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정권 때 농민봉기는 어떤 성격이었나.

2024. 5. 23. 07:45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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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무신정권 시기 이 때에 민란이 집중적으로 발생했습니다. 무신정변으로 고려 전기의 신분 제도가 동요되어 하층민에서 권력층이 된 자가 많았습니다. 한편, 무신들 간의 대립과 지배 체제의 붕괴로 백성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었으며, 무신들의 농장 확대로 인하여 수탈이 강화되었습니다.
  가혹한 수탈을 견디지 못한 백성은 종래의 소극적 저항에서 벗어나 대규모의 봉기를 일으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서경 유수 조위총이 무신 정권에 반발하여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많은 농민이 가세하였으며, 난이 진압된 뒤에도 농민 항쟁이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이어 남부 지방에서도 농민 항쟁이 발생하였습니다. 명종 때 공주 명학소에서는 망이⋅망소이가, 운문, 초전에서는 김사미, 효심이 봉기하였습니다.
  봉기를 일으킨 이들은 지방관의 탐학을 국가에 호소하고 이의 시정을 요구하였으며, 신라 부흥 운동 같이 왕조 질서를 부정하기도 하였습니다. 최충헌이 정권을 장악한 뒤에는 회유와 탄압으로 약간 수그러들었다가 만적 등 천민의 신분 해방 운동이 다시 발생하였습니다. 만적은 사람이면 누구나 공경대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신분 차별에 항거하였습니다.
  흔히들 고려 사회를 역동적인 사회라고 말합니다. 이런 평가가 나오게 된 데에는 먼저 농민과 천민의 봉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30여 년간 비슷한 형태의 봉기가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전 신라 시대만 해도 이런 봉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 때도 백성들이 봉기를 일으킨 것은 아주 후대의 일입니다. 고려 백성들은 집권자들이 나라를 잘못 다스린다 싶으면 힘을 합쳐 항의를 하고, 신분 제도에 대한 불만도 드러낼 줄 알았다는 것이고 그냥 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바꾸기 위해 활발한 활동을 펼친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도 한계는 있습니다. 과연 이 무신정변 시기에 있던 농민봉기가 과연 앞으로 나아가는 역사적인 움직임이었느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신라나 고구려, 백제의 부흥을 표방했기 때문입니다. 


  조위총의 난 같은 경우는 ‘나라의 정치를 함부로 하는 이의방과 정중부 등의 무인들을 제거하고 나라를 바로 잡는다.’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즉 고려왕조의 정치질서를 어지럽게 했던 이들을 제거하고 고려왕조의 기존 질서를 회복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조위총의 난은 고려를 반대하는 것이 아닌 본래의 고려 모습을 회복하기 위한 운동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망이‧ 망소이의난은 고려 명종 6년(1176년)에 양광도 공주 명학소(鳴鶴所, 지금의 대전광역시 서구 탄방동)의 백성 망이와 망소이가 무리를 이끌고 일으킨 반란으로 원인은 그들이 받았던 차별에 있었습니다. 망이와 망소이가 거주하던 '소(所)'는 고려의 일반 행정 구역인 주·군·현과 다른 특수 행정 구역으로, 농경 대신 특산물 제작과 공납에 특화되어 있었습니다. 소에서는 지역 특성에 따라 금, 은, 철, 명주, 종이, 기와, 숯, 도자기, 차 등을 생산했습니다. 소의 주민들은 천민과 다를 바 없는 대접을 받으면서 각종 부담은 일반 군현민보다 무거웠습니다. 망이·망소이의 이름에 망할 망(亡)이 들어간 것을 보면 그들의 처우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불만이 누적된 것이 하나의 원인입니다. 그들 처우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에서 보다 진전된 사회를 꿈꾸었으나 그렇다고 고려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무신정변 시기의 봉기들은 고려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몽골군에 밀려 거란이 밀려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봉기를 일으킨 농민군은 당시 집권자인 최충헌에게 전하여 거란군과 맞서 싸우겠다는 의견을 내비칩니다. 그들이 고려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면 오히려 이를 이용하여 고려를 어려움에 빠뜨렸어야 하는데 이들은 그러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종 2년(1199년) 지금의 강릉인 명주에서 민란이 일어났고, 확대되어 삼척과 울진을 점령합니다. 그리고 경주에서도 봉기가 일어나 힘이 합쳐져 커졌습니다. 그리고 1202년에는 경주를 중심으로 대규모의 봉기가 되었는데 여기에 김사미와 효심이 이끌었던 세력의 일부가 합류하면서 고려 왕조의 타도를 외치며 고려왕조를 위협했습니다. 이 때 경주에서 신라의 부흥을 표방한 민란을 일으킨 주모자로 배원우가 있었으며 그는 고부군에서 유배를 살고 있던 전 장군 석성주에게 신라 부흥을 제안했습니다. 
  ‘고려의 왕업은 거의 다하고 신라가 반드시 부흥할 것입니다. 공으로 주를 삼고 사평도를 경계로 하고자 하는데, 어떻습니까.’


