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정변의 주인공은 왜 스스로 왕이 되지 않았나.
2024. 5. 29. 09:00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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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0년에 고려 시대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켰습니다. 1170년에 시작된 무신정변 이후 주동자들인 정중부와 이고, 이의방에 의해 무신정권이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1171년에 이의방이 자신의 뒤통수를 치려던 이고와 그의 동료 채원 등을 싸그리 죽이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해나갔습니다.
그럼 이 시기에 무신들은 스스로 왕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결과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운 이후 쭉 이어져온 것을 바꾼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새 왕조를 개창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불만을 일시에 폭발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위험부담이 큰일이었습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전 왕조의 왕이나 왕족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러면 반대로 시해자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게 됩니다. 실제로 의종을 살해한 것은 이의민이었습니다. 거제도로 쫓겨난 의종은 살아 있다가 경주에서 난을 일으킨 김보당의 의종복위운동에 휘말렸습니다. 이에 이의민이 제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종이 계속 살아있었다면 반란의 명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일을 벌인 이의민은 자기 자신이 의종을 살해했다는 약점을 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위총도 반란을 일으키며 이의민이 의종을 죽이고 장사도 지내주지 않은 죄를 말했으니 왕을 시해한다는 것은 보통 부담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명종 6년에는 노약순이란 사람이 반란을 도모했다가 체포당했는데 ‘왕을 죽인 자가 대관의 자리에 있는 것’ 때문에 난을 일으켰다고 했습니다. 정중부를 제거하고 권력을 잡은 경대승은 주변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았을 때도 냉정했습니다. 왕을 살해한 사람이 살아있는데 어떻게 축하를 받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들 무신들이 의종에게 충성을 맹세한 부류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호시탐탐 정권을 탈취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무신정변 초기에 가담한 무심들이 모두 한 마음으로 일치했던 것은 아닙니다. 국왕 의종과 문신 귀족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 고심했던 것입니다. 이고는 의종을 살해하려 했지만 정중부가 이를 말렸고, 다시 이고와 채원이 의종을 살해하려 했지만 무신 앙숙이 말렸다고 합니다. 이의방 등은 문신의 집을 철거하려 했지만, 진준은 ‘우리가 미워하고 원망하는 자들은 이복기·한뢰를 비롯한 4,5인이다.’라고 하며 말리며 정변의 확대를 우려했습니다.
당시 무신정변은 주도한 이고·이의방 등은 하급 무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문신의 관을 쓴 자는 서리라도 씨를 남기지 말라.’라고 하였는데 이들은 무신난의 주병자로서 대장군 우학유로 내정하고 무신난을 지휘해줄 것을 부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죽어도 따를 수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문관이 해를 당하면 화는 우리 무신에게 미친다라고 한 것입니다. 당시 고위 무신들은 아마 당시 고려 조정에서 받는 무신들의 대우에 대해 부당하다고 느꼈는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것을 없애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즉, 무신들 사이에서도 강경세력과 온건세력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보면 무신정변이 모든 무신들의 지지를 받고 일어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정변에 성공했다손 치더라도 반대파에 대한 통제가 이루어지지 못했고 이들은 스스로 왕이 될 수 없던 것입니다. 또한 모든 문신을 일시에 제거할 수도 없었고, 무신난에 참여하지 않은 무신이나 문신들에게 호의적인 무신들도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국왕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럼 무신정변을 일으킨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왕을 제거하고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을 보호 아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겉으로나마 왕의 훌륭한 신하임을 말해야 했고, 한편으로는 왕실의 보호자임을 자처했습니다. 이의방 형 이준의가 동생을 꾸짖을 때도 ‘네가 세 가지 큰 죄악이 있다. 임금을 시해하고 그 집과 첩을 탈취하였으니 그 죄악이 하나이다.’라고 한 것인데 형 이준의는 동생을 제거하려는 생각을 가졌고 그러기 위해서 자신이 왕실의 보호자라는 명분을 내세운 것입니다.
