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과 노국공주

2024. 4. 16. 09:26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728x90

  고려시대 왕 중에 태조 왕건만큼이나 잘 알려진 왕을 꼽는다면 공민왕일 것입니다. 그는 고려 후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멸망으로 가는 고려를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개혁 군주로 그려지는 사람입니다. 공민왕은 충숙왕의 둘째 아들이며, 충혜왕의 동복 아우입니다. 공민왕의 어머니는 덕비 홍씨로 원나라 공주가 아닌 고려 여성이었습니다. 1330년에 태어난 공민왕이 전례에 따라 볼모로 원의 연경에 간 것은 12살 때였습니다. 이후 조카인 충정왕이 폐위되어 1351년 12월에 귀국할 때까지, 약 10년을 연경에서 살았습니다. 그 사이 두 차례의 왕위계승에서 실패하는 아픔을 겪다가, 21세 때 원 위왕(魏王)의 딸 보타시리[寶塔實理, 노국대장공주]와 혼인하면서 왕위계승의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였습니다.
  ‘왕이 왕위에 올라 정성을 다하여 정치에 힘쓰므로, 조정과 민간에서 크게 기뻐하여 태평 시대가 오기를 기대하였는데, 노국공주가 세상을 떠난 후로는 지나치게 슬퍼하여 제정신을 잃었다.’ 『고려사절요』
  재위 초반에는 고려의 개혁에 노력을 기울인 공민왕이었습니다. 하지만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 벌어지는 반란과 잦은 전쟁은 공민왕의 마음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여기에 결정적으로 그의 마음을 파탄을 낸 것은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이었습니다. 공민왕은 공주가 생각날 때마다 영정과 마주 앉아 공주의 고향인 몽골의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공주의 영전이 빗물에 상하지 않는지 늘 살폈고, 생일에는 연회를 베풀었으며, 기일에는 직접 제사를 지냈습니다. 어떤 날에는 공주의 무덤을 찾아가 제사를 지내고 그곳에서 밤을 보냈다고 하니 공민왕에게 노국대장공주는 연애대상 그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밤낮으로 공주를 생각하여 드디어 정신병이 생겼다.’ 『고려사』
  고려 31대 공민왕도 동성애자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는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해 궁녀 대신에 미남 청년들을 뽑아 그들과 공공연하게 동성애를 즐겼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성불구자로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개혁군주로만 기억될 수 있었던 공민왕에게 무슨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을 받던 때에 몽골족은 원나라를 세우고 투항한 정권의 자제들을 인질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주로 원황제의 호위군이 되었는데, 고려의 많은 왕들도 젊은 시절에 원의 수도에서 황제의 호위를 맡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원나라는 왕자를 인질로 잡아두면서 고려의 왕을 마음대로 임명하고 또 폐위시켰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고려 왕은 온갖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공민왕의 형 충혜왕은 폐위되면서 원나라 사신이 고려의 왕을 발로 차며 포박했고 꾸짖었다고 합니다. 몽골이 지나간 자리는 수많은 나라가 몽골에 정복당했습니다. 하지만 고려에 대해 몽골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다만 독립된 국가의 지위는 보장받지 못했습니다. 고려를 통제하기 위해 원나라 황제는 자신의 딸과 고려의 왕을 혼인시켰고, 몽골의 공주가 낳은 아들이 다시 고려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려의 왕은 원나라의 신하처럼 살았습니다. 