  이 일에 대해 석성주는 오히려 고부군수에게 알려 이 일은 무산되었습니다. 이후로도 이 봉기는 계속되었고, 고려조정에서도 심각을 느껴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하는 동시에 반란 진압을 기원하는 제사를 드리고 신라 부흥운동의 부당성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토벌군 사령관의 참모로 활약한 이규보는 고려정부를 대변하는 글을 지었습니다. 그 내용은 태조 왕건이 후삼국 때 견훤의 경주 침략을 막아주지 못했다면 신라인은 절멸했을 것이며, 고려의 신라 통합은 경순왕의 귀부에 따른 것이고 결코 정복이 아니었으며 경순왕을 상부(尙父)로 우대하고 신라를 구국(舊國)으로 존치시키며 유수부로 삼아주었다는 말했습니다. 이 말이 얼마나 의미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결국 신라부흥운동은 2년 만에 정부군에게 진압 당했습니다. 
  고려 무신정권 시기에 최광수(崔光秀: ? ~ 1217년 음력 6월)가 일으킨 반란이 있는데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하여 건국된 나라임에도 고려에 반대해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켰다는 게 특이한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1216년에 거란군에 쳐들어와 서북면쪽을 유린한 일이 있었는데 최충헌은 이를 예상하고도 대책을 마련하지 않아 피해를 스스로 불러온 것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최충헌 정권에 대한 이 지역의 사람들, 그리고 거란 침입의 방어 제 1선을 담당한 서북인들의 불만은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전에 있던 신라 부흥운동의 영향도 받았을 것이고, 고려가 고구려를 이어받았다고는 하나 이미 최충헌이 집권하고 있었으므로 그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잘 훈련된 군사를 모집하고, 대규모의 봉기를 꾀하려 했으나 평소  친분이 있던 정영의 계략에 빠져 살해되었습니다. 이후로도 살해된 인물은 8명에 불과했으며 삼국부흥운동을 표방한 사건이나, 가장 허무하게 제압당했습니다. 
  삼국 부흥운동 가운데 가장 늦게 일어난 것은 백제부흥운동으로 고종 24년(1236년), 전라도에서 일어났습니다. 이정년 형제가 현재의 담양 인근인 율원에서 거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농민 다수를 규합하여 스스로 백제 도원수라 부르며 세력을 확대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광주인 해양을 점거하면서 그 위세를 키워나갔습니다. 그런데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난 시기는 몽골의 침략으로 고려 조정이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였습니다. 이연년 형제가 처음 봉기한 것은 1236년 말엽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몽골의 3차 침입은 그 해 10월에 있었습니다. 몽골군이 전라도 북부까지 침입했다가 철수하는 시기에 고려조정의 통치력은 온전할 수 없었고 그것을 이용해 봉기를 일으킨 것입니다. 이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고려 정부는 김경손을 지휘사로 삼아 진압군을 파견했습니다. 
  ‘지휘사는 귀주에서 공을 세운 대장으로 인망이 매우 높은 분이다. 내가 마땅히 사로잡아 도통으로 삼을 것이니 활을 쏘지 말라.’ 『고려사』 열전 김경손전
  하지만 단병전으로 맞선 그는 별동부대에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로써 승기는 관군에게 넘어갔고 봉기군은 궤멸했습니다. 
 결국 이 시기의 농민운동은 대부분 삼국부흥운동으로 귀결되었고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분명 앞으로 나아가는 것인 퇴행적인 운동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그럼에도 이러한 운동이 일어난 것은 당시 농민들의 불만이 상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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