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에 침입한 왜구는 누구인가.

2022. 12. 15. 08:10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728x90

 

고려말 왜구들의 침략은 왕조를 위태롭게 할만큼 거셌습니다. 아마 후세의 역사가들 중 일부는 고려가 망하게 된 이유로 왜구들의 노략질을 들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고려말 우리 백성들을 괴롭혔던 왜구들의 침략은 비단 고려에게만 해당되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신라 문무왕은 자신이 죽은 뒤 유해를 바다 가운데 묻어달라고 당부하며 자신이 호국의 용이 되어 왜구를 막아내겠다는 유언을 남깁니다. 
이러한 왜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오직 우리나라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 우리나라에서는 대마도를 근거지로 둔 해적으로 동아시아 바다 일대를 제 집 드나들 듯이 하며 공포의 해역으로 만든 집단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이러한 왜구에 대해 북한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동남아시아 여러 해안들에 싸다니면서 노략질을 일삼던 일본 해적의 무리”로 인식하고 중국 쪽에서도 “원조 말기와 명조 초기에 중국의 연해지구를 침략한 일본의 사무라이, 상인과 해적들”이라고 했으니 왜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한반도와 대륙이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왜구를 일본인외에도 조선인도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14세기 중반 이후에는 대부분의 구성원이 중국인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외교나 무역에서 마찰이 있을 경우 어쩔 수 없이 일어난 경제해적이라 하면서 고려와 중국 내에서 차별을 받았던 반국가적인 집단으로 해적이라기보다는 봉건국가의 억압에서 벗어나고자한 저항세력이라고 주장합니다.

왜구가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것은 13세기에서 16세기경,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이 실패하고 원명교체기와 요말선초의 시기였습니다. 일본도 극심한 분열과 혼란을 겪으면서 많은 유민이 생겼고 식량기근이 극심한 때이기도 했습니다. 일본의 고전문학 [태평기]에서는 일본과 고려, 중국의 혼란기에서 왜구의 출현의 원인을 찾았으며 남북조 시기 급격하게 증가한 산적과 해적들이 원나라와 고려의 해안가로 쳐들어가 재물을 탈취하고 사원과 관청을 불태웠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들 왜구는 가까운 고려와 중국의 해안가에 자주 출몰했지만 동남아시아의 말레이시아, 베트남, 필리핀 마닐라 앞바다까지 출현하였으니 그야말로 동아시아의 골칫덩이였습니다.  
그럼 왜구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도쿄대학 사료편찬소에 소장된 「왜구도권」에서는 왜구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는데 머리를 틀어 올린 왜구는 아랫도리를 벗은 채 칼이나 창을 휘두르며 방화와 약탈을 하고 있는 모습니다. 16세기 명나라 해안가에 출몰한 왜구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고려에 나타난 왜구도 이와 비슷했을 것입니다. 한편 『고려사』 열전에는 1380년 황산대첩의 왜구장수 아기발도를 묘사한 문장이 있는데 “견고한 갑옷에 얼굴에는 동면구를 쓰고 있어 화살이 박힐 틈이 없다.”라고 적어놓았습니다. 이와 더불어 다른 왜구 장수에 대해서는 큰 쇠투구를 쓰고 손과 발을 모두 덮는 갑옷을 입었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일본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는 14세기 무장들의 복장과 거의 일치한데 견고한 갑옷에 얼굴을 보호하는 마스크, 거기에다 보호대를 각각 끈으로 연결한 모습은 화려하고 위엄이 있어 보입니다. 우리는 왜구를 당시 주변의 바다 일대를 어지럽힌 해적 정도로 인식하고 있지만 이렇게 묘사된 그들의 복장은 결코 해적의 수준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왜선 500척이 침입했다.’ 『고려사』
왜선 500척은 과연 고깃배 수준이었을까. 조그만 어선을 500척을 모아 해적질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14세기 일본 남북조 시대의 배 견명선은 한 척에 13~14명 정도 탈 수 있고 최소한의 인원으로 10명이라 계산하더라도 500척이라면 5000명 정도의 병력이 됩니다. 또한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격파하고 얻은 말들이 1600필이었으니 이들과 함께 온 보병들은 더 많았을 것입니다. 병력규모만 본다면 단순한 도적떼로 보기는 힘든 숫자입니다. 게다가 보병과 기병과 함께 했으니 이들은 해적보다는 정규군이 가깝습니다. 따라서 왜구는 글자 그대로 일본의 해적떼가 아닌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사단급의 군대였습니다. 
왜구는 왜 출현했을까. 왜구가 주변해역에 극심하게 출현했던 시기에 일본은 남북조시대였습니다. 천황가는 둘로 나위었고 그에 따라 교토의 코묘 천황(북조)과 요시노 고다이고 천황(남조)으로 나뉜 것입니다. 그에 따라 무사집단들도 분열되었으니 이들간에 갈등은 엄청난 희생을 나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는 엄청난 물자가 뒤따라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원이 일본 내에서 이루어지는 게 한계에 이르게 되자 무사들은 약탈하러 밖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투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본의 영주들과 왜구들은 고려에서 물자를 들여와 해결했으니 그 방법은 결국 약탈이었습니다. 일본의 남북조 시대가 장기화되었고 일본의 거의 모든 세력들은 무장이 되어 있었는데 고려의 지방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군수물자 획득을 목적으로 고려말 쳐들어온 왜구는 정예부대였으며 상대적으로 군사적으로 취약했던 고려의 변방지역은 일본의 전문적인 무사집단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고려는 건국초기부터 중국의 북방유목민족들과 자주 전투를 벌여왔습니다. 따라서 고려는 국방력의 대부분은 북방에 집중했고 군사전술 또한 북방유목민족들과 상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고려는 북방의 적들을 상대해야 하는 와중에 전혀 새로운 형태의 전문적인 군대와 맞닥뜨리게 되었고 따라서 그에 대한 방비가 부족했던 터라 피해가 더욱 커졌습니다. 

