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가 해동성국이라 불린 이유

2022. 11. 5. 20:36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남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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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나서 이후의 우리나라시대를 한동안 통일신라시대라 불렀으나 지금은 남북국시대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신라 위에는 발해란 나라가 있고 우리나라 역사학계는 발해를 우리나라 역사의 일부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발해는 지금의 북한과 중국, 러시아에 걸쳐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발해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발해의 역사를 잊지 않고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1994년 대중음악가 서태지는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의 3번째 앨범을 내면서 타이틀 곡으로 ‘발해를 꿈꾸며’라는 노래를 수록하였습니다. 큰 인기를 끌었던 이 노래는 왜 제목에 ‘발해’란 우리나라 고대국가를 넣었을까 궁금할 수 있습니다. 아마 고구려가 멸망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세워진 발해란 나라에서 볼 수 있는 우리 민족의 끈기와 한민족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던 발해의 원대한 꿈이 통일된 한반도에서 다시 실현되기를 바라는 작곡가의 바람을 담은 것이라 생각됩니다. 한편 이러한 발해에 대해 당나라는 ‘해동성국’이라 불렀습니다. 그럼 발해는 어느 정도 수준의 국력을 보유하고 있었길래 당나라는 그러한 말을 했을까요. 
발해는 거란·말갈·돌궐·해 등 여러 부족들과 연합하여 당나라 침략과 통치에 저항해 698년 세워진 나라로 5경 15부 62주를 설치해 229년간 통치한 동아시아 대국입니다. 발해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왕조들과 동아시아 패권을 다투는 나라였으며 이러한 점이 발해가 영토를 팽창할 수밖에 없는 요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당나라는 주변의 나라에서 조공을 강요하고 당나라 중심의 지배질서를 확립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것은 당나라 이전의 왕조인 수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수나라의 양제는 베트남의 임읍국, 오키나와의 유구국, 말레이시아의 마자가국까지 정벌하였으며 서기 610년에는 지금의 낙양인 동도에서 각국이 수나라에 조배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고구려사신은 없었습니다. 이러한 것 때문에 수나라는 수나라 중심의 천하관에 반대하는 고구려의 행보에 반감을 표시하며 대대적인 원정을 하게 되었고 고구려의 땅에 세워진 발해의 외교행보도 고구려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발해와 당나라가 서로 부딪히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당나라의 외교행보가 발해 건국에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고구려의 별종인 걸걸중상과 대조영, 말갈 추장인 걸사비우가 당나라에 대항하는 운동을 벌였는데 이들은 당나라에 의해 강제 이주된 사람이었고 당 통치에 반대하여 봉기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걸걸중상이 사망하고 대조영이 그 뒤를 이어 봉기를 이어나가니 천문령에서 추격하는 당나라를 격퇴하고 진국을 건립하였으며 이에 수많은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인들이 따랐습니다. 발해의 시작은 당나라와의 대결에서부터 승리를 쟁취한 것에 대한 결과물이었던 셈입니다. 
이렇게 힘겨운 싸움 끝에 건국된 발해의 1대 왕 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은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기로 하고 영토를 넓혀나가기 시작합니다. 당시 발해는 당나라와 흑수말갈 사이에 위치해하고 있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문제가 생깁니다. 바로 당나라와 흑수말갈 사이에 연합전선의 움직임이 포착된 것입니다. 이에 발해 무왕은 자신의 동생 대문예를 흑수말갈로 가는 사절단으로 임명했는데 사실은 당나라와 연합하려는 흑수말갈에게 겁을 주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대문예는 형이자 왕인 무왕의 외교노선에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당시 당나라는 강대국이었고 이러한 것이 당나라의 심기를 건드려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발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왕과 생각을 달리한 대문예는 사절단으로 갔다가 당나라에 귀순해버리는 발해 입장에서는 황당한 일이 벌어집니다. 이에 무왕은 자신의 아들 도리행을 당나라로 보내 자신의 숙부이자 무왕의 동생인 대문예를 발해로 귀환시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도리행이 독살당했고 이에 당나라는 대문예를 차기 발해 왕으로 정해버리는 수를 둡니다. 따라서 대문예가 당나라를 치자는 무왕의 요구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은 애초에 차기 발해 왕의 자리에 대한 거래가 당나라와 있었던 것으로 보였고 그에 따라 당나라에 대해 강경노선을 보이던 형 무왕과는 의견을 달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발해의 무왕은 결단을 내립니다. 그것은 바로 장수 장문휴로 하여금 당나라의 등주를 선제공격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드문 군사원정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면적인 결전을 아니었습니다. 아마 당시 발해의 지배층들도 당나라와 발해가 같이 부딪혀서는 승산이 없을 것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두고만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당나라가 더한 요구를 해올지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당시 등주에는 해군기지가 있었는데 이 곳에 큰 타격을 준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지방감찰관인 위준이 죽였고 등주성을 점령하였습니다. 이에 마음이 급해진 당나라의 현종은 지원군을 등주에 보냈으나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상황이 종료된 뒤였습니다. 1년 뒤인 733년에는 당나라가 신라로 하여금 발해를 치도록 하였으나 신라는 폭설을 핑계로 출정했다가 철군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당나라 현종은 양귀비에 사랑에 빠져 헤어나질 못하면서 당나라는 점차 쇠락의 길로 빠져들었습니다. 이렇게 당나라가 자신들의 문제로 인해 흔들릴 때 즈음 발해는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고 10대 선왕 대에는 발해는 전성기를 구가합니다.
‘땅은 사방 5000리이며, 호구는 10여 만이고, 승병(勝兵)은 수만이다. 부여, 옥저, 변한, 조선 등 바다 북쪽에 있던 여러 나라의 땅을 거의 다 차지했다. 발해의 국토는 5경, 15부, 62주다’
해동성국 발해는 동아시아의 대국이었다.‘ 『신당서』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으니 대동강과 원산만을 경계로 하고 있었고 북으로는 고구려도 점령하지 못했던 연해주 북부와 하바로프스크 일때까지 뻗쳤습니다. 그리하여 발해는 고구려 전성기의 1.5∼2배, 후신라의 4∼5배, 한반도의 2∼3배에 영토를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발해는 스스로 황제로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상제에 대한 천제(天祭)의식을 치르는 등 천자국임을 내외에 공표하고, 고구려의 부활을 만방에 알렸습니다. 이에 당 일본 신라 거란 등이 두려워하였고 주변으로부터 조공을 받으며 해동성국으로 칭송받을 수 있던 것입니다. 

