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 있던 삼별초는 정말 오키나와로 갔을까.

2023. 4. 5. 09:3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728x90

제주 항몽유적지에 전시된 삼별초의 마지막 전투 기록화

삼별초는 원래 무신 최씨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보호하기 위해서 만든 군대로, 처음 야별초에서 시작되었으며 야별초는 밤에 개경의 도둑을 잡고 백성의 난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이 야별초가 좌별초, 우별초로 구성되었으며 여기에 몽골에 원한이 깊은 자들이 스스로 입대해서 만들어진 신의군이 더해져 삼별초가 완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삼별초가 최씨 사병부대로 출발하였지만 몽골의 침입 때는 그들에 대항하여 싸우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고려정부가 원나라와 강화하자 고려는 삼별초의 철수를 요구했고 이에 응할 수 없었던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진도, 그리고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며 저항합니다. 하지만 1273년, 여몽연합군을 공격을 받고 삼별초의 3여 년의 항쟁은 끝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때 김통정은 자결하고 휘하 부장 70명은 붙잡혀 참수되었으며 남은 1300명은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들은 그렇게 사라졌을까요. 
1271년 9월, 일본 가마쿠라 막부는 고려로부터 국서 한 통을 전달 받습니다. 국서에는 몽골에 대해 ‘야만적인 적’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그에 더해 몽골에 맞서 싸울 병력 수만 명까지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일본정부를 당황하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3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고려 국서에서는 몽골에 대해 호의적으로 서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적어놓은 것이 바로 「고려첩장불심조조」로 이 문서는 해당 국서가 아니라 이 국서에 대한 의문점을 조목조목 적어놓은 문서라고 합니다. 
‘이번에 보내온 첩장에는 강화로 천도한 지 40년에 가까운데, 오랑캐의 풍속은 성현이 싫어하므로 다시 진도로 천도하였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는 강화에서 다시 진도로 천도하였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니 이는 고려정부가 도로 옮겨졌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고려정부는 실제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왕이 잇는 정부가 아니라 바로 삼별초세력으로 진도에서 승화후 왕온을 왕으로 받든 삼별초정부가 보낸 것입니다. 그럼 삼별초의 남은 세력은 이를 계기로 여몽연합군의 진압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갔을까. 

삼별초의 주요 격전지였던 전남 진도의 용장산성

하지만 오키나와에서 조금은 색다른, 하지만 우리와 익숙한 유물이 나옵니다. 그것은 이전에 오키나와에서 대여받은 13~14세기의 수막새 유물은데 수막새는 수키와가 이어진 처마끝을 장식하는 기와입니다. 그런데 오키나와로부터 대여 받은 유물이 우리나라의 13세기의 것과 비슷해 보였던 것입니다. 둥근 원 주위로 연꽃 잎들이 새겨졌고 테두리엔 연속적인 점 무늬가 있는 모습인데 이러한 유물을 확인할 수 있던 곳은 바로 진도 용장성, 바로 삼별초가 머물던 곳입니다. 그리고 이카나와에서 온 유물 중에서 암키와에는 이런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癸酉年高麗瓦匠造(계유년고려와장조)’.
이 문구는 ‘계유년에 고려의 기와 장인이 만들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계유년은 1273년을 가리키는 말로 바로 삼별초가 제주도에서 삼별초가 진압된 해이기도 합니다. 그럼 학계에서는 어떤 주장을 세웠을까. 바로 삼별초 세력이 제주도에서 모두 진압당한 것이 아니라 진도와 제주도에서 남쪽으로 배를 타고 떠났고 일부가 오키나와로 이동하여 정치세력을 형성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삼별초가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 사라진 시점부터 오키나와에서는 농경이 본격화되고 인구가 급속히 늘어났으며 곳곳에 큰 성이 축조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키나와에서 고려와 관련된 기와가 나왔고 이를 통해 삼별초세력의 일부가 오키나와로 유입되었을 것이고 그들에 의해 오키나와에서 새로운 역사의 바람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제주도에서 일본의 남쪽 끝에 위치한 오키나와의 거리는 700㎞에서 800㎞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섬의 면적은 제주도보다 조금 작습니다. 조선 후기의 문신 장한철은 1770년(영조 46년) 12월 25일 제주항을 출발하였다가 풍랑을 만나 조난당했는데 3일 만에 오키나와의 호산도에 도착했다고 하니 삼별초가 항해하다 오키나와를 마주하는 일은 어려운 일은 아니엇을 것입니다. 
 그럼 삼별초가 도착했을 당시 오키나와의 상황은 어땠을까. 오키나와에서 15세기에서 19세기까지 450여 년간 류큐국이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는 어떤 왕조의 흔적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통치체제를 갖춘 나라가 형성되었다는 것인데 학계에서는 이것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러한 고려식 기와가 나왔다는 것은 역사학자들로 하여금 여러 상상을 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삼별초의 오키나와 진출추정도