명종 26년(1196년) 이의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것은 최충헌 집안이었고 이후 60여 년간 4대에 걸쳐 무신집권자를 배출했습니다. 최충헌은 집권 초기에는 이의민과 결탁하여 왕실세력을 몰아내는 데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최충헌은 집권기에 명종·희종을 폐하고 신종·희종·강종·고종을 즉위시킵니다. 최충헌은 왕실의 지지기반이었던 문신 세력이 왕과 접촉하는 것을 막았고, 당시 무신들은 항시 문신들을 경계했습니다. 최충헌은 집권 후에 문·무관의 임면권을 장악하였으며 문반을 등용하여 정권을 안정화시키려 했으며 그러한 정책은 최우에게도 이어져 문신을 우대하는 정책을 썼습니다. 최우는 정방과 서방을 두었는데 이것들이 문신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은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최충헌은 왕이 자리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1211년 국왕 희종이 최충헌을 죽이려다 실패했을 때 최충헌의 부하들은 공공연히 왕을 죽이겠다고 외쳤습니다. 하지만 최충헌은 부하들에게 “후세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두려우니, 경거망동하지 마라”고 막았고 희종을 끌어내리는 것으로 조치를 마무리했습니다. 정권을 뒷받침한 문벌귀족들이 왕조 교체에 반대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고, 몽골 침공으로 왕조 교체가 어려웠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무엇보다 최충헌은 자기 자신의 안위를 우선시했던 것 같습니다. 거란 유목민이 1216년 고려를 향해 쳐들어왔을 때 좋게 말해 군대지, 도적 떼에 가까웠던 무리가 넘어왔습니다. 정작 고려군은 이들을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최충헌이 반란에 대비해 실력 있는 군사들을 자기 사병으로 두고 노약자만 관군에 편성한 게 주원인이었습니다. 거란 유목민이 북방을 약탈했지만 실력이 충분한 최충헌의 사병들은 출동하지 않았습니다. 거란 유목민을 막겠다고 사병을 수도 개경 밖으로 내보냈다가 개경 내에서 최충헌에 대한 ‘반란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물론 이것 외에도 다른 요인도 있습니다. 최충헌은 집권한 후에 「봉사십조」라 하여 정치를 개혁하고 태조 왕건이 제정한 법을 준수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최충헌이 고려 왕조 자체를 부정하려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최충헌의 동생 최충수가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들이려 하자 최충헌이 이에 대해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가계가 미천하여 만약 딸을 태자에게 시집보낸다면 그 비난을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여지가 있으나 최충헌은 스스로 고려 왕실에 대한 존중이 있었는데 동생 최충수의 일은 주제 넘는 짓이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그러한 사고방식이 진실이라면 최충헌이 고려왕조를 부정하고 자신이 스스로 왕이 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일찍이 강조가 목종을 제거하고 현종을 옹립한 일로 요의 성종이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현종 원년(1010년)에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습니다. 물론 이것은 고려를 침략하기 위한 구실이었지만, 이렇게 멀쩡한 왕을 폐하고 새로운 왕을 내세운다는 것은 외교적으로도 부담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최충헌 집권 시기에는 금나라가 있었습니다. 자칫 자신이 왕이 되었다가 금나라의 침략 구실을 만들어줄 수 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차라리 국왕의 권위를 이용하여 정권을 유지하는 편이 더 안전하고 편한 길이겠습니다.
또한 무신들은 백성들을 수탈하여 민심을 얻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여러 전장에서 승리를 거두어서 명성과 민심을 얻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무신정권들은 어디까지나 권력과 재물에만 관심이었고 그나마 최씨 정권이 일부문신들을 중용했으나 어디까지나 실무 일부를 담당했지, 개혁이나 민생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으니 애초에 왕의 자리가 당시 무신들에게는 버거운 자리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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