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 황제 부인이 된 기황후

2022. 9. 25. 10:39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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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마지막 황제인 순제의 제 2황후이자 1365년에 정후가 된 기황후는 고려 출신으로 그가 낳은 아들 애유식리달랍은 1353년에 황태자에 책봉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고려 왕실을 제외하고 원나라 황실의 가족이 된 고려 사람이었습니다. 
고려인이 어떻게 당대 제국이었던 원나라 황제의 황후가 되었을까. 그와 관련하여 『고려사』의 「이곡열전」에서는 공녀제도를 전하고 있습니다. 당시 고려사람들은 딸을 낳고도 이를 숨겼으니 친척에게도 알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원나라 사신이 오면 군인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여자를 찾곤 했는데 그런 과정에서 발각되면 이웃과 친족들을 잡아들이며 소란을 피웠습니다. 원나라사신은 1년에 한 두 번씩, 혹은 2년에 한 번씩 고려로 찾아와서는 공녀를 뽑아가고는 했습니다. 많으면 사오 십명의 공녀를 고려에 데려가기도 했습니다. 뽑힌 여자의 부모는 발을 동동 구르며 쓰러지고 길을 막고 울부짖으며 슬퍼하여 우물에 몸을 던져 죽고 목을 매어 죽고 근심과 걱정으로 기절하거나 피눈물을 쏟아 눈이 멀기도 했으니 공녀제도는 당대 고려인들을 절망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공녀제도는 원나라가 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원나라에서는 명문가의 딸을 원했으며 기황후의 집안도 고조할아버지가 최충헌 정권 때 재상을 지낸 사람이었고 그의 아버지도 음서로서 벼슬을 얻기도 했습니다. 
기황후는 제2황후였으니 원나라 순제에게는 정비가 따로 있었습니다. 1333년 6월에 황제로 즉위한 순제는 9월에 유력자 연첩목아의 딸 답납실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석달 뒤인 12월에는 고려출신 환관 독만질아의 추천으로 기황후가 궁녀가 되었습니다. 원나라 문종이 죽자 그의 아들이 황제의 자리에 올리려 했으나 문종비 복답실리 태후가 반대하여 순제의 배다른 동생인 영종이 즉위했습니다. 하지만 두 달 만에 죽자 연첩목아는 자신의 딸과 혼인하는 조건으로 순제를 황제의 자리에 올립니다. 당시 답납실리는 원순제를 얕보았고 이에 속상한 원순제가 기황후에게 빠지자 답납실리는 이를 질투했습니다. 당시 기록에서는 기황후에 대해서 성품이 지혜롭고 영리해서 순제의 사랑을 받았다고 전합니다. 한편 그는 일이 없으면 여성의 도리를 강조한 경전인 『여효경』을 읽는 등 책읽기를 좋아하고 역대 황후가운데서는 어진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또한 귀한 물건이 들어오더라도 사신을 시켜 칭기츠 칸을 모신 태묘에 보내 먼저 제사를 올린 뒤에야 그것을 먹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기황후입장에서는 비록 고려인이지만 몽골황실의 여인으로 인정받기 위한 노력이었으며 원순제에게는 뛰어난 미모와 덕을 지닌 기황후에게 빠졌습니다. 하지만 이를 질투한 답납실리는 매일 회초리로 기황후를 때렸으며 무릎을 꿇게 하고는 죄를 묻기도 하고 불로 몸을 지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335년에 순제 폐위역모사건을 주동한 연첩목아의 아들 당기세, 탑자해가 제거당하고 이에 답납실리도 연루되었으니 원나라 황실은 홍길자이 백안홀도를 정후로 맞아들였으며 1340년에는 기황후가 제 2황후로 책봉되었습니다. 하지만 정부로 책봉된 백안홀도는 명목상의 제 1황후였을 뿐, 실질적인 역할을 한 것은 기황후였습니다. 
한편 이 무렵에는 중국 대륙에서는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앞으로 명나라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으로 그 원인을 상을 주어야 할 곳과 주지 않아야 할 곳을 가리지 않고 기강이 크게 무너진 것에 원인이 있었습니다. 어지러운 정치가 반란을 야기시켰으니 기황후 일당이 권력을 쥐고 휘두른 데에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가 권력을 쥐고 흔든 데에는 원나라 순제의 성격도 한 몫했는데 그는 정치에 관심 없었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짓는 것을 좋아하는 등 예술적 감각이 있었으나 군주로서 갖추어야 할 정치적 리더쉽은 없던 모양입니다. 
그러던 중 발라첨목아란 자가 기황후와 황태자를 제거하고 백안홀도의 아들을 태자로 앉히려는 반란을 일어났으나 진압되었습니다. 이것은 백안홀도의 집안의 몰락을 가져왔으며 이 때를 기점으로 기황후는 명실상부한 원나라 황제의 제 1 황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는 원나라가 멸망하기 불과 3년 전이었습니다. 