그럼 위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계유년은 1273년을 가리킨다고 했는데 다른 연도를 추정할 수 없을까. 사실 일본학계에서는 이 계유년을 1393년이라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고려사』에서 처음으로 고려와 유구국 사이의 교섭기록에 등장한 것이 유구국 중산왕 찰도가 사신을 파견한 1389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국내 한 역사학자는 이 때의 계유년은 1273년이며 다른 해로 보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기와를 만든 세력으로 삼별초를 지목한 것입니다. 만약 1389년이라면 고려장인이 원나라나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와에는 간지만을 기록했는데 삼별초가 외교문서에 간지만으로 연대를 표시했을 것이고 이러한 것인 오키나와의 기와에도 나타났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또한 1392년에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이 건국되었습니다. 소수정치집단에 의한 쿠데타적인 성격이 크므로 기술자 집단이 해외로 이주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또한 이러한 ‘계유년고려와장조’라고 새겨진 기와가 발견된 곳은 유구왕국의 발상지로 알려진 우라소에 성 북쪽에 왕실무덤 요우도레의 영조왕의 무덤입니다. 그리고 무덤의 주인인 영조왕이 재위기간이 1260년에서 1299년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1273년 고려의 기와 장인이 기와를 만들었고 1299년 사망하자 20여 년 전에 만든 기와를 만들 때 사용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궁금한 것이 바로 영조왕입니다. 이 영조왕은 1260년에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에이소 왕조가 시작하였습니다. 영조왕은 천손씨(天孫氏)의 후예로 알려 있는데 이 천손씨는 12세기 말 순텐왕조가 시작되기 전까지 유구국의 왕조라고 알려진 텐손(天孫)왕조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때 ‘천손’이라는 말은 바로 하늘의 자손이라는 말로 아무래도 무언가 꾸며낸 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신들을 신성시하기 위해 맞춘 것입니다. 즉, 이들 세력이 본래 외부세력인데 자신들은 신성시하여 천손이라 하였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였으니 그가 바로 영조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1260년일까. 이 때 고려에서 원종이 즉위한 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실제 원종은 즉위하면서 삼별초의 반대를 무릅쓰고 원나라 협상을 준비하였습니다. 만약 삼별초 세력이 오키나와로 왔다고 가정했을 경우 그들은 지금 현재 원나라와 협상을 벌이고 있는 고려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자신들이 진짜 고려의 정통성있는 것임을 내세우기 위해 워종의 즉위 연도인 1260년을 가져와 영조왕이 오른 것으로 조작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가설입니다.   
그러면서 당시의 유구국에 고려문화가 전파되어 전해져왔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령 오키나와에서는 13세기 무렵 들어선 성들은 ‘구스쿠’라고 부르는데 지형의 변화에 따라 성벽을 쌓는 빙식이 우리나라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축성법과비슷하며 오키나와의 전통씨름도 한국식 씨름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또한 오키나와 전통화장실은 제주도 전통화장실과 비슷한 구조라고 하는데 한쪽에 용변을 보는 변기가 있고, 바로 옆 공간에 돼지우리가 있어서 사람이 용변을 보면 돼지가 그 용변을 먹이로 삼는 것입니다. 정말 삼별초는 오키나와로 건너갔을까요. 고려는 1275년에 ‘제주도루인물추고색’을 만들어 제주에서 도망친 사람들을 추적하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고려정부가 붙잡은 삼별초 세력이 너무 적었기 때문입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