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의 개혁은 왜 실패했나.
2022. 10. 1. 20:30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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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은 충숙왕의 둘째아들로 태어났고 12세가 되던 1341년에 원나라에 들어가서 1249년 원나라 위왕의 딸인 보탑실리와 결혼했습니다. 보탑실리는 혼인과 동시에 승의공주에 책봉되었고 사후에는 노국대장공주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1351년 충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31대 고려국왕인 공민왕이었습니다. 사실 공민왕은 왕위에 오르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가 장자가 아니었을 뿐더러 그의 어머니가 고려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9대 충목왕이 자식 없이 죽게 되자 그의 동생이 왕위에 올라 충정왕이 되니 그가 왕이 될 가능성은 더욱 낮아진 것입니다. 하지만 나이가 어린 충정왕은 왕위에 오른 이후에 외척과 간신들이 등장하여 국정을 어지럽혔으므로 충정왕은 폐위되고 공민왕이 왕위에 오른 것입니다.
원나라는 공민왕에게 친원정책을 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공민왕은 부인이던 노국대장공주와도 사이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예상은 빗나가 공민왕은 적극적으로 반원정책을 펼쳤습니다. 공민왕은 국제정세에 밝아 원나라가 약해지는 것을 알고 고려의 옛 제도를 회복해나갔는데 공민왕대에 몽골의 풍습인 변발과 호복을 없애고 신하들로 하여금 고려의 전통 복장을 입도록 하였습니다. 다만 이는 사실과 다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100년간 유지되어온 쌍성총관부를 폐지하고 원나라로 빼앗긴 영토 일부를 되찾았으며 제 11대 문종 대의 제도를 복구하기도 하였습니다. 바로 2성 6부제로 돌아간 것입니다. 당시 원나라의 기세가 기울던 시기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로 이제는 더 이상 원의 신하국이 아님을 선포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정책에는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권문세족이 반발했고 홍건적이 틈틈이 침략해와 나라를 어지럽게 한 것입니다.
공민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몽골에 있을 때부터 보좌하던 조일신이 공민왕은 위세를 업고 문제를 일으켰는데요. 조일신은 대원강경파로 기씨 집안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기씨 집안의 뒤에는 원순제의 부인인 기황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철일파는 기황후를 믿고 권세와 횡포를 부렸으며 기황후가 아들을 낳자 공민왕을 무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조일신은 이에 난을 일으켜 기씨 일파 일부를 제거하기는 했지만 대부분 도망치고 말았고 공민왕을 협박하여 스스로 좌정승자리에 올랐으나 곧 체포되었습니다. 당시 더불어 체포된 일당이 218명에 달할 정도로 그 세력이 막강했는데 공민왕은 기씨일당을 때려잡는 과정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자 조일신 패거리에게 뒤집어씌우고는 그들을 제거했다는 해석도 존재합니다.
공민왕이 즉위5년째 되던 해에 잔치를 열며 대신들을 불렀는데 그 중에는 기씨일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친위부대를 시켜 이들을 숙청시켰습니다. 그리고 고려에 대해 간섭을 해오던 원의 정치기구 정동행성을 폐지하였습니다. 한편 공민왕의 이러한 반원정책은 원나라는 당혹해하면서도 이에 대해 표시로 공민왕 8년과 10년에 있었던 두 차례의 걸친 홍건적의 침입에는 지원을 하지 않으며 방관하였습니다. 특히 1361년의 침입은 홍건적까지 개경까지 들어오니 이 때 안동까지 피난가게 되었습니다. 이 때 노국대장공주가 다리 없는 내를 건널 수 있도록 사람들이 나와 허리를 굽혔는데 이 때 놋다리밟기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위기는 외침에만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안으로는 1363년 찬성사 김용의 난과 1364년 최유의 난이 일어났으며 귀족들이 차지한 토지를 원래 소유주에게 돌려주도록 하는 전민변정도감의 설치와 권문세족이 중심이 된 도당의 권리 약화 등 일련의 개혁정책들은 권문세족의 반대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도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 사이에는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습니다. 이에 신하들은 공민왕에게 후궁 선택을 말하므로 노국대장공주도 이에 동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제현의 딸을 왕비로 맞았으나 노국대장공주는 이에 질투를 느껴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 누웠다고 합니다. 이에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에게 더욱 신경을 쓰게 되었고 이후 1264년 노국대장공주가 아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공민왕은 매우 기뻐하여 사면령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불행이 되었습니다. 노국대장공주가 아이를 낳지 못하고 난산으로 죽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공민왕에게 상당한 충격을 안겨다주었고 혼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공민왕은 넋나랏일은 돌보지 않고 노국대장공주만 생각하며 지냈습니다. 그리고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보며 산 사람처럼 그와 대화하며 지냈으니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은 공민왕의 개혁에 제동을 건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승려를 불러 제사는 지내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신돈이라는 승려를 알게 됩니다. 공민왕은 신돈을 신뢰하였으며 점차 그 마음이 커지더니 국사를 의논하는 사이가 된 것입니다.
