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흥방 토지 점탈사건으로 고려말 보기
2022. 10. 4. 20:36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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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는 소위 특권계층들이 농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부의 원천은 농장만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유지하는 것은 힘들었습니다. 결국 이 땅을 개간할 사람이 있어야 했습니다. 다르게 이야기한다면 대농장을 소유한다는 것은 결국 토지와 함께 그것을 운영할 노동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고려시대의 관료들을 자신들의 봉급을 수조권으로 받았습니다. 즉, 해당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닌 그 토지에 대한 세금을 거둘 권리를 가졌습니다. 그들은 국가에 대한 봉사의 명목으로 국가가 농토의 수확물 가운데 10분의 1을 거두는 토지세를 수조권에게 주는 것으로 수조권을 행사하는 사람을 전주(田主), 이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을 전객(佃客)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수조권의 획득은 향후 토지를 가질 수 있는 기반을 얻고 본래 대농장소유주가 이러한 수조권을 가진다면 더욱 더 부를 늘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수조권을 갖는다는 것은 그 지역에 대한 세금을 걷는 동시에 해당 지역에 대한 노동력을 가진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화폐의 유통이 활발하지 않았던 고려시대에 토지는 그야말로 부의 원천이었을 것입니다. 현대 시대에 재테크를 통해 화폐의 보유, 즉 부를 늘리는 데 열을 올린다면 고려시대에는 토지의 확보를 부의 원천으로 보고 이를 얻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에는 금수저로 태어나 상속을 받거나 돈을 주고 땅을 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것 외에도 고리대를 통해 토지를 빼앗기도 했습니다. 곡식을 빌려주었는데 이를 갚지 못하면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는 것입니다. 그리고 못쓰는 땅을 개간하여 땅을 확보하는가 한편 사패모수 즉, 국가로부터 사패를 받았다고 속여 자신의 토지를 만들었습니다. 고려에 있었던 사패전사패전은 공을 세운 신하에게 준 공신사패전(功臣賜牌田)과 토지 개간을 목적으로 준 개간사패전(開墾賜牌田)이 있었는데 이 문서를 위조하여 권세가들은 좋은 토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는 엄연히 불법이었고 이로 인해 국가에 내야할 토지의 조세가 줄어들어 고려후기에는 국가재정이 궁핍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또한 당시 부유층은 노동력확보에도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토지가 있어도 결국 농사를 짓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토지와 마찬가지로 상속이나 매입을 통해 얻었으며 빚을 갚지 못하면 이를 협박하여 노비를 만드는 이른바 압량위천으로 노비를 늘려나갔습니다. 압량위천은 양인을 천민을 만들어 국역에서 빼내는 것을 말하는데 고려후기 권문세족이나 조선초기 훈구대신들이 농장을 늘리면서 사용한 이 방법이 폐단이 컸으므로 공민왕 대에는 신돈이 주축이 되어 전민변정도감을 만들어 이를 시정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양인에서 노비가 된 자에는 스스로 된 자들도 있었습니다. 당시 이들에게 여러 종류의 세금을 부과하였으니 자신의 토지를 팔거나 나중에는 처자식을 팔아 조세를 납부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이를 피하기 위해 권세가의 노비를 자처하는 이들도 생겨났습니다.
또한 고려후기에 원나라의 간섭이 심해지자 이들은 이른바 세조구제 그 중에 불개토풍(不改土風)이라 하여 고려는 몽골의 속국이 되더라도 고유한 풍습을 고치지 않아도 된다는 선언을 방패삼아 원나라가 고려토지제도를 고치는 것을 방해하였습니다. 고려는 수사패와 압량위천을 통한 농장의 확대와 양인의 수 감소가 심각하였으므로 노비제 개혁을 통해 이를 개선하기 위해 원나라에서 활리길사라는 관료를 파견했을 때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 당시 원나라황실의 힘을 등에 업은 부원배들이 이를 막기 위해 들이댄 것이 바로 세조구제였습니다. 노비제는 동국(고려)의 고유한 습속이니 세조의 유훈에 따라 바꿀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을 뚫고 개혁을 시도한 군주가 바로 공민왕이었습니다.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이들이 소유한 농장의 규모가 산천을 경계로 할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럼 엄청 큰 것입니다. 물론 규모가 큰 경우에는 군과 현을 넘나들 정도였을 것이며 최충헌 일가도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에 여러 지역에 농장을 가지고 있었고 당시 권세가들도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편 우리나라의 지역은 낮은 산들이 전국에 분포되어 있습니다. 바꾸어 이야기하면 드넓은 평야가 적은 편인데 따라서 『고려사』의 기록처럼 산과 천을 경계로 농장을 삼았다는 것은 과장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넓으면 소유주는 이를 직접 관리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장주(庄主) 혹은 장두(庄頭)라 하는 농장의 총책임자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농장주가 권세가라는 점을 들어 주변토지를 빼앗거나 주변의 농민들을 강제로 노동에 동원시키고 고리대를 일삼았는데 고려말기에는 이러한 횡포가 드러난 사건이 바로 이른바 ‘염흥방토지점탈사건’이었습니다.
