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왕은 공민왕의 아들이 맞을까.

2023. 4. 6. 09:36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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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다른 나라의 왕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우리나라 역대 왕조들의 왕들에게 중요한 일 중하나는 바로 아들을 낳아 자신의 왕위를 이어받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어느 한 시점의 왕이 선대 왕의 아들 혹은 정당한 후계자 자격으로 왕위로 올랐는지 의심받는 상황이 일어나기도 하고 간혹 이러한 의문이 더욱 커지게 되면 왕권이 위태로워질 수 있고 급기야는 왕조도 바뀔 수 있는 문제로 커지기 마련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이러한 의구심을 갖게 한 왕이 있습니다. 바로 우왕입니다. 우왕은 고려의 제 32대 국왕으로 공민왕의 아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에게 갖는 물음표는 바로 ‘우왕이 진짜 공민왕의 아들이 맞는가?’하는 것으로 이를 달리 말하면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 아닌가’라는 물음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는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설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어 왔습니다. 우왕과 관련된 역사서에서 우왕이 신돈의 아들로 기술하였으며 따라서 왕우, 왕창이 아닌 신우, 신창이 된다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고려사』에서는 왕의 일대기를 다룬 <세가>가 아닌 반역자의 일대기를 다룬 <반역열전>에서 우왕을 다루고 있습니다. 
‘공민왕에 이르러 불행히도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셨다. 적신 이인임이 정권을 마음대로 하고자 하여 나이 어린 얼자를 기어이 세워 신우를 왕씨라고 거짓으로 일컬어 왕으로 삼았었다. 우가 완악하고 패악스러워서 장차 요양(遼陽)을 침범하려고 하므로, 시중 이(태조의 옛 이름) 등이 사직의 큰 계책으로 많은 사람을 타일러 회군하여 왕씨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주장 조민수가 이인임의 당으로서 다시 권병을 마음대로 하여, 그 간사한 꾀를 계승해서 마침내 여러 사람의 의논을 저지하고 우와 아들 창을 세우니, 왕씨의 종사가 끊어져 신과 사람이 다 같이 분노한 지 16년이 되었다. (중략) 우와 창 부자를 폐하고 내가 왕씨로서 가장 촌수가 가깝다 하여 나로 하여금 대통을 계승하게 하였다’ 『고려사절요』
이 역사기술은 공양왕 1년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공양왕이 즉위하게 된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글에서는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아들과 손자이므로 쫓아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왕과 창왕이 왜 공민왕이 아들이 아닌 신돈의 아들이라는 것일까. 신돈이 낙산사의 관음보살이 영이하다하여 오일악을 시켜 비밀리에 축원문을 쓰게 했는데 이때 모니노를 자신의 분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모니노가 신돈의 비첩 반야의 소생으로 그가 바로 우입니다. 당시 공민왕이 대 이을 아들을 구하기 위해 양자를 세우려고 했는데 신돈의 집에 가니 아이가 있는 것을 보게 되었고 신돈은 공민왕에게 이 아이를 양자삼아 왕위를 잇게 해 달라고 권유합니다. 그리고 이를 공민왕이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편 『고려사절요』에는 이와 관련하여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가 일찍이 신돈의 집에 가서 시비와 관계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그 아이를 놀라게 하지 말고 잘 보호하라.”하였다.’ 『고려사절요』


공민왕은 신돈의 집에 잇던 시비인 반야와 관계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모니노였고 이를 이인임에게 말해주었다고 합니다. 이후 이 아이가 공민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니 그가 바로 우왕입니다. 그런데 신돈의 비첩 반야가 신우가 왕이 되자 “임금의 어머니다.”하였다고 하니 이에 인임 등이 거짓으로, “우는 현릉이 사랑했던 죽은 궁인의 소생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궁인을 찾지 못했는데 이에 대해 우사 김속명이 “천하에 그 아버지를 분별하지 못한 자는 혹시 있을 수도 있지마는, 어찌 그 어머니를 분별하지 못한 자가 있겠는가.”하고 비판하였다고 합니다. 만약 우왕이 궁궐 안에서 후궁이나 궁녀에게서 태어났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는 숨길만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만약 반야가 정말 우왕의 어머니라면 우왕은 신돈의 집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특히 공민왕이 신돈의 집에 가서 반야와 관계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정말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우왕이 진짜 공민왕이 아들인가 더욱 의문이 드는 것은 바로 그가 성장하고 왕위를 잇게 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1365년에 태어난 그는 신돈이 죽은 이후에 궁궐에 들어가 1373년 우라는 이름을 얻었고 강령부원군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년 뒤에 공민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니 아무래도 무언가 급하게 왕의 후계자가 되고 이어 왕위에 올랐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든 부분입니다. 
‘내가 일찍이 영전을 부탁할 사람이 없음을 염려하였는데, 비가 이미 아기를 배었으니 내가 무슨 근심이 있으랴.’ 『고려사절요』


