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는 정말 폭정으로 쫓겨났을까.

2022. 8. 9. 20:15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남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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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

신라하대는 호족이 난립하며 어지러운 시기였습니다. 그 중 힘이 센 호족은 마침내 나라를 세우는 데 성공하였으니 바로 궁예로 901년에 황해도 송악을 도읍으로 후고구려를 건국하였습니다. 후고구려는 900년에 견훤이 건국한 후백제와 자웅을 겨루며 사실상 저물어가는 나라 신라를 제쳐두고 이 땅의 패권을 두고 다투었습니다. 『삼국사기』의 이야기를 통해 보면 궁예는 왕위쟁탈전에 밀려난 귀족의 자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궁예는 자신을 숨겨둔 사연을 모른 채 유모를 어머니라 여기며 살았습니다. 어느날 궁예는 자신의 출신을 알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가 신라에 앙심을 품은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이러한 궁예는 양길의 수하로 들어가면서 그 이름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895년에 한산주 관내 10군현을 차지하고 황해도 지역의 호족들을 복속시키면서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송악의 유력한 호족인 왕건도 궁예에게 들어왔습니다. 이러한 세력 확장을 우려한 양길은 궁예를 공격하였으나 결국 패배하게 되고 궁예는 901년에 고려를 건국하였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궁예는 폭정으로 망한 군주이지만 처음에는 폭정을 행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군대를 거느리고 전장을 누비면서 군졸들과 함께 하며 상이나 벌을 줄 때 공정하게 하였으며 이에 따라 사람들은 궁예를 존경했습니다.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고는 광평성을 설치하여 관제를 정비하였으며 905년에 철원으로 수도를 옮기며 죽령의 동북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하였습니다. 그리고 909년에는 수군을 통해 전라도 나주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였으며 후삼국시대에 우위를 점하였습니다. 

궁예는 관심법으로 폭정으로 일삼았다.

그리고 911년 나라 이름을 태봉으로 정하며 정사를 펴나갔는데 이 때 궁예하면 떠오르는 관심법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궁예의 관심법은 그의 흉폭한 정치의 일면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로 인해 신라에 반대하고 그에게 귀순한 사람들이 죽었으며 부인 강씨와 두 아들을 죽을 때도 이러한 관심법이 적용되었습니다. 『고려사』에 따르면 터무니없는 반역죄를 꾸며서 날마다 사람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그 방법도 잔인했다고 전해집니다. 사실 이러한 관심법은 궁예가 하듯이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이 아닌 자기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성찰하는 깨달음의 방법입니다. 어찌된 일인지 궁예는 이 관심법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어이없게 사람들을 희생켰습니다. 
미륵부처를 자처한 궁예는 스스로 미쳐갔고 자신의 아들들까지 신격화하면서 신하들에게 충성을 받아내는 공포정치를 행합니다. 그리고 궁예는 이러한 관심법을 구실삼아 자신의 정적이 될만한 자들을 제거하였습니다. 궁예는 자신의 아래에 있으면서 공을 세우는 왕건이 좋았지만 한편으로 그로 인해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어느 날 궁예는 왕건에게 관심법으로 보니 자네가 나에게 다른 뜻을 품고 있다며 의중을 떠보았습니. 하지만 왕건은 이에 절대 다른 뜻을 품은 적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 때 궁예의 책사였던 홍유가 떨어뜨린 붓을 집으면서 왕건에게 귀띔해줍니다. 굽히지 않으면 위태로울 것이라고 그냥 그렇다고 이야기하라고 한 것입니다. 궁예가 한 번 더 추궁하니 왕건은 이에 역모의 마음을 가졌으니 죽여달라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합니다. 이에 궁예는 왕건을 용서합니다. 궁예 입장에서는 자신의 관심법이 통한다고 믿고 그의 시험에 반하는 대답을 하면 궁예의 관심법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하지만 홍유는 이를 꿰뚫어보고 왕건의 살 수 있는 비책을 알려준 것입니다. 
왕건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만 궁예의 폭정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에 등에 돌린 세력들이 왕건에게 모여 들었습니다. 그리고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과 함께 왕건의 집에 찾아와 궁예의 폭정을 이야기하며 왕이 될 것을 권유합니다. 이에 왕건은 충의를 신조로 삼고 있어 왕이 난폭하더라도 두 마음을 가질 수 없다고 사양하였습니다. 이에 그의 부인이 대의를 세워 폭군을 몰아내는 것은 예부터 있었던 일이라며 손수 갑옷을 가져다줍니다. 그리하여 여러 장군이 왕건을 위시로 하여 그를 추대하였고 궁예를 몰아내자는 움직임에 궁예는 별다른 저항도 못해보고 도망치다가 백성들에게 붙잡혀 살해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역사와 관련한 말 중에 역사는 흔히 승자의 기록이라고 이야기하면서 그 예로 거론되는 것이 바로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는 과정입니다. 왜냐하면 궁예가 과연 그렇게 폭정을 했는가 그리고 한 때 군사력으로 양길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후백제를 압박한 군주가 그렇게 맥없이 쫓겨났는가 하는 점입니다.
항간에서는 궁예가 왕건에게 쫓겨나면서 포천으로 내려간 뒤 왕건에게 저항을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성동리에는 파주골이라는 곳이 있는데 궁예가 왕건의 군대에 패하여 도망친 곳이라 하여 패주동이라 하였다가 나중에는 파주골로 불렀다고 합니다. 이후 궁예는 명성산으로 도망쳤다고 하는데 이 곳은 왕건의 군대가 이 산을 포위하자 궁예와 그의 부하들이 산이 떠나가도록 울었다고 해서 명성산이라고 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포천의 운악산에는 궁예의 성터라고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궁예에게는 최후의 장소였던 셈입니다. 그리고 궁예가 강원도 김화 부군 세포군에서 어느 한 자리에서 최후를 맞이한 뒤 왕건이 이를 수습하려 했지만 궁예의 시신이 움직이지 않아 그 자리에 궁예의 왕릉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태봉국 철원성

그럼 궁예가 왜 왕위에 쫓겨났을까. 그것을 일반적으로 도읍을 송악에서 철원으로 옮겼다는 것에서 찾고 있습니다. 옛 왕조에서 한 국가의 도읍을 옮기는 것은 막대한 사업이며 그러면서 귀족들의 반발을 살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특히 송악이란 곳은 임진강 하구에 있어 수로에 유리한 곳이었고 고구려의 평양이나 경주, 그리고 백제의 한성과 웅진, 사비, 발해의 상경과 조선의 한양까지 모두 큰 강을 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철원은 아무래도 내륙지역이다 보니 물길이 보다 약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입지조건이 약한 곳을 굳이 택한 것은 바로 송악을 기반으로 한 호족세력에 대한 견제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따라서 호족들의 반발이 있었을 것입니다. 호족들의 영향력 약