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2022. 12. 17. 08:11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728x90

 

원나라와 고려 연합군이 군함을 이끌고 두 차례 일본 정벌에 나섰어요. 그때 엄청난 태풍이 불어닥쳐 연합군 배가 침몰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13세기 중반 고려왕조에서는 한반도 역대 국가에서 드물게 해외원정을 단행하였습니다. 그것은 일본원정, 하지만 그것은 몽골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삼별초의 난을 진압한 고려정부와 몽골은 일본으로 향했습니다. 1266년 몽골은 일본과 교류를 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습니다. 
"상천권명(上天眷命) 대몽골국 황제 편지를 일본 국왕에게 드린다. 일본은 고려와 가깝고 중국과도 통했다. 앞으로는 안부를 서로 전하고 교류를 맺어 서로 친목하자 또 성인(聖人:쿠빌라이)은 사해로서 집안을 이룬다. 서로 통호(通好)하지 않으면 어찌 일가를 다스리겠는가? 병사를 사용하게 되는 것을 대저 누가 좋아하겠는가? 왕은 이것저것을 살펴라. 불선백(不宣白)"
 당시 가마쿠라 막부는 쿠빌라이의 편지를 오만불손한 것으로 여겼으나 편지의 내용은 그것보다는 정중하게 청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실권자인 호조 도키무네는 이 친서를 무례한 것으로 간주했고 당시 천황의 세력은 약화되었기 때문에 천황가가 쿠빌라이와 손을 잡고 재기를 노린다는 것은 막부 입장에서는 골치아픈 일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일본을 노렸던 것인지 아니면 일본의 무응답에 화가 났던 것인지 쿠빌라이는 일본 원정을 준비했고 그 몫은 고스란히 고려가 떠안았습니다. 1274년 10월 3일 4만 명의 여몽연합군이 일본으로 충발했고 10월 6일에는 쓰시마섬을, 14일에는 이키섬을 점령하며 20일에는 규슈에 상륙과 일본과의 전투를 벌였습니다.
‘하카타 해변에서 왜병이 공격하자 김방경이 활을 쏘며 소리쳤고 왜병이 놀라 달아났다.’ 『고려사』
‘전투 개시 신호로 활을 쏘니 몽골군이 북을 치며 징을 울리며 폭죽철포를 발사하며 일제히 와 하며 함성을 질렀다. 그 소리에 일본군의 말들이 놀라 어쩔 줄 몰라했다.’ 「하치만구도키」

몽고습래회사는 2권의 두루마리로 구성된 일본 가마쿠라 시대 후기의 그림

일본은 몽골의 서신을 무시해놓고 전쟁준비는 제대로 하지 않은데다가 사무라이 전투방법을 고수해온 일본입장에서는 집단전투를 걸어온 여몽연합군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려장수 김방경은 계속 싸울 것을 주장했지만 몽골군 흔도는 회군을 명령했고 21일에는 흔히 ‘가미카제’라 불리는 태풍의 영향으로 여몽연합군의 선박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1281년 몽골은 다시 일본에 대한 2차 원정을 단행했습니다. 당시 충렬왕은 정동행중서성의 승상으로서 원정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약 4만 명의 병력으로 900척의 배는 일본으로 향했습니다. 이들은 동로군이라 하는 고려군대였습니다. 하지만 여몽연합군의 1차 원정 이후 만반의 준비를 해놓은 일본을 상대로 쉽사리 공격을 진행할 수 없었습니다. 이후 중국 남부에서 출발한 강남군 약 10만 여명이 3500척의 배에 몸을 싣고 일본으로 왔습니다. 이 군대는 몽고에 투항한 남송장수 범문호가 이끄는 부대였습니다. 동로군과 강남군은 서로 만나 원정을 진행했지만 또 폭풍우를 만나 10만 명이 익사하거나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일본에 대한 원정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태풍으로 인한 실패였지만 비단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관군(官軍)이 정돈되지 못하고 화살이 다 소모되었다" 『원사』
대대적인 해외원정을 준비하면서 식량과 화살이 다 소진되었다는 것은 폭풍우의 영향이 커보입니다. 10월 3일에 시작한 1차 원정이 불과 17일 만인 20일 만에 폭풍우를 만나 그 다음 날에는 일본에 패하고 맙니다. 하지만 3달치의 군량을 가지고 왔다고 하는데 아마 10월 20일 전에 폭풍우를 만나 군수품 상당히 소실하고 전의를 상실하여 철수명령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항해 중에 물자를 소실했을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이 원정이 과연 일본 정복을 목표로 한 원정이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드는데 병력이 4만 정도였기 때문이고 당시 남송에 대한 정복이 이루어지지 않은 점으로 보아 일본에 대한 몽골의 원정은 아마 겁만 주려고 왔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한 모습은 몽골장수 흔도가 철수를 명령했다는 점에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럼 2차 원정은 어땠을까. 1279년 남송을 정복한 몽골은 일본에 대한 정벌을 다시 명령합니다. 그런데 고려에서 출발한 동로군과는 달리 중국에서 출발한 강남군이 문제였습니다. 이들 대다수는 몽골에 투항한 남송군으로 이루어졌는데 일본에 장기적으로 머물 목적으로 경작도구까지 챙겨갔다고 합니다. 정예병이라 보기 어려우며  전의를 상실한 채 일본에 도착한 강남군은 아마 싸우기도 전에 투항한 사람이 대다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1차 원정 때처럼 폭풍우가 들이닥치기도 했고 지원병부대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도 미지수입니다. 


