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왕자들은 왜 승려가 되었나.

2024. 5. 26. 07:48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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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는 그야말로 불교의 나라였습니다. 고려 초기에는 호족들이 지배층을 이르고 있었고  태조 왕건은 불교를 적극 지원했습니다. 일단 고려를 세우는 데 많은 도움을 준 종교가 불교의 선종이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태조가 남긴 글인 훈요 10조만 봐도 불교와 관련된 행사인 연등회나 팔관회를 중시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광종 때 과거제를 실시하였는데 승과가 있었습니다. 이 때 뽑힌 승려는 나라의 스승인 국사나 왕의 스승인 왕사가 되어 왕실의 고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국가가 절에 땅을 하사하고 스님들에게는 세금을 면제해주는 특권을 부여해주면서 불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줬습니다.
  고려는 시간이 지나면서 지배층이 문벌귀족으로 변화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유행한 불교의 종파가 교종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계가 쪼개져 나아가길 바랬던 것은 아닙니다.  당시 유명한 승려였던 의천은 이런 종파들을 통합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의천은 왕의 아들이다 보니 종파를 통합할 때에도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통합하고자 했으니 그것이 바로 천태종입니다. 
  고려시대에는 귀족 가문이 원찰이라고 해서 사원을 적극 지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사찰과 밀착해갔습니다. 그것은 고려왕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왕자를 출가시켜 승려가 되게 하였고 불교사회였던 지라 이러한 움직임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문종은 여러 아들에게 출가를 원했고, 그 아들로 승려가 된 사람이 의천입니다. 의천이 속장경을 간행하고 천태종을 개창할 수 있었던 것은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고려시대에 왕의 서자에게 붙여준 칭호를 가리키는 왕실용어로 소군이 있었습니다. 궁인(宮人)이나 폐첩(嬖妾)이 임금을 모시어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들의 머리를 깎아 중〔僧〕을 삼았는데 이를 소군이라 한 것입니다. 고려 왕실의 경우 조선 왕실의 적서(嫡庶) 구분과는 달리 여러 왕비의 소생을 모두 적자(嫡子)라 하였고, 궁인·폐첩의 소생을 서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후대의 왕조인 조선과 다른 모습입니다. 조선도 일천즉천의 사회였습니다. 일천즉천은 부모 가운데 한 쪽이 천민이라면 자식도 천민이 된다는 뜻으로 가령 『홍길동전』에서 신분이 천한 비(婢)를 어머니로 둔 가닭에 홍길동은 양반인 아버지를 아버지라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법도 조선시대 초기에는 원래 '일천즉천'이 아닌 노비종부법 또는 노비종모법을 택해 부모 중 한쪽이 노비여도 무조건 그 자식들이 노비가 되지는 않았으나 세조의 치세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을 통해 '일천즉천'으로 그 제도를 완전히 변경하였습니다. 이는 영조 시대가 되어서야 노비종모법으로 다시 환원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왕실은 이와 달랐습니다. 『경국대전』 내명부조에는 귀인, 소의, 숙의 등의 존재들이 있어 이들은 조선의 국왕이 공식으로 둘 수 있는 후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국왕은 비공식적인 관계로 자식을 두었으며 그 상대는 궁중에서 허드렛일을 맡고 있는 여자였습니다. 이 때 태어난 아이들도 왕의 자손으로 대접받았습니다. 영조는 왕실의 서자 출신으로 왕위에 올랐으니 그의 어머니는 궁중에서 사용할 물을 길어 나르던 무수리 출신이었던 것입니다. 모계가 천하다 하더라도 왕의 자손으로서 적자가 없었을 경우 왕위에 오르는 데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반면 고려의 소군은 조선과 그 상황이 달랐습니다. 
  ‘궁인이 국왕을 모시다가 자식을 얻으면 머리를 깎아 중으로 삼고 소군이라 불렀다.’ 『고려사』
  ‘태조 이래로 국왕의 서얼들은 반드시 승려가 되게 하였다.’
