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이슬람교도 라마단

2022. 12. 21. 08:15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728x90

 

 

세계 3대 종교인 이슬람교,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현대의 대한민국사회에서도 이슬람교인들은 낯선 존재인데 교회나 절, 성당과 달리 이슬람사원은 극히 적고 신도라 하더라도 우리나라에 온 이슬람교 국가사람들일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럼 이보다 앞선 시대에는 이 땅에 이슬람의 흔적은 적다고 생각하지만 생각 외로 그 발자취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남북국시대의 신라에서는 처용이 아랍인, 경주 괘릉에는 서역인의 얼굴상에서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들이 이슬람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려초에는 이슬람은 회교(回敎), 또는 회회교(回回敎)라 했는데 고려초 팔관회에 회회교도가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신라 말기에 회교신자가 이 땅에 들어왔을 거라 짐작합니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면 이슬람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는데 고려 초기인 1024년과 1025년, 1037년 열라자와 하선을 비롯한 회회상인들이 100여 명씩 무리지어 개경에 와서 수은, 몰약(방부제), 소목(외과용 약)같은 진귀한 공물을 가져와 고려왕은 이들에게 후하게 대하고 답례품을 하사하였습니다. 이후 이슬람이 고려와 더욱 접촉할 수 있는 시기가 있었으니 바로 원의 간섭기입니다. 당시 이슬람인들은 몽골사회에서 색목인이라 불리며 몽골인 다음 가는 지위를 누렸습니다. 광활한 영토를 가진 몽골 입장에서는 당시 뛰어난 기술과 문명을 가지고 있었던 이슬람인들을 제국의 파트너로 삼은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몽골의 세계 지배에 이슬람인들이 동참한 것이었으며 아마 이러한 색목인 중에는 우리나라에 파견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고려시대 때 귀화한 이슬람인으로 덕수 장씨의 시조 장순룡이 있으며 그는 1274년 25대 충렬왕의 몽골비 제국대공주의 종관으로 고려에 왔다가 고려 여인와 결혼하여 세 아들을 낳았으며 원나라에 자주 사신으로 파견되어 사후 ‘공숙’이라는 시호도 받았습니다. 또한 경주 설씨의 시조인 설손은 본래 중국 신장 위구르 출신으로 홍건적의 난을 피해 망명 왔는데 원에 인질로 잡혀갔을 당시 공민왕과 친분을 쌓았고 귀화한 뒤에는 고려의 대표적인 시인이 되었습니다. 이들 이슬람인들이 고려사회에서 생각보다 깊이 들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쌍화점』이라는 고려가요에서는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쌍화’는 상화(霜花)떡으로 무슬림 고유의 빵(만두)으로 보고 있는데 “쌍화점에 쌍화를 사러가니 회회아비가 내 손목을 쥐었다. 이 소문이 상점 밖에 퍼진다면 새끼 광대인 네가 퍼뜨린 것인 줄 알리라“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고려인 이슬람교도 라마단 묘비석

