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서 발견된 고려청자 운반선

2022. 12. 22. 08:16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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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충남 태안군 대섬 인근 해역에서 발굴 인양된 도자기 운반선에 실려 있던 유병들. 두 개의 유병 각각의 목 부분을 갈대로 묶어 나무막대에 매달았다.

지난 2003년의 일입니다. 군산시 옥도면 십이동파도 근해에서 청자운반선이 침몰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선체는 잔존 길이가 7m, 폭이 2.5m 정도이며 주재료는 소나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2004년에는 청자유병 등 도자기 2184점과 닻을 고정하는 닻줄과 닻돌로 보이는 닻 부속구도 인양되어 지금까지 군산 십이동파도에서 인양된 유물은 최초 신고 622점, 긴급 탐사시 인양 667점, 1차 발굴인양 5266점, 2차 발굴인양 2184점 등 총 8739점의 도자기와 선체 14편이 인양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에는 이 선박에 대해 11세기말경 선박으로 추정하였습니다. 또한 2007년에는 충남 태안군 근흥면 대섬 앞바다에서 청자완 등 고려청자를 다량 실은 운반선이 발견돼 540여 점의 유물이 발굴되었습니다. 발굴조사 지점은 조석간만의 차가 심하고, 조류가 빠른 해역으로 예부터 안흥 일대는 난행량(難行梁)으로 불릴 만큼 선박침몰 사고가 빈번해 운하의 굴착(掘鑿)을 시도한 기록(고려사 권제16 세가 인종12년(1134년) 등)이 있는 곳입니다. 당시 발굴된 청자의 제작시기에 대하여 12세기 중반 강진지역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상감청자는 보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적재상태는 청자 사이에서 쐐기목재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이전에 조사한 군산 십이동파도와 동일한 적재방법으로 완충재(짚)와 받침 쐐기목재를 이용해 끈으로 묶어 포장한 상태임을 알 수 있었고 생산지 강진에서 출발해 북상하던 중 이곳에서 침몰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발굴된 유물에 대해서는 대접과 접시가 주종을 이루고 과형주자, 항(缸), 발(鉢), 단지 등 이전 수중발굴에서 확인되지 않았던 다양한 기종이라고 했습니다. 확인된 선체는 외판(폭 40cm, 두께 6cm)·멍에형 가룡 부속구·저판추정 목재일부와 가공하지 않은 원통·석제닻장이었습니다. 
고려시대는 배를 이용하여 청자를 운반했는데 2003년과 2007년의 사례를 보면 서남해 바닷길을 많이 이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길은 빨리 이동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는데 바다는 빠른 조류와 안개, 암초, 풍랑 등 해양환경과 기상악화 등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며, 이로 인한 불의의 해난사고를 당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2003년과 2007년에 발견된 선박은 그러한 안타까운 사고의 잔해입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고대선박은  완도선(1984), 달리도선(1995), 십이동파도선(2004), 태안선(2007)등 모두 13척이었습니다. 

고려시대 도자기 포장과 적재방법을 보여주는 당시 선박 모형도.

고려는 청자를 뱃길로 가져가면서 어떠한 식으로 쌓았을까. 고려사람들은 청자를 대부분 3~4단으로 쌓았으며 소나무와 새끼줄, 볏짚, 갈대 등으로 포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소나무는 원통형 나뭇가지를 그대로 사용하거나, 거칠게 깎아 도자기 꾸러미의 지지대로 이용한 것입니다. 일상생활용 그릇은 꾸러미를 엮어 선적하였는데, 접시는 50∼60개, 대접은 30∼40개 단위로 포개었습니다. 도자기 꾸러미 사이에는 짚이나 갈대를 넣고 종과 횡 단위로 3∼4단씩 쌓아올렸으며 도자기 묶음 사이사이에도 짚이나 풀을 넣어 깨지는 것을 방지했습니다. 청자유병은 나무막대를 가운데 두고, 병 2개씩 목 부분을 교차하여 묶어 포장하였습니다. 스님들이 사용하는 청자발우는 크기가 다른 여러 개의 그릇을 한 세트로 포장을 했습니다. 항상 세트로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포장했으며 가장 큰 발우 안에 그보다 작은 크기의 그릇을 겹쳐 놓았고 깨지지 않도록 사이사이 짚을 넣었습니다. 하지만  매우 중요한 도자기는 개별 포장을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포장된 도자기들은 적재하기 전에 두툼하게 깔아둔 짚 위에 올려졌으며 청자대접과 같은 크기가 큰 것을 먼저 놓고 그 옆으로 작은 기형의 접시 등을 끼워 넣어 한정된 공간을 활용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공간 사이사이에도 짚을 넣어 배의 흔들림에도 깨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군산 십이동파도선, 원형 복원