  그리하여 고려 시대에 궁인의 소생으로 소군이 된 예는 꽤 있었고, 명종의 서자 10명 중 선사, 홍기, 홍추, 홍규, 홍균, 홍각, 홍이는 모두 머리를 깎아 승려가 되었고 소군이라 불렀습니다. 다만 이들은 의복과 대우는 적자와 다름없었고 궁중을 드나들며 위세를 떨쳤습니다. 궁궐을 자주 드나들었으며, 위복(威福)을 누려 뇌물을 거두어 들였기에 요행을 바라는 자들이 많이 붙었습니다. 명종이 직접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계를 내려주었고, 이름난 절을 택하여 살게 하였습니다. 왕선사를 제외한 나머지 소군들은 『고려사』에 '명종이 폐위되자, 함께 바다 섬으로 유배되었다.'는 기록만 남아있습니다.
  소군이라는 용어는 ‘신혈소군’이라는 용어가 기록되면서 처음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나중에 현종이 되는 사람입니다. 현종은 후에 안종으로 추존되는 태조 신성대왕의 8남인 안종 왕욱과 천추태후의 여동생이자 경종(제5대)의 미망인이었던 헌정왕후 사이의 소생입니다. 역대 한국 왕조 중에 서자 출신 군주는 자주 나왔지만 부모가 정식적인 혼례 절차 없이 사생아로 태어난 군주는 고려 현종이 유일합니다. 당시 목종은 후사가 없어 그가 사망하면 현종이 매우 보위에 근접했습니다. 천추태후는 이를 잘 알고 있었고, 현종을 신혈사에 보내버린 뒤 누차 살해를 시도했습니다. 이런 노골적인 차별이 가능했던 이유는 현종이 태어나면 죽어야 하는 사생아였기 때문입니다. 고려 황실, 신라 황실, 고구려계 호족의 피를 모두 물려받은 현종의 저 어마무시한 혈통이 사생아라는 사실이 커다란 단점으로 작용한 것입니다. 따라서 후에 현종이 되는 대량원군에서 보는 것처럼 소군은 이미 목종 이전에도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왕이래에 소군이 있었다.‘
  공민왕이 언급한 말에서 조왕은 태조 왕건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궁인 소생의 왕자를 출가시켜 왕위계승에서 소외시키려는 제도가 고려 초기부터 행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승려가 되었어도 그들의 출생과정 자체가 세속성을 내포한 것이었고, 무신집권기에 신분제의 동요가 심했음으로, 특히 이 시기에 그들의 직·간접적인 정치활동과 비행 등 폐단은 많았습니다. 1196년(명종 26) 최충헌(崔忠獻)이 난을 일으킬 때, 오직 소군·궁희(宮姬) 몇 사람만이 명종을 곁에 모시고 있었다는 사실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최충헌은 봉사십조를 올린 뒤, 궁중에 머물면서 정치에 간여했던 소군들을 본사(本寺)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또한 이듬해 최충수(崔忠粹)가 형 최충헌에게 ‘여러 소군이 항상 임금의 곁에 있으면서 임금의 위엄을 농간해 국정을 문란하게 한다.’고 건의하였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천인소생의 왕자라 하더라도 일반 왕자의 대군보다 한 등급 내려서 군이라고 했을 뿐, 출가를 강요받거나 하는 다른 압력은 없었다고 합니다. 조선 왕실은 부계를 유독 중요시했던 반면 고려는 부계와 모계 모두 중요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아마 이러한 제도를 두었던 것은 과거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로 서자 출신의 왕자들을 경계할만한 것인데 예를 들면 궁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많이 알려졌다시피 궁예는 신라의 왕족으로 그의 어머니는 신라왕실의 궁인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궁예는 신라 왕실의 왕위 계승에서 밀려나면서 승려가 돼서 사찰에 숨었습니다. 그러다가 진성여왕 시기에 전국적으로 농민들의 반란이 일어나자 여러 지역의 호족세력을 규합하여 후고구려를 세웠습니다. 나중에는 미륵을 자처했는데 아마도 그가 신라의 왕자이면서도 서자라는 출신 때문에 미륵을 내세웠는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그가 미륵을 자처하면서 온갖 폭정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본 것은 왕건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려의 제 1대 태조가 된 그에게 궁인 출신의 왕자에 대해 안좋은 생각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면 원칙적으로 서자들을 왕위계승에서 제외시킬 방법이 필요했고 그 방법이 바로 소군이라는 존재를 만드는 것입니다.  
  고려에서 소군이란 존재가 나온 것은 안정적으로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약 소군이란 제도가 없다면 왕위 계승과정에서 잦은 다툼이 일어날 것이고 그러한 일들은 국정을 혼란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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