염흥방은 고려말기의 권신으로 홍건적을 대파하여 제학에 올랐고 도병마사로서 탐라 ·목호의 난을 진압한 인물입니다. 그는 곡성부원군 염제신의 아들로 공민왕 때 과거에 장원급제하였으며 『동정집』이라는 문집을 낼 만큼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만큼 외교능력도 탁월했던 사람으로 우왕 때 권신 이인임(李仁任)을 비판하다 유배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가문의 위세가 워낙 큰지라 풀려났고 이후 그는 이인임의 심복이었던 임견미(林堅味)와 사돈지간이 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청렴한 문신을 많이 몰아내고 매관매직을 자행하며 토지와 노비를 강탈, 양민을 괴롭히고 국유지까지 강점하는 만행을 저질렀는데요. 그의 집안의 종들도 염흥방의 권세를 믿고 행패를 부리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던 1388년 우왕 14년에 반역사건이 보고되었습니다. 염흥방이 조반이 반란을 꾀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역을 꾀하였다고 하는 조반은 기껏 다섯 명의 기병을 데리고 개경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다섯 명으로 반역을 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았습니다. 사건의 전말은 염흥방의 가노의 횡포가 발단이었습니다. 염흥방의 가노인 이광이 밀직부사 조반이 소유한 백주의 토지를 강탈한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에 조반은 염흥방의 가노가 저지른 일이고 염흥방과 알고 지내는 사이다 보니 반환을 요구했고 염흥방도 이에 응했습니다. 하지만 이광은 이에 굴하지 않고 조반을 능욕하니 조반은 밀직제학의 지위에 있는 몸이라 염흥방의 가노 이광가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도 모양새가 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반이 반환을 청했으나 이광은 이에 더욱 거만하게 굴었고 이에 화가 난 조반은 그를 죽이고 그의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의 전말을 알리기 위해 개경으로 향한 것입니다. 하지만 염흥방은 이에 크게 노하여 조반을 반역을 꾀하였다고 무고하여 그를 체포했습니다. 염흥방은 그를 붙잡아 고문을 가해 반역을 실토하게 만들려고 했지만 계획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후 사건의 전말을 알게 우왕이 염흥방과 임견미 등을 체포하기로 합니다. 이에 임견미는 응하지 않고 반란을 꿈꾸다 최영의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으며 이른바 조반무고사건으로 인해 임견미, 염흥방, 이성림 등 권문세족 50여 명이 처형되고 재산이 몰수당했습니다. 그리고 염흥방 집안의 가신과 노복만 1000명이 체포되어 죽음을 당했습니다. 조반의 무고사건으로 인한 후폭풍은 어마어마했습니다. 당시 고려의 권세가들이 토지를 각종 방법으로 토지를 점탈하며 행패를 부렸습니다. 권력을 무기로 사급전을 사칭하고 상식을 벗어난 가격으로 폭압하여 토지를 매입하는가 하면 문서 허위 기재, 지방수령 및 아전과 결탁, 가노를 동원한 토지수탈 등 그 폐단이 심했던 것입니다. 우왕은 본래 염흥방, 이인임, 임견미 등의 권신들과 가까웠으나 이들이 자신의 위세를 믿고 불법적으로 토지와 노비를 강탈하고 매관매직을 일삼자 이를 제거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물론 우왕이전에도 토지개혁에 대한 시도는 있었습니다. 공민왕 때 신돈을 내세워 설치한 전민변정도감이 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토지제도를 바로 잡아야지만 했으니 이후에 등장한 것이 바로 과전법이었고 조반무고사건으로 권신세족이 몰락하고 이후 등장한 개혁세력은 조선창건의 주축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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