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몽전쟁 영웅 김윤후

2024. 2. 16. 09:55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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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인성 전투

  고려시대 최씨 무인정권이 통치하던 13세기 초, 몽골은 원수 살리타이(撒禮塔)를 앞세워 고려를 1차(1231.8. ~ 1232. 1.)에 이어 1232년 8월부터 2차 침공했습니다. 고려가 1232년(고종 19년) 음력 6월에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기고 몽골과의 장기 항전 태세에 돌입하자 이에 분노한 몽골은 살리타이를 다시 내세워 침략한 것입니다. 몽골군은 3개월 만인 11월에 남경(한양)을 함락시키고 한강을 건너 광주를 거쳐 남부지방으로 진출하려 했으나 광주산성(지금의 남한산성)에서 강한 저항으을 받았습니다. 남한산성을 광주 부사 이세화와 광주부민이 지켜낸 것입니다. 함락시키지 못한 몽골군은 용인 방향으로 향했으며 이곳에 처인성이 있었습니다. 고려시대 처인은 수주(水州:오늘날 수원과 화성 일대)의 속읍으로 천민들이 거주하는 부곡이었습니다. 고려 때 역원제도에 따르면 개경에서 평택, 안성 방면이나 남쪽으로 이동하려면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 했습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처인성에 군량미를 보관하는 창고인 ‘군창’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처인성은 고려 시대 야트막한 토성으로서 1232년 이곳에는 몽골의 2차 침략을 피해 많은 백성이 모여 있었습니다. 당시 고려의 수도 개경을 지나 수원 쪽으로 진격하던 몽골 장군 살리타와 몽골군은 이를 알고 즉각 포위한 후 공격을 감행합니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 피신하고 있던 승려 김윤후가 활을 쏘아 적장 살리타를 죽였다고 합니다.
  ‘처인 부곡의 작은 성에서 서로 맞서 싸우던 화살이 괴수 살리타에 적중하여 그를 죽였으며 사로잡은 자도 많았으므로 적의 남은 무리는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동국이상국집』
  ‘살리타가 고려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고려 수도 남쪽의 처인성을 공격하던 중 유시(빗나간 화살)에 맞아 죽었다.’ 『원사외이전』

몽골군


  장수를 잃은 몽골군은 철수하게 되고 2차 몽골의 침략은 일단락됩니다. 곧 이 사실을 알게 된 고려 고종은 승려 김윤후에게 무신으로서 최고의 벼슬인 상장군직을 제수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과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처인성 전투입니다. 전투가 벌어진 곳은 성이라고 하지만 낮은 언덕 정도인데, 의외로 사방이 탁 트인 곳으로 적군이 어디에서 공략하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고려사』의 그 다음 서술입니다. 생몰연도도 묘연한 이 승려 김윤후는 오히려 자신에게 내려진 상장군을 사양합니다.
  “전투할 때 나는 활과 화살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어찌 함부로 상을 받겠는가?”
  결국 조정에서는 섭랑장(攝郞將)에 임명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승려의 지위를 버리고 무신의 길을 걸었습니다.
  김윤후가 활약한 처인성 전투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일부는 김윤후가 살리타 부대와 전면전을 치렀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날아오는 화살에 살리타가 맞아 죽었을 뿐이라고 추측할 뿐입니다. 다만 처인성 전투를 이끈 사람이 장군이 아닌 승려였던 김윤후였다는 점과 몽골군과 맞서 싸운 사람은 정규군이 아닌 일반 백성이었다는 점에서는 다들 일치하고 있습니다. 
  1253년에 몽골의 5차 침입이 있었습니다. 몽골 내부에서 대칸의 자리를 둘러싼 다툼이 일어나 일시적으로 주변국으로의 출병이 줄어들었으나, 후계 분쟁이 끝나고부터 고려에 대한 침략 역시 본격화되었습니다. 제4대 헌종 몽케 칸이 즉위한 후, 그는 고려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을 이유로 들어 1253년(고종 40년) 황족인 보르지긴 야쿠를 시켜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이에 고려는 전쟁을 각오하고 강화도를 굳게 지키니 몽골은 이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9월부터 10월 초까지 동주(東州: 철원)·춘주(春州: 춘천)·양근(楊根: 양평)·양주(襄州: 양양) 등을 공격하였습니다. 지금의 춘천인 춘주성에서의 전투는 처절했습니다. 몽골군은 투항을 요구했으나 춘주민들은 끝까지 항전했습니다. 그러자 몽골군들은 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 2중의 목책과 참호를 쌓아 철저히 고립시켰습니다. 싸움이 장기화되면서 성 안의 물은 고갈되었고 소, 말을 잡아 그 피를 마셔야 할 정도로 처참했습니다. 결국 성이 함락당하고 춘주에서는 최악의 참살이 벌어졌습니다. 