이 이야기는 공민왕이 아들이 없음을 이전에 걱정했다는 말로 이 기사가 1374년의 일이니 당시 이미 우는 세상에 나온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후사를 걱정했다는 것은 당시 공민왕이 후계자로 우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당시 공민왕의 후궁인 익비가 홍륜과 관계하여 아들을 낳게 하자 공민왕은 배 속의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만들기 위해 홍륜을 없애기로 합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안 홍륜이 왕의 시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공민왕은 사람들이 후사가 없음을 걱정하는 것을 알았고 이를 홍륜 등으로 하여금 후궁들을 임신하게 만들어 후사를 얻고 공민왕이 아닌 다른 사람의 아들을 왕위로 내세우면서 그를 자신이 낳은 아들로 만들기 위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제거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민왕은 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후궁을 임신하게 만들었을까. 그가 바로 여색을 좋아하지 않는 동성애자였기 때문입니다. 공민왕은 노국공주를 사랑했지만 그와 동침하는 일이 적었고 노국공주가 죽고 나서는 더 심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공민왕은 스스로 화장하고 부인의 형상을 하면서 내비(內婢) 중 젊은 자를 방 안에 들여 보자기로 그 얼굴을 가리고는 홍륜의 무리를 불러 이를 간음하게 하고 왕 자신은 옆 방에서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생기면 홍륜의 무리를 침실로 끌어들여 그 형상대로 따라했다고 합니다. 특히 공민왕은 자제위를 설치하니 나이 어리고 얼굴이 아름다운 자를 뽑아 여기에 소속시키고 왕의 침실에서 모시게끔 하였다고 합니다.한편 기록에서는 신돈이 공민왕을 상대로 반역을 꾀하다 오히쳐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러면서 모니노를 보아서 자신을 살려달라고 말합니다. 아무래도 신돈은 모니노, 즉 우왕을 자신이 아들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신돈이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고 나중에 그가 이러한 이야기를 밝히게 된다면 곤란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공민왕은 신돈을 제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당시 원나라에서는 공민왕에게 아들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적에도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한편 공민왕이 우왕을 아들로 삼는 과정에서 이를 이해하기 위해 설명하는 것은 바로 신라 대에 있던 마복자 풍습입니다.  하위계급에 해당하는 임신한 여성이 상위계급의 남성과 관계한 후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을 ‘배를 쓰다듬어 낳은 자식’라는 의미의 마복자(摩腹子)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급자는 상급자에게 임신한 아내를 성 상납하여 자신의 아내와 뱃속의 아이를 바침으로써 충성을 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돈은 반야와 모니노를 공민왕에게 바치고 자신은 반대로 권력을 챙겼다는 것입니다. 그가 권력의 전면에 부상한 것이 바로 1365년인데 이 때가 바로 우왕이 태어난 시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대사학계에서는 이를 회의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일단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역성혁명에 찬성했던 세력들은 우창비왕설과 폐가입진론을 따랐던 데에 비해 그에 반대했던 세력들은 그렇지 않았고 이익의 『성호사설』에서도 공민왕이 ‘이 아이는 내 아들이다.’라고 직접 밝혔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대 사학계는 우창비왕설에 대한 근거가 부족하고 조선건국을 정당화하려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고려사』에서도 우왕이 신돈이 아들이라는 직접적인 근거를 찾아볼 수 없으며 당시 우왕은 왕위를 내놓고 물러나면서도 스스로를 공민왕의 아들이라고 발히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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