벼슬을 받고 심양왕으로 봉해졌습니다. 그리고 충렬왕이 세상을 떠나자 당시 왕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충선왕은 단 1년 동안 고려에 머무르고는 다시 원나라에 돌아와 교지정치를 행합니다. 원나라에서 교지를 내려 고려를 통치하는 것인데 충선왕은 원나라에 머무르며 원나라세력을 등에 업어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면서 동시에 원나라의 직간접적인 개입을 막고자 한 것입니다. 실제로 그의 이러한 정치의도가 통했는지 고려왕으로 복위한 다음해부터 원나라사신이 고려로 들어와 내정에 간섭하는 일이 적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원나라의 각종 물자요구도 적어졌습니다. 그리고 일종의 소금전매제도인 각염법을 실시하고 토지조사실시, 인재등용에 힘을 썼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는 고려에서 충선왕의 측근들이 대리정치인으로 수행하였는데 그들이 부패함에 따라 사실상 개혁조처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고려조정은 충선왕의 귀국을 요청하였고 이에 그의 결정은 그의 아들 충숙왕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충선왕은 다시 한 번 정치적 선택의 갈림길에 섰습니다. 원나라 황제 무종은 세상을 뜨면서 왕위를 자신의 동생 인종에게 물려주었는데 그리고 약속한 것으로 무종의 아들이 인종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인종이 이 약속을 무시하여 그들 간에 갈등이 일어나니 상왕인 충선왕인 어느 한 쪽을 택해야 했고 그가 택한 것은 바로 무종이었습니다. 하지만 인종의 아들인 영종이 황제가 되면서 충선왕은 그 자리게 위태해졌고 여기에 고려출신 환관 임파엔토쿠스가 상왕을 모함하였습니다. 결국 모함받은 상왕은 석불사에 갇혔다가 티베트로 가불경을 공부하라는 영종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유배인 것입니다. 
‘내가 운명이 기박하여 이러한 우환을 당하였다. 혈혈단신으로 산 넘고 물 건너 1만 5000리 길을 걸어 토번으로 향하고 있으니 우리나라에 대한 수치다. 나는 잠자리에서도 편안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먹어도 음식의 맛을 알지 못한다.’
충선왕은 유배를 당합니다. 그리고 유배지는 고려땅에서 멀고 먼 티베트, 15000길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충선왕이 간 곳은 티베트 수도 라싸에서도 약 400km 떨어져 있는 외진 곳이자 샤카파의 총본산이었습니다. 충선왕은 이곳에 신하 18명을 데리고 3년간 머물며 수행했으며 이때 티베트에서 충선왕을 위해 기도법회를 열어 주기도 했습니다. 이제현은 충선왕을 알현하기 위해 험한 길을 건넜고 최성지와 함께 충선왕의 무고함과 귀국을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충선왕은 고려의 왕이었지만 티베트로 유배를 떠나야 했고 그곳에서 수행해야 했던 충선왕의 심정은 복잡했을 것입니다. 한편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고려의 왕으로 생각했을까. 아니면 몽골의 황족으로 생각했을까. 그의 복잡한 출생과정이 교지정치라는 유례없는 
사례를 만든 건 아닐까요. 어쩌면 고려가 부마국이 된 순간 고려왕조의 수명은 연장되었을지는 몰라도 개혁자체는 불가능하게 만든 사건이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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