발해국 중대성첩

 하지만 당시 발해의 위치는 썩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당나라를 상대해야 하는 발해의 남쪽에 신라가 있었으니 신라는 당나라와 전쟁을 통해 대동강 이북으로 그 세력을 밀어내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신라와 당나라의 친선관계는 깨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발해는 신라도 상대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흑수말갈이 당나라와 친하게 지내려 했으므로 마치 삼각의 적에게 둘러싸인 발해는 이를 견제하기 위한 세력과 손을 잡아야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에서는 「발해 중대성첩」이라는 외교문서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발해와 일본의 관계를 알 수 있는 것으로 발해는 105명의 공식사절단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본으로의 항해는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이었으니 그만큼 발해는 외교적 돌파구로서 일본과의 관계는 중요했습니다. 또한 이를 통해 발해 사신들은 몇 달을 머무르며 무역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기록에서는 이런 사절단이 첫날에 일본화폐로 40만 냥에 해당하는 이익을 얻었다고 합니다. 일본입장에서는 이러한 발해 사신들이 부담스러울 수 있었지만 돌아가는 날까지 융숭하게 대접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을 통해 당나라의 선진문물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러한 외교는 발해가 일본에 비해 선진적인 조선술과 항해술을 갖고 있기에 가능했으니 발해는 이러한 해상운용능력을 발휘하여 동해안일대를 장악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와 함께 뛰어난 항해술을 지녔던 발해, 당나라가 발해에게 해동성국이라 한 것은 명실공히 동북아 최강국이었던 발해의 위상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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