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왜 도읍을 옮기려 했을까.

2024. 5. 16. 07:37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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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선(道詵, 827~898년)국사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풍수지리설을 주장했던 최초의 인물입니다. 영암 출신으로 광양시 백계산 옥룡사에 머물렀기 때문에 ‘옥룡자’라고도 하며 ‘도승(道乘)’으로도 불리기도 합니다.
  15세에 출가해 월유산(현 지리산) 화엄사에서 <화엄경>을 공부하고, 850년 23세 때 천도사에서 구족계를 받았습니다. 20세 무렵, 846년 동리산문 혜철선사의 제자가 되어 ‘무설설(無說說) 무법법(無法法)’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도선은 스승에게서 심인을 얻은 뒤 운봉산과 태백산 등지에서 정진하며, 수행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15년 정도 행각한 후 37세 무렵, 희양현 백계산에 이르러 고옥령사를 재건했습니다. 도선은 동리산문 태안사와는 다른 선풍을 전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동리산문은 혜철의 제자 ○여가 받았고, 이어서 ○여의 제자 윤다가 선풍을 전개했습니다. 도선은 옥룡사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지도하였고, 재가자들을 진리로 이끌었습니다.
  신라 헌강왕(875~885년 재위)이 도선의 높은 인품을 존경해 왕궁에 초빙했는데, 둘은 초면인데도 오랜 벗을 만난 것처럼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도선은 차원 높은 설법으로 왕에게 마음 밝히는 진리를 설해주고, 본래 사찰로 돌아왔습니다. 어느 날 제자들을 불러 모은 도선은 “내가 이제 가야겠다.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떠나는 것은 만고불변의 이치이니 무엇 하러 더 여기 있을 것인가?”라고 말한 뒤 입적했습니다. 그의 나이 72세였습니다. 효공왕(898~912년 재위)은 도선의 입적 소식을 듣고 몹시 슬퍼하며 시호를 요공(了空), 탑호를 증성혜등(證聖慧燈)으로 봉하였습니다.
  또 고려 개국에 도움을 준 인연으로 훗날 현종(1009~1031년 재위)은 대선사(大禪師), 숙종(1096~1105년 재위)은 왕사(王師)로 추증했으며, 인종(1123~1146년 재위)은 선각국사(先覺國師)로 봉했습니다. 
  그는 신라말의 승려로 고려라는 새 왕조가 들어서면서 그 명성이 더해갔습니다. 바로 태조 왕건과 풍수지리설 때문입니다. 


  신라 말 도선국사는 전국방방곡곡을 돌아다니다가 하루는 송악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좋은 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대사는 땅주인인 왕융을 찾아 ‘저곳에다 집을 지으면 틀림없이 왕이 될 큰 인물이 나올 것이오’ 하니 그가 깜짝 놀라며 ‘대사님 저는 아직 자식이 없는데 대사님이 말씀하신 이야기와는 거리가 먼 듯합니다’하고 되묻자 도선대사는 ‘이곳 산수(山水)는 빼어난 곳이 많아 내가 시키는 대로 집을 지으면 반드시 득남을 하게 되고 훗날 삼한을 통일하여 나라를 다스릴 큰 인물이 태어날 것이다’하고는 사라졌다고 합니다. 2년이 지난 후에 태기가 있어 아들을 얻었고 그가 바로 훗날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王建)이었습니다. 왕건이 자라서 왕이 되고 고려의 국사로 이름을 떨치게 되니 풍수를 공부한 스님과 선비들이 그곳을 찾아와 산세를 살피느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그리하여 태조왕건은 도선국사와 풍수를 믿고 국정운영에도 많이 애용했으며 그가 후대 왕들에게 남긴 훈요십조에는 풍수적 사고가 조목조목 많이 남아있습니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에서 “아무 자리에나 사원을 지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사원은 모두 도선이 산수의 순역을 점쳐서 정한 곳 이외에는 함부로 사원을 세우면 지덕을 손상하여 나라의 운명이 길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 신라는 말엽에 사찰을 함부로 이곳저곳에 세워 지덕을 손상하였기 때문에 나라가 멸망하였으니 경계하여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비보사탑설로 비보사탑설이란 배산임수 같은 명당이 아니면 절이나 탑 등을 세워 재앙을 막아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우리 조상은 땅에도 약발의 유효기간이 있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른바 ‘지기쇠왕설(地氣衰旺說)’입니다. 특히 고려의 집권 지배층은 유별날 정도로 지기쇠왕설에 집착했습니다. 사람이 의지하고 살아가는 터는 땅심[地氣]이 왕성할 때는 그 혜택을 누릴 수 있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러 땅심이 쇠퇴해지면 약발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사는 터를 이전하는 등의 비상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려 시대에 수도 개경(개성)의 땅 기운이 쇠했으므로 서경(평양)으로 도읍을 이전하자는 묘청의 ‘서경천도설’이나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한양(서울)을 도읍지로 선택한 것 역시 지기쇠왕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 출신의 무장 이성계 역시 조선을 건국할 때 지기쇠왕설을 한양(서울) 도읍지의 주요 근거로 활용했습니다. 고려 수도 개경(개성)의 지기가 이미 쇠했으니 땅심이 왕성한 새 터에서 새로운 국가를 열자는 논리였습니다. 개경 고수론자들의 반발도 있었지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자’는 정서가 더 큰 호응을 얻어 한양이 최종적으로 낙점됐습니다.


