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긍이 전하는 고려의 모습 고려도경
2022. 12. 19. 08:12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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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의 사신 서긍은 1123년 고려를 다녀오면서 『선화봉사고려도경』이라는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이 책은 일종의 견문록이자 보고서로 12세기 고려의 모습을 생생히 전하고 있는 책으로 『고려도경』이라고도 불리는 책입니다. 서긍을 이 책을 송황제 휘종에게 받치면서 한 부도 자신의 집에 소장하였는데 두 부 모두 없어졌다가 1137년 장시성 난창현에서 하나가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책은 그림은 없어지고 글만 있던 상태였지만 지금에 이르러 고려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려도경』에서 전하는 고려의 궁궐은 당시 고려가 스스로를 황제국으로 여기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서긍이 다섯 개의 문(광화문, 승평문, 신봉문, 창합문, 회경전문)을 지나야 궁궐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인데 조선은 황제국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던 이유로 궁궐에 도달할 때 세 개의 문을 지나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려 궁궐은 궁궐을 둘러싼 궁성이 있고 그 궁성을 다시 황성이 보호하는 이중구조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보이는 표현 황성인데 황성을 쌓았다는 것은 고려가 황제국을 지향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고려의 회경전 서쪽에는 수만권을 소장한 도서관 임천각이 있었으며 뒤 쪽으로는 황실재산을 보관하던 장화전 등을 포함한 건물 수십 채가 있었다고 전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하남시에는 마애약사불좌상이 있는데 이 불상 옆에는 ‘태평2년에 황제의 만세를 기원하기 위해 불상을 다시 고친다‘라는 명문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4대 임근 광종 역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서긍이 기록한 고려는 고려 사람들이 선비를 귀하게 여기므로 글을 읽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부끄럽게 여겨 민가에서 끊임없이 글 읽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 점입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물론 군졸까지 글을 배우는 고려인들의 모습을 배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당시 고려는 학문이 크게 일어나던 시기로 광종은 과거시험을 도입하여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열어 놓았으며 성종 대에는 유학 교육의 진흥을 위해 국자감을 정비하고, 지방에 유학을 교육하는 경학박사와 의료를 담당하는 의학박사를 파견합니다. 한편 과거제를 정비하고 과거 출신자들을 우대하여 유학에 조예가 깊은 인재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유도한 바 이를 통해 고려 내에서 배움의 바람이 크게 일어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재밌는 것은 “옛 사서에 따르면 고려의 풍속은 사람들이 모두 깨끗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그들은 항상 중국인이 때가 많은 것을 비웃는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한 뒤 집을 나서며, 여름에는 하루에 두 번씩 목욕을 한다. 흐르는 시냇물에 모여 남녀 구별 없이 물굽이에 따라 속옷을 드러내는 것을 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라고 기록을 남겼습니다. 서긍은 고려인 남녀가 서로 아무렇지도 않게 함께 목욕하는 것을 기록하였으며 또한 ‘고려의 풍속을 살펴보니, 고려 사람들은 색을 밝히는 편이며 쉽게 사랑하고 남녀 혼인에서도 가볍게 합치고 헤어진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에 있어서는 고려가 상당히 개방적이면서 가벼이 여겼다는 것을 서긍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당시 고려조정에 있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는데 이자겸에 대해 “참소를 믿고 이득을 즐기며 집에 썩는 고기가 수만 근”이라며 한탄했으며 반면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에 대해선 “장대한 체구에 얼굴은 검고 눈이 튀어나왔다. 두루 통달하고 기억력도 탁월하여 글을 잘 짓고 역사를 잘 알아 학사들에게 신망을 얻는 데에는 그보다 앞선 사람이 없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훗날 난의 주인공이 되는 이자겸에 대해서는 송나라 사신이 보기에도 평가가 좋지 않았던 것입니다.
, “백성들이 거주하는 형세가 고르지 못하여 벌집과 개미구멍 같다. 풀을 베어다 지붕을 덮어 겨우 비바람을 막았는데, 집의 크기는 서까래를 양쪽으로 잇대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부유한 집은 다소 기와를 덮었으나, 겨우 열에 한 두 집뿐이다.”
“고려는 본래 귀신을 두려워하여 신봉하고, 음양에 얽매여서 병이 들면 약은 먹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 같이 아주 가까운 친척이라도 서로 보지 않고 저주와 압승(壓勝)을 알 뿐이다.”
백성들이 삶이 척박하고 아무리 옛날의 일이지만 송나라 사신이 보기에도 고려사람들은 미신에 많이 의존한 것처럼 적어놓았습니다. 물론 이 기록이 그가 숙소 밖을 나가 본 것이 5∼6차례뿐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가 고려의 풍속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서술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만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따라서 서긍이 직접 보고 쓴 기록을 참고하는데 있어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고려인은 평상 위에 작은 소반을 놓고 구리 그릇에 어포, 육포, 생선, 채소 등을 섞어 내놓지만 풍성하지는 않다. 술 마시는 법도에는 절도가 없고 다만 여러 번 주고받는 데만 힘쓸 뿐이다.’
당시 고려사람들은 오늘날의 우리처럼 술주고 받는 데에 있어 빼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상차림이 풍성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인들의 풍습인지 아니면 다소 넉넉지 않은 고려인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것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겨야 할 것 같습니다.
‘자기가 통솔하지 않는 부서의 관원을 만나거나 오래 서로 보지 못한 관리와 병졸들은 어디에서 만나건 반드시 배례를 한다. 남에게 인사를 받고 답례하지 않으면 인사한 사람에게서 공경을 잃는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고려사람들이 인사예절을 중히 여겼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도 인사예절은 중요한데 당연해 보이는 이러한 모습을 서긍의 기록에 나타난 것을 보면 주변국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어쩌면 송나라사람으로서 이렇게 예의를 지키는 고려인의 모습에 대해 깊게 감명을 받아 기록을 남겼을 수도 있습니다.
‘고려의 정치는 매우 어질어 부처를 좋아하고 살생을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국왕이나 재상이 아니면 양과 돼지고기를 먹지 못한다. 또한 도살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다만 사신이 방문하면 미리 양과 돼지를 기른다.’
고려의 식생활에 대해서는 불교의 교리를 따라서 육식을 피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도살하는 데 서툴러서 고기 요리에서 고약한 냄새가 난다고 기록했으니 실제로 고기에 대한 수요가 적었나 봅니다.
‘관비들은 어깨로 짐을 다 멜 수가 없으면 등 뒤에 진다. 그러나 매우 빨라 남자들도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
관청에 속한 여자노비들의 고된 삶을 전하고 있는데 힘든 노동을 짊어져야 했던 고려 여성노비들의 삶이 서긍의 눈에 서글퍼보였을 것입니다.
"고려왕실의 조상이 고구려의 대족(귀족)"이라고 언급했으니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국으로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할 수 있는 명백한 사료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려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담은 『고려도경』은 서긍의 개인적인 기록물이라기보다는 당시 송, 요, 금이 대치하고 있었고 송은 고려가 요나라와 친하게 지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고려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서긍은 송나라에 있던 고려관련서적을 섭렵한 후 고려로 들어와 실상을 기록한 것입니다. 아마 한 달간의 짧은 일정에 고려에 대한 많은 정보를 담아야 했던 이유는 『고려도경』이 바로 황제에게 받칠 보고서였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림이 없어 글로만 전해지지만 그것만으로도 당시 송나라사람이 본 고려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자료이며 특히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고려사』가 멸망하고 난 뒤의 자료라면 『고려도경』의 당시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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