이러한 왜구의 침략은 전쟁에 쓰일 물자조달이 1차적인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고려의 세금이 모이는 조창이 공격대상이 되었습니다. 왜구의 침입이 활발해지기 전에는 고려의 조창은 해안가에 있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러한 곳이 왜구들의 공격대상이 되자 고려에서는 조창을 내륙으로 옮기게 되었고 이는 왜구들이 조창을 찾아 깊숙이 침입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377년에는 조운선이 들어가는 길목인 강화부가 함락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왜구의 약탈은 조운선의 쌀과 재물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여자들을 겁탈하거나 방화를 저지르는 것은 예삿일이었고 겁탈에 저항하는 완산부의 임씨부인을 팔과 다리를 자른 뒤 살해하는 등 최악의 잔인성을 지닌 집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왜구는 겁탈과 살인, 방화에만 그치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을 잡아가 노예로 팔거나 배의 노를 젓거나 고려와의 전투에 동원하였습니다. 
이러한 왜구의 침략에 고려는 외교적인 문제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왜정부가 규슈의 왜구를 토벌하려 하자 이로 인해 발생한 전쟁에 필요한 군량미와 군자본을 충당하기 위해 다시 고려에 왜구가 출현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습니다. 고려가 이에 계속 항의하자 여몽연합군의 공격으로 무역로가 끊겨 발생한 일이라며 왜구의 침략에 대한 근본 원인을 고려에 돌렸습니다. 
이러한 왜구의 침략은 14세기 한국문화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고려말 왜구의 침략 이전에는 고려왕조는 원나라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느라 국가재정은 악화되었고 여기에 더해진 왜구의 침략은 고려를 더욱 힘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왜구들의 침략은 일본사회에서 용인된 것으로 그 세력이 더욱 커졌으며 고려 우왕 때에는 3백 74번이나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고려가 금과 은을 몽골에 공물로 바치느라 바닥났는 걸 알았는지 비단, 도자기, 회화 등을 훔쳤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우리나라 문화재들이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당시 일본의 불교문화는 보잘 것 없었는데 당시 중국에서도 흉내내기 어려웠던 고려불화도 왜구들의 손에 넣어져 넘어갔습니다. 특히 고려불화를 포함한 불교문화재는 고려장인들의 재주와 금과 은으로 치장된 것들이어서 값비싼 것이었고 왜구들은 이를 약탈하여 고스란히 그들의 불교의식에 써왔습니다. 
그리면서 당시 고려는 이러한 왜구를 퇴치하기 위해 수군을 양성했으며 지방군을 정비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화포가 개발되었고 이성계와 같은 신흥무인세력이 성장하였습니다. 왜구의 출현으로 고려는 국방력을 강화시켰지만 조선으로 넘어가는 역사의 페이지를 붙잡지 못했으며 왜구의 출현은 이러한 시대 흐름에 기폭제 역할을 한 셈입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