  ‘몽골병이 춘주(춘천)를 함락할 때 박항이 서울에 있었기에 부모의 죽은 곳을 알 수 없었다. 그리하여 성 아래 쌓인 시체가 산과 같았는데 부모와 모양이 비슷한 자를 모두 거두어 묻기를 300여 명에 이르렀다.’ 『고려사』, 박항전
 이후 몽골군의 진군이 이어졌고 그들이 가는 길목에는 전략적 요충지인 충주성이 있었습니다. 몽골군은 곧 성을 포위하였습니다. 사실 이전에도 충주성이 포위된 적이 있었습니다. 1232년 몽골군이 처음 충주에 쳐들어왔을 때였는데 당시 고을 수령과 군 지휘부들은 다 도망을 가고 성을 지킨 것은 노비와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몽골군이 물러가자 돌아온 충주군 지휘관들은 몽골군이 약탈해 간 고을의 기물과 물자를 노비들이 훔쳐갔다고 뒤집어 씌우는 일이 생깁니다. 분노한 노비군은 반란을 일으켰다가 결국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1258년 충주에 있던 노비와 백성들이 고려 조정과 최씨 무신 정권에 반감을 가졌으면 가졌고 누구도 선뜻 나서서 싸울 생각이 없었을 것입니다. 
  에쿠는 투항한 고려인들을 방패삼고, 고려를 배신한 부모분자 홍복원과 이연을 앞세워 충주민들에게 항복을 권유했습니다. 하지만 김윤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끈질긴 고려백성의 저항에 몽골군 내부에서도 내분이 일어났습니다. 전투가 부진하여 에쿠와 다른 황족 사이에 갈등이 생겼고 결국 사령관 에쿠가 본토로 소환되었습니다. 하지만 충주성도 상황은 매우 나빴습니다. 포위된 충주성 전투는 무려 70여 일 계속됐고 성안에는 식량과 물자뿐만 아니라 사기도 떨어져 극한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이 때 스님은 특단의 조치를 내렸는데, ‘몽골군을 물리칠 수 있도록 힘을 다해 싸운다면, 노비든 평민이든 그 신분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모든 성민에게 벼슬을 내리게 해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성안에 있는 노비문서들을 다 불태우고 몽골군에게 빼앗았던 소와 말들을 성민들에게 골고루 나눠줬습니다. 그러자 사기가 다시 충천해 충주성을 방어하는데 성공했고, 몽골군대는 퇴각했습니다. 김윤후 스님의 뛰어난 리더십으로 처인성에 이어 충주성의 승리를 성취해 냈고, 모든 백성들이 신분의 귀천을 초월해 하나로 뭉쳐 싸운 결과, 천하무적인 몽골의 대군을 물리쳐 나라를 구한 것입니다. 또한 고려 정부는 신분의 귀천 없이 벼슬을 내리겠다는 김윤후의 약속을 받아들였습니다. 농민에서 노비에 이르기까지 공에 따라 포상을 내렸고 충주가 국원경으로 승격되었습니다.

노비문서를 불태우는 김윤후


  충주성에서 몽골의 항전을 버틸 수 있던 이유는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충주성으로 추정하는 대림산성의 앞에 하천이 흐르고 진입하는 입구가 좁아 적들이 침입이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계식 활인 쇠뇌가 일반 활에 비해 명중률이 높고 엄폐된 곳에서 적을 명중시킬 수 있어 대몽항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충주에는 고려시대 때 대규모 제철단지가 있었는데 다인철소입니다. 이곳에서 생산한 칼이 몽골의 칼보다 질적으로 우수했기 때문에 충주성 항전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단 두 번의 승리로 몽골군을 철수시킨 전투를 이끈 사람은 바로 김윤후였습니다. 하지만 원간섭기를 지나면서 대몽항쟁에 뛰어난 업적을 세운 사람들이 제대로 된 평가와 기록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김윤후 역시 그 기록이 공에 비해 적다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김윤후가 승려 출신이었다는 점은 억불숭유정책을 핀 조선 시대에 들어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지지 못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으는 과정에서 중봉 조헌 선생은 처인성과 충주성에서 활약한 김윤후의 이름을 상기시키며 의병을 모집시켰으며 현대에는 고려의 명맥을 그대로 유지되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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