1340년 원나라 황실에서는 황후의 각종 비용을 전담하는 재정기구인 자정원을 설치하고 고려 출신환관들을 기용하여 이곳을 운영하였습니다. 자정원은 상당한 재정규모를 가진 기구였으며 아마 기황후는 이곳의 재정을 기반으로 정치에 손을 뻗쳤을 것입니다. 특히 기황후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고려처녀를 데려와 양육시키고 이를 원나라 고위관료에게 선사하였으니 이 비용도 자정원에서 충당되었습니다. 또한 원나라 고위 관료들 사이에서는 고려의 여인을 들여야 진정한 명문가라고 통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며 고려 여인들은 예쁘고 사람을 잘 섬겼으니 그 집안에 들면 곧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1341년 이후로는 황실의 시중을 드는 사람들이 고려 여인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리하여 기황후는 원순제의 마음에 들어 사실상 제 1황후의 권세를 누렸으니 이를 기반으로 기황후의 집안 사람들은 고려에서 악행을 부렸습니다. 1347년 3월에 기황후 집안 동생인 기삼만(奇三萬)이 세력을 믿고 남의 토지를 빼앗고 불법을 자행했으며 1347년 4월에는 기황후의 친족인 기주(奇柱)가  포악한 행동을 함부로 하여 서울과 지방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1356년 3월에는 기씨(奇氏) 일족이 황후의 세력을 믿고 횡포하였으니 어떤 자가 밀고하기를 기철(奇轍)이 쌍성의 반란민과 통하여 당을 만들고 역모를 꾸민다고 하였으며 1356년 5월 에는 기철 등이 세력을 믿고 임금을 업신여기며 권력을 함부로 행사하여 백성을 한없이 괴롭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1356년 5월에는 기철 등이 빼앗아 가진 인구와 토지에 대하여는, 빼앗긴 사람에게 고발하는 것을 허락하여 각각 원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했습니다. 그럼에도 기철 등이 임금을 능가하는 위세를 빙자하여 나라의 법도를 흔들었으며 관리의 임명은 그들에게 좌지우지되었습니다. 이에 기철일파가 당시 고려국왕이던 공민왕을 무시하는 지경에 이르자 같은 해에 공민왕은 기철일당을 제거하였습니다. 

이에 기황후가 화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1363년에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즉위시키려 합니다. 이를 주도한 것이 바로 기황후였습니다. 이에 따라 공민왕은 이공수를 보내 덕흥군의 즉위를 막으려 했습니다. 이공수는 기황후의 고종사촌으로 공민왕은 기황후의 사촌을 이용하여 폐위문제를 설득시키려 한 것입니다. 이공수는 고려가 원나라가 100여 년 동안 물과 물고기같은 존재였다고 말을 하며 고려국왕이 원나라에 충성해 왔다는 점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기철일당이 제거당한 것은 그들이 교만하여 만족함을 알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했으며 왕의 죄는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덕흥군을 즉위시키려는 것은 훗날 웃음거리가 될 수 있으니 이를 거두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기황후도 느낀 점이 있었으나 아예 노여움이 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1365년, 제1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기황후는 25년 만에 원나라의 제1황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원나라는 세계 대제국의 위용을 잃어가는 시점이었습니다. 그렇게 그의 영화는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기황후는 제1인자로서 권세를 누린 고려를 간섭한 괴롭게 한 수탈자였을까. 아니면 몽골의 고려풍의 일으킨 원조 한류여신이었을까. 기황후는 열다섯 살에 몽골에 공녀로 끌려가 죽어서야 고국에 묻혔다고 전해지니 그 곳은 바로 경기도 연천군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아마 정말 유골의 일부라도 고국에 묻혔다면 죽은 이후에야 고려에 돌아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황후는 세계 제일의 제국의 간섭을 받는 나라의  백성으로 태어나서 먼 타지로 끌려가 바닥의 위치에서 권력의 정점까지 오른 보기 드문 인물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위를 이용하여 고려에 대한 정치적 내정간섭과 수탈을 일삼으면서도 평생을 고려를 그리워한 사람인데요. 기황후를 보면 복잡한 감정과 평가가 뒤섞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 역사 아니 세계사를 통틀어서도 화려하면서도 기구한 운명이 혼재한 인물인 것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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