고려시대에도 이슬람사람들이 들어왔으니 중국은 이보다 빨랐을 것입니다. 중국에서 이슬람사원이 세워진 것은 7세기로  회성사(懷聖寺)입니다.  ‘마호메트를 마음속에 품고 그리워한다’는 의미의 이 사원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고려인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14세기에 살다간 고려인 ‘라마단(刺馬丹)’이라는 묘비가 있는 것입니다. 그 묘비는 높이 62cm, 폭 42cm, 두께 6.2cm 크기로 정면에는 이슬람 경전인 ‘코란’ 제2장 255절을 인용한 아랍어가 크게 새겨져 있고, 좌우측에는 한자가 작게 새겨져 있습니다. 우측면에 있는 한자 기록은 이렇습니다. 
‘대도로 완평현 청현관 주인인 라마단은 고려 사람이다. 나이 38세다(大都路宛平縣靑玄關住人, 刺馬丹, 系高麗人氏. 年三十八歲·대도로완평현청현관주인, 라마단, 계고려인씨. 연삼십팔세).’
그리고 비문에서 전하는 내용은 이렇습니다.
‘1312년(고려 충선왕 4년)에 알라웃딘의 아들로 태어난 라마단은 북경(北京) 남쪽의 청현관(靑玄關)이란 저택에 살다가 1349년(고려 충정왕 1년) 광서도(廣西道) 용주(容州) 육천현(陸川縣)을 다스리는 다루가치(達魯花赤·지방통치관)에 임명됐다. 그해 3월 22일 숨졌다.’
그럼 라마단이란 고려인은 누구일까. 그리고 비문의 내용처럼 그는 어떻게 원나라의 관리가 되었으며 고려 땅이 아닌 중국 땅에 묻히게 된 것일까. 
비문에 보이는 대도 완평현은 베이징에서 15㎞ 정도 떨어진 외곽 완핑청 일대라고 합니다. 이 곳은 원나라 수도에 속한 현으로 정치, 군사, 경제적인 측면에서 다른 일반 현보다 그 위상이 높은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전해오는 말로 고려장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해당 지역의 옛 이름이었습니다. 지금도 나이 드신 주민들은 사용하는 이 말의 존재로 보아 이곳에 예전에 고려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살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옛 기록에 의하면 고려인 김백안찰이라는 사람이 완평현에 김손미타사라는 절을 세웠다고 하니 고려인이 이곳에 거주한 것은 어느 정도 사실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리고 비문에는 그가 ‘광서도 용주 육천현 달로회적’이라 하였으니 이는 그는 몽골인이 아닌 고려인으로서 지방감독관인 다루가치의 벼슬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그가 파견된 육천현은 광시좡족자치구 루촨현이며 이곳은 당시 베트남을 견제하기 위해 군사시설을 강화한 곳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동남아시아로 나가는 무역거점이기도 했는데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던 이곳에 고려인 라마단을 파견하였다면 원나라조정은 그를 엄청 신뢰했을 것입니다. 
그럼 라마단은 어떻게 고려인으로 무슬림이 될 수 있었을까. 고려사회는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사회로 무슬림에 대해 배타적이지 않았고 그것은 위에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비문에서는 알라웃딘의 아들이라고 적어놓았으니 아마 그의 아버지도 무슬림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무슬림이 되는 데에는 크게 이상할 것이 없었습니다.  

라마단 묘비가 출토된 이슬람교도 옛 묘역 청전센셴구무

그리고 그의 묘비가 확인된 곳은 중국 관둥성 광저우시의 청진선현 고묘 부근으로 이곳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 묘역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도로확장공사를 하는 와중에 여러 묘비가 발견되었고 그 중 고료인 라마단의 것도 발견된 것입니다. 라마단의 집은 베이징의 완평현이고 그가 다루가치로 활동한 곳은 루촨현이며 묻힌 곳은 광저우입니다. 라마단은 연고지가 아닌 왜 광저우에 묻히게 된 것일까요. 당시 이곳은 회성사라는 곳을 중심으로 무역이 성행하였으며 이슬람상인들은 이곳을 중심으로 집단촌락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회성사의 광탑은 무역선을 인도하는 등대의 역할을 하였으니 이런 거대 제국의 무역도시에 분명 고려의 선박들도 드나들었을 것입니다. 당시 원나라의 해안도시들은 해양실크로드의 거점이자 이슬람무역특구였고 광저우도 라마단에게 낯선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아니 이곳은 중국 최대의 이슬람 성지였습니다. 이미 당나라 때에 와카스라는 사람이 이곳에 모스크를 세우고 이슬람교를 전파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당나라 시기에 당나라상인은 물론 사라센과 페르시아상인, 유태인 상인들이 몰려와 상업과 무역활동을 하였고 아랍인들은 집단으로 이곳에서 살기도 했습니다. 
‘“大食波斯賈胡死者數千人”(대식과 페르시아 상인 수천명이 죽었다), “殺商胡波斯數千人”(상인과 페르시아인 수천명을 살해했다)’
당 말기 이 곳에서 폭동을 일으킨 아랍, 페르시안인들로 구성된 해적이 반당세력이던 전신공이란 사람이 양저우에 쳐들어가 학살했다는 내용이며 광저우와 양저우가 거리가 멀다 하더라도 이들이 광저우에 들어가 해적질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그들이 수천명 제거되었다는 점에서 당시 중국 해안일대에 살았던 아랍인들의 숫자가 결코 적지 않았고 당나라 시기의 광저우에 이미 모스크사 세워졌다고 하니 고려인 라마단이 이 곳으로 성지순례를 오고 무역을 하러온 고려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또한 『조선불교통사』에서는 회회(回回) 대조회(大朝會) 송축지예궁(頌祝禮宮)이란 문장이 있는데 이는 고려의 개경에 회회인들이 예배를 드리는 예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슬람사원이 고려의 개경 안에 있을까 학자들도 궁금해 했지만 라마단의 사례로 보아 이 기록은 사실일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