어느 날 공민왕은 신동의 집에 들렀는데 그 곳에서 계집종 반야를 보게 되었습니다. 공민왕은 반야를 보고 마치 노국대장공주가 살아 돌아 온 것처럼 느껴졌으며 이를 눈치챈 신돈은 공민왕에게 저 아이가 마음에 드십니까하며 넌지시 물어보았습니다. 왕은 반야를 와락 앉더니 그 후로는 자주 신돈의 집에 찾아가 반야와 정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 반야는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공민왕은 당시 후사가 없었으니 이를 기뻐하였고 반야는 이후에 아들을 출산하게 되었습니다. 공민왕은 이 아이에게 모니노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이즈음 이 아이가 공민왕이 아니라 신돈의 아이라는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하지만 공민왕은 이를 곧이 믿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상한 투서가 들어왔습니다. 신돈은 정권을 뒤엎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공민왕은 신돈을 내쫓았습니다. 그러면서 이참에 모니노를 데려와 강녕부원대군에 봉하였으며 계집종의 아이라며 흉을 볼 것 같아 궁인 한씨의 아이라고 둘러댔습니다. 신돈을 제거함으로써 고려는 개혁할 수 있는 추진력 하나를 잃었고 공민왕도 이제 개혁을 꿈꾸지 않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공민왕은 1371년 신돈이 처형된 뒤로 더욱 시름에 빠졌습니다. 그는 명문 제자들로 구성된 자제위를 설치하여 젊은 지도자를 양성하고자 하였지만 오히려 이들을 상대로 유희를 즐겼습니다. 또한 이들이 얼굴을 보자기로 덮은 여비(女婢)들을 덮치는 모습을 보며 마음에 생기면 자제위를 끌어들여 노는 이상한 성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공민왕은 자제위의 소년들에게 후궁을 범하게 하였으며 익비 한씨도 이로 인해 홍윤의 아이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던 1374년 공민왕은 갑작스레 시해되었습니다. 자제위 소속의 홍윤이란 사람이 익비를 범하여 임신시킨 사실은 숨기기 위해 공민왕은 이들을 제거하려다 오히려 시해당한 것입니다. 그 때가 공민왕은 44세 때의 일로 즉위 23년 만의 일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반야는 슬픔은 더욱 컸습니다. 왕의 아들을 낳았지만 왕은 죽었고 자신이 왕의 생모라는 사실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들이 우왕으로 즉위했을 뿐입니다. 이에 반야는 태후를 만나 뵙기를 원했습니다. 그리하여 만남에서 자신이 왕의 어미이니 모자의 정을 끊지 말아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이에 태후는 오히려 반야를 옥에 가둘 것을 명하고 이후에 고려왕실에 먹칠을 할까 생각하여 반야를 임진강에 던져 죽게 만들었습니다.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왕의 생모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공민왕의 죽음은 사실상 고려의 멸망을 뜻했습니다. 권문세족의 횡포는 계속되었고 왜구가 침입하고 명나라가 압박하는 가운데 공민왕의 뒤를 이은 우왕과 창왕은 공민왕과 같은 명석한 정치적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공민왕의 존재가 고려의 멸망을 늦추었을까요. 고려 멸망의 책임을 그에게 돌리지는 않으나 비운의 군주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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