천산대렵도


  1349년, 공민왕은 원나라 여인 노국공주와 결혼하게 되었는데, 위와 같은 상황을 생각하면 차라리 왕이 되는 것을 피할 법도 했지만, 결혼은 공민왕이 원한 것이었습니다. 1344년, 충혜왕이 유배 길에 사망하고 공민왕의 그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었지만, 여덟 살짜리 조카 충목왕에게 왕위는 돌아갔습니다. 그 후에도 충혜왕의 서자 저가 열두 살의 나이로 공민왕을 제치고 왕이 된 것인데요. 공민왕은 어머니가 고려인이었고 여러 가지 한계 때문에 고려의 왕이 되지 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원나라 여인 노국공주와의 혼인이었습니다. 그것은 정략결혼이었지만, 그들의 인연은 그 이상이었습니다. 
  ‘공주가 아들이 없으니 명문집 딸로서 아들을 낳을 만한 여자를 선택할 것을 청하였다.’ 『고려사』
  이 때가 결혼 11년차로 혼인한 지 10년이 넘도록 공민왕은 후궁을 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하들은, 노국공주를 찾아가 공민왕에게 새 아내를 맞이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공민왕 부부는 어쩔 수 없이 신하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남편을 설득하여 신하들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노국공주는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하며 식음을 전폐할 만큼 힘들어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공민왕은 결국 후비들에게서도 자식을 얻지 못했습니다.  
  공민왕은 시련도 노국공주와 함께 했습니다. 바로 홍건적이 쳐들어왔습니다. 이 일로 홍건적은 개경을 함락하고 공민왕은 노국공주와 함께 안동까지 피난 갔습니다. 공민왕 일행이 소야천에 다다랐을 때 안동의 부녀자들이 허리를 굽혀 노국공주를 태워 강을 건너게 했다는 데서 놋다리 밟기가 유래되었으며 공민왕이 안동을 떠날 때에 ‘안동이 나라를 중흥시켰다’고 이야기하고 대도호부로 승격시켰을 뿐 아니라, 세금을 면제해주고 여러 가지 선물을 내렸습니다.
  ‘왕과 공주는 밤이면 후원에 나가서 말타기 연습을 하였다.’ 『고려사』 공민왕 10년
  공민왕은 그림과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공민왕의 그림이 「천산대렵도」로 사냥꾼들이 말을 타고 내달리는 광경을 담은 것이 고려 후기 대표 화가로 공민왕을 떠올리는 것은 무리가 아닙니다. 다만 그는 호방한 성격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나라에서 사냥을 하지 않는 유일한 왕이었고, 심지어 말도 잘 타지 못했습니다. 그런 공민왕도 안동에서 어려운 시기를 겪고 나자 말타는 연습을 하며 부부간의 사랑도 커졌습니다.
  고려군이 사투 끝에 홍건적을 몰아내고 개경을 수복하는 어려움을 이겨냈지만, 수도로 돌아오던 공민왕 일행이 흥왕사에서 측근이었던 김용의 쿠데타 시도로 암살 위기에 처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당시 노국공주는 남편 공민왕을 밀실로 피신시키고 괴한들의 앞을 몸으로 막아서는 용기를 발휘했습니다. 친원을 명분으로 했던 김용 일파는 차마 노국공주를 해칠 수 없었고 덕분에 공민왕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최영이 이끄는 고려군이 흥왕사 경내로 들어와 김용의 반란군을 토벌하면서 반란은 평정되었습니다. 


  원나라는 1363년에는 눈에 가시인 공민왕을 제거하기 위하여 고려 왕족인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고 대군을 보내 고려를 침략합니다. 하지만 공민왕은 이마저도 격퇴하며 왕권과 고려의 자주성을 더욱 확고하게 다졌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노국공주가 내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기다리던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것은 노국공주의 임신 소식이었습니다. 공주가 아들을 낳는다면 공민왕에게는 든든한 후계자까지 생기는 것입니다.
  ‘왕은 분향하며 단정히 앉아서 잠시도 공주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공주는 이내 죽었다. 왕은 비통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고려사』
  노국공주를 잃은 공민왕은 공주 사후 8년이 지났어도 다른 여자들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슬픔에 빠져 정사를 돌보는 것에도 힘이 부쳤습니다. 오히려 개혁군주 대신 암군이 자리했습니다. 공민왕은 노국공주를 기리기 위하여 거대한 무덤과 영전을 만드느라 국고를 탕진했고 노역을 동원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샀던 것입니다. 그 때 등장한 것이 신돈이었습니다. 그리고 신돈이 사망한 후에 그의 정신병은 심해졌으며 왕비와 후궁들을 멀리하고 여장을 하고 또한 지나치게 자제위를 총애하더니 결국 1374년 공민왕은 자신이 총애하던 자제위에 의해 어이 없이 살해당하고 맙니다. 그의 나이 마흔 다섯 살이었습니다. 생전 공민왕은 죽어서도 노국공주와 같은 자리에 묻히고 싶다고 항상 신신당부했고, 실제로 700년이 지난 지금도 두 사람의 무덤은 나란히 이웃한 현릉과 정릉에 나란히 안장되었습니다. 무덤에는 구멍이 하나씩 뜷려 있는데 이는 영혼들이 서로 만나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