  고려인들이 얼마나 지기쇠왕설을 신봉했는지 서긍의 『고려도경』에서는 “고려 사람들은 본디 글을 알아 도리에 밝으나 음양설에 구애되어 꺼리기 때문에, 그들이 나라를 세울 때에는 반드시 그 형세를 관찰하여 장한 계책을 세울 수 있는 곳이라야 자리 잡는다.”라고 하였습니다. 
  한편 고려시대에 『도선기』, 『도선답산가』, 『삼각산명당기』등의 풍수지리서가 유포되었고 그에 따라 남경천도나 서경천도 운동이 주장되었습니다. 그 중 김위제는 도선의 풍수법을 배워 숙종 원년(1095년)에 도선의 비기에 따라 도읍을 개경에서 남경(현 서울)으로 옮길 것을 말했습니다. 주장의 논거는 '저울론'입니다. 개경을 저울대(秤幹), 서경은 저울접시(極器)로 하면 남경은 저울추(錘)가 된다고 봤습니다. 삼각산(북한산) 남쪽과 목멱산(남산) 북쪽의 편편한 땅에 도성을 건립해 수시로 순행하고 머물도록 하였고 숙종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1101년 궁궐 공사에 착수, 1104년 5월 완성했습니다. 
  사실 고려의 숙종은 일반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습니다. 선종이 죽은 뒤 왕위에 오른 헌종은 불과 11살의 어린 나이였고 몸도 병약해 그의 어머니인 사숙태후가 모든 정사를 맡았습니다. 하지만 왕건은 「훈요10조」에서 고려의 왕위 계승 원칙을 밝혀놓았는데 고려에서는 왕위의 형제 계승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헌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공식적인 인물은 헌종의 이복 아우로 한산후가 있었고 이자의란 사람이 그 후견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들의 왕위 계승을 방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은 헌종의 숙부들이자 선종의 아우들로 계림공과 대각국사를 비롯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계림공은 이자의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헌종의 선양을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가 바로 숙종으로 이는 마치 조선시대 세조가 어린 단종을 쫓아내고 임금이 된 것과 비슷했습니다. 따라서 숙종은 왕권을 강화해야 하는 일이 시급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남경을 건설하자는 것으로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김위제가 언급한 것이었습니다. 
  인종 대에는 개경을 서경 중시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묘청이 주장한 것으로 지덕, 즉 땅의 기운이 왕성한 서경에 천도하고 왕을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사용하면 금나라를 비롯한 36국의 조공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인종은 김부식 등 개경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128년 9월 서경 임원역에 궁궐 지을 터를 정하고, 이듬해 서경의 새 궁궐을 완성했습니다. 인종이 서경에 행차할 때, 사람들은 표를 올려 왕을 ‘황제’라 일컫고 연호를 정하자고 요청하며, 중국과 동맹해 금나라를 협공하여 멸하자고 청하였습니다. 
 고구려는 수도가 세 군데 있었으며 중국 당나라때 편찬된 ‘북사(北史)’는 고구려가 수도인 평양성 외에 국내성과 한성에도 별도로 도읍을 두었으며, 이를 삼경(三京)이라고 부른다고 기록했습니다. 또 고구려 왕은 한 수도에만 머무르지 않았고 세 곳을 돌면서 나라를 다스렸다고도 했고 고려도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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