그럼 당시 여몽연합군의 무기와 전투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철포를 발사하여 그 화염 때문에 앞을 분간하지 못했고 폭발음이 너무 커서 혼비백산, 눈이 어지럽고 귀가 울려 망연자실, 동과 서를 구분하지 못했다.’ 
마치 수류탄을 연상케 하는 이 무기로 일본군을 혼란에 빠뜨렸으며 220cm에 이르는 장궁에 비해 120cm의 단궁을 사용한 연합군 측의 사정거리는 일본의 활보다 사정거리도 훨씬 길었고 관통력도 월등했습니다. 
‘원나라의 전선들은 모두 돌풍에 깨졌으나 고려의 전함은 대부분 무사했다.’ 『원사』
당시 고려에서는 몽골의 명령으로 불과 4개월 만에 대선 300척, 중형선 300척, 보급선 300척의 배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배는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었으며 일본에 기록에 따르면 고려군함은 뱃머리에 철로 뿔을 마들어 적의 배를 들이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고려의 군함은 길이가 35m가 넘기도 했으며 약 3천석에 달하는 군량미를 실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횡단하기 위해 만든 산타마리아호가 대략 그 정도의 규모인데 고려는 이보다 수백년이 앞서 그 정도 규모의 선박을 만든 것입니다. 이러한 고려의 배는 들어온 물을 퍼내는 장치가 있었으며 배를 처음 건조할 때 밑바닥에 돌로 채워 무게의 중심을 잡았습니다. 이러한 것이 일본원정에 정박해있던 고려의 배들이 원나라의 전함에 비해 손실을 입지 않고 무사했던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기록에서는 ‘입화석타(入火石打)’란 기록이 보입니다. 고려 전함은 돌에 화약을 넣어서 이를 이용하여 적선에 타격을 가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화약의 사용은 최무선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다릅니다. 또한 고려군함에서는 적선을 향해 날아가는 불화살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일본 원정때 사용된 것인지는 속단할 수는 없습니다. 이후 1380년 진포해전에서 화포를 이용하여 왜구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선박에 화포를 설치하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일단 이러한 무기를 실을 수 있고 이를 견뎌야 하는 배의 무게가 있어야 하고 화포가 발사했을 때 이를 견딜 수 있어야 하며 또한 포를 발사할 때 배를 향하도록 하는 기술도 필요하니 화포가 일본원정 때 사용되었던 아니던 간에 적어도 이 시기에 고려는 이미 상당한 수준의 조선술과 항해술을 갖고 있었음은 분명합니다. 
여몽연합군의 기록이 적은 가운데 일본에서는 ‘몽고습래회사’ 즉 원나라의 일본 원정 다시 원정군과 일본 무사들과의 싸움을 그림과 글을 기록한 것이 남아 있습니다. 이 때 송나라에서 발명된 화약이 사용된 모습도 있는데 이 전투에 참여한 다케자키 스에나가의 주문에 의해 그려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그림에는 폭풍우로 인해 전세가 역전하는 모습도 전하고 있으며 14만 명이 동원된 2차 원정의 모습도 전하고 있습니다. 이 때도 폭풍우로 인해 이를 막아냈다고 전하는데요. 결과적으로 객관적인 전력상 우위에 있던 여몽연합군이 이 전쟁에서 패하게 되고 쿠빌라이 칸은 3차 원정을 준비했으나 1294년 사망하여 중단되었으며 이 원정의 여파로 일본은 전쟁비용을 부담한 고케닌 계층이 몰락하여 가마쿠라 막부가 몰락하고 무로막치 막부가 성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