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의종

2024. 5. 19. 07:40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728x90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물론 그것으로 인한 여러 가지 영향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개경파는 서경파를 억압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 결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에 연루되지 않은 인물이나 서경 사람들에게 엄청난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 예로 반란에 관여한 자의 이마에 ‘서경역적’이라는 문신을 새기고, 그보다 덜한 관여자에게는 ‘서경’이라는 글을 새겨 넣었습니다. 태조 왕건은 서경을 중시하라 했지만, 이제는 수도 서경은 마치 반역자의 땅처럼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개경파만 남은 고려 조정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습니다. 스스로 썩어가더니 마침내 무신정변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역사적 사건을 맞이한 왕은 고려 의종입니다. 역사적으로 의종은 그리 기억될만한 일을 하지 않았지만, 그나마 별로 좋지 않은 기억으로 후대인들에게 남았다면 바로 무신정변이 이 때 일어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고려 의종의 즉위과정부터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인종으로 이 시기에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나라의 사정은 안좋았던 것은 당연했고, 큰아들이었던 의종이었건만 그의 어머니 공예태후 임씨는 둘째 아들 대령후 경을 사랑해서 태자로 세우고 싶어했습니다. 게다가 아버지 인종도 동의했지만 세자의 스승이던 정습명이 세자를 지켜냈습니다, 그리고 인종이 죽을 때에 정습명에게 의종을 부탁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더불어 인종은 장차 뜻밖의 변으로 자신이 단명하여 세상을 뜨게 되는 일이 걱정되어 미리 태자인 의종을 불러 이르기를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마땅히 습명의 진언을 따라 시행하라고 하였습니다. 선왕의 유지가 있다고 하여 아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의종이 향락에 빠지자 이를 거침없이 지적, 질타하였습니다. 왕에 대한 지적이 계속되자 의종은 그를 미워하고 기피하였습니다. 왕이 그를 꺼리는 데다가 김존중(金存中)과 정함 등은 밤낮으로 그를 헐뜯었습니다. 1150년 3월 정습명이 병으로 사직하자 왕은 즉시 김존중에게 임시로 그 직을 대신하게 하였습니다. 왕의 뜻을 알아차린 그는 그해 3월 21일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습니다. 후에 의종은 무신정변으로 폐출되어 쫓겨날 때, 눈물 흘리며 자신에게 바른 말로 간하던 그를 찾았다고 합니다. 

고려 의종


  의종이 내시로 임명한 사람 중에 환관 정함도 있었는데 고려시대에 내시와 환관은 그 지위가 달랐습니다. 내시는 왕을 곁에서 보좌하는 신하로 귀족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반면 환관은 거세한 남자로 궁궐의 심부름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의종이 정함을 내시로 임명한 것은 정함이 의종이 유모한 혼인했기에 신뢰했는지 모릅니다. 의종의 어머니는 둘째 아들을 편애했는데 이러한 사실로 큰 아들이었던 의종은 유모에게 의지했을 수도 있습니다. 
  의종은 시문에 뛰어나 예술가 기질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임종직, 한뢰, 이복기 등 의종의 총신들은 문벌 출신은 아니더라도 과거에 급제하는 등 문학적 소양을 갖춘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의종에게 충성을 받치면서도 한쪽으로는 부정축재를 일삼거나 타인을 업신여기는 일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어려웠던 고려의 내부 사정을 고려한다면 의종의 이러한 총애는 당시 상황에 더욱 부적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의종은 자신을 따르는 이들의 잘못을 감싸는가 한편, 다른 관료는 이유와 직책을 막론하고 좌천시켜 불공평한 처벌을 했습니다. 
  1170년에 서경에 거둥(擧動: 임금의 나들이)하여 신령(新令)을 반포하였습니다. 낡은 것을 버리고 새 것을 정하는 것은 다시 왕화(王化)를 부흥하고자 함이며, 이에 옛 성인들이 권계(勸戒)한 유훈(遺訓)을 받들어 현재의 민폐를 구제할 수 있는 일을 채택해 반포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교 · 음양설 · 선풍(仙風)을 중요시하였을 뿐 유교적 정치이념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것은 의종이 실제 정치에서는 유교적 가치관을 의식적으로 외면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아마도 유교지식인이었던 문신에 대한 정치적 반감이 그러한 생각을 갖게 한 것으로 보이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처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때 반포된 것이 바로 김부식의 『삼국사기』입니다. 고려 입장에서는 나름 유교적인 관념이 꽤나 고점을 찍던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의종은 여기에 반감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의종 시기에 왜 무신정변이 일어났을까. 그들의 표적은 문신이지 않았을까. 무신들은 고려 역사, 특히 거란의 세 번의 침입에서 꾸준히 활약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정당한 대가나 처우 개선이 이루어졌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고려가 거란과 동맹 관계를 맺으면서 무신들의 필요성은 적어졌고 고스란히 무신들의 불만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불만을 해소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쌓여만 갔습니다. 이후 무신정변이 일어났고, 그들은 일차적으로 의종의 측근들을 타겟으로 삼았습니다. 
  사실 이러한 의종은 인종 시대까지 잦은 대규모 전쟁들과 내전들로 인해 땅까지 추락했던 왕권을 다시 강화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특히나 재위 첫 해에는 승보시를 도입했습니다. 승보시는 생원을 뽑던 제도로 국자감의 연구생채용시험 성격을 띤 일종의 예비고시기능을 가졌습니다. 