서남해안에 침몰된 선박에 실렸던 청자들의 생산지는 대부분 해남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곳은 강진과 더불어 주요 청자생산지로 여기서 생산된 그릇이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습니다. 이 곳에서 생산된 청자는 음식과 차, 그리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그릇이 주로 제작되었는데 11세기 후반에는 그 종류와 색상, 무늬, 기법이 다양하고 독창적으로 진화했습니다. 당시 장인들은 철분이 많은 바탕흙 위에 나무재로 사용하여 만든 잿물 유약(회유灰釉)을 발라 구워, 자연스러운 흙빛과 녹갈색이 감도는 독특한 색이 나왔으므로 이를 녹청자로 불렸습니다. 강진에서는 비색청자와 삼감청자를 생산했다면 해남은 녹청자와 11세기 중후반부터 12세기 무렵에는 철사 안료로 무늬를 그린 철화백자를 유행시켰습니다. 
강진과 더불어 해남은 고려 당시 주요 청자 생산지였는데 해남은 비색청자보다 한 단계 낮은 청자들을 생산해냈습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비색청자가 최고급으로 분류된다면 그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공급할 수 있는 보급형 청자를 해남에서 생산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일반 서민층이 사용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강진의 도자기는 최상위급 귀족들이 사용하고 해남의 도자기들은 최상위계층을 포함한 중상위계층들도 공유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2022년 1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군산 십이동파도 해역에서 발굴된 십이동파도선의 원형을 복원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럼 실제 고려시대 선박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우리나라 선박의 가장 큰 차이는 평저선, 즉 평평한 형태라는 것입니다. 고려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평저선은 있지만 중국에서는 배 밑이 뾰족한 첨저선이 함께 사용되었고 일본 선박은 완전한 평저선이라 보기 힘들다고 합니다. 유독 고려선박이 평평한 것은 갯벌이 발달한 우리나라 해안을 잘 항해할 수 있고 정박에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나라와 중국의 평저선은 배밑과 배의 좌우 몸체가 올라가는 형태가 U자형인 반면 일본은 V자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외판을 이어붙이는 것에서도 차이를 보이는데 중국의 선박은 외판을 올릴 때 나무를 평평하게 만든 다듬은 후 위쪽 부재를 서로 맞대어 붙이는 반면 우리나라는 아래쪽 부재에 홈을 파서 위쪽 부재를 끼우는 구조이고 나무못만을 사용하는 것도 우리 선박의 특징입니다. 배의 몸체인 외판이 힘을 가지고 버티기 위해서는 좌우를 서로 연결시켜 줄 때 중국의 선박은 외판을 이어주는 벽을 설치하고 우리나라에서는 하나의 나무 막대를 좌우를 가로질러 외판끼리 서로 연결합니다. 이밖에도 한중일 세 나라의 고대 선박은 조금 차이를 보이는데 각자의 바다환경에 맞추어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청자운반선은 당시의 조운선을 따라 운반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은 서남해안의 연안뱃길이지만 이 길은 수심이 낮고 해안선이 복잡하기 때문에 뱃길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면 안전이 보장되는 길은 아닙니다. 그리고 빠른 해류와 암초 등이 있어 만만치 않은 길입니다. 따라서 당시 고려 인종 12년(1134)에는 군졸 수천 명을 풀어 운하공사를 벌였고, 의종 8년(1154)에도 운하 개착 시도가 있었으며. 공양왕 3년(1391) 공사를 재개했으나 화강암 암반이 나타나는 바람에 중단되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길을 따라가다가 심이동파도 부근에서 청자운반선이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십이동파도와 같은 위도에 있는 전라북도 군산에는 풍력발전소가 많다고 하며 선박의 출항이 금지될 정도로 바람이 세게 부는 날도 40여 일에 달할  정도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예보를 알 길 없었던 고려시대에 강한 바람의 휩쓸리면 개경으로 향하던 배는 항로를 이탈하기 일쑤였을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는 곳곳에서 암초가 발견되니 아마 바람에 이곳으로 온 청자운반선은 암초라는 장애를 만나 항해에 더욱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십이동파도에서 침몰한 배는 암초가 있는 곳을 몇 미터 지나간 지점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배가 암초에 부딪히면 그 자리에 가라앉는 것이 아니라 나선형을 그리면서 침몰하다가 다른 곳으로 밀려날 수 있다고 합니다. 청자가 가라앉은 곳에서 유물들은 발견되었지만 이것을 타고 나른 사람들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운반선을 움직였던 고려인들은 자신들은 이 자기의 주인이 될 수 없어도 이 배에 그들의 꿈도 같이 실었을 것을 생각하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청자운반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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