  특히 국왕의 권력에까지 해를 끼치면서 권력을 휘두르는 문벌귀족들을 적극적으로 견제하기 위해서 몇몇 환관과 내시들을 왕권을 보좌해줄 측근 세력으로 삼았으며, 동시에 무신들을 전격 중용하여 이때 무신정변 주역들로 유명한 이의방, 이의민 같은 이들을 무관으로 발탁하였습니다. 무신들을 우대하여 조정 내 문신의 권력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고자 한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종의 개혁 시도는 권력을 잡고 있던 김부식 일파를 중심으로 한 당대의 세력가였던 문벌귀족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고, 결국 종전대로 문신 우대 정책을 펼치면서 자연스레 무신들의 불만을 살 수 밖에 없는 구조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또한 이들과 문신들의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아버지 인종 시대에 벌어진 연회 중 용춤을 추던 정중부의 수염을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태웠다는 일화도 매우 유명한데 이미 인종 대부터 조금씩 문신과 무신의 대립이 드러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습니다. 의종 대에 와서 무신들이 제법 크게 세력이 강력해져 문신들보다 더 세력이 강해지나 싶더니 어쨌든 의종의 문신 견제가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최소한 국왕에 의한 무신들의 힘 실어주기는 무산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서 공사판에서 땀 흘려 일하는 남편과 동료들의 점심을 마련했다는 여인 이야기의 배경 역시 바로 의종 시대로 중미정이라는 정자를 지을 때 실린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나마 중흥사는 태조가 지은 사찰로 단순히 유지 및 관리를 해준 것에 지나지 않고, 1158년 백주에 창건한 중흥궐을 지을 때 백주의 백성들이 죽어나갔습니다. 고려 왕실을 중흥하겠다는 의종의 의지라 했지만 『고려사』에서는 무리한 공사라고 평가한 것입니다. 
  어쩌면 의종은 정치적으로 무기력해져서 더욱 향락과 사치에 빠졌는지도 모릅니다. 결국 잦은 연회로 국고가 탕진되어 인종 때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유지되었던 고려의 태평성대가 무너지고 본격적인 쇠락을 맞기에 이릅니다. 
  결국 즉위 초부터 개경(開京)에 기반을 둔 문신세력(文臣勢力)들에게 심한 제약을 받았고, 왕위를 엿보는 반역음모로 인해 항상 신변의 위협마저 느끼고 있었습니다. 재위 중 거둥이 잦았던 것도 놀이를 좋아하는 천성 때문만이 아니라 당시의 절박한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한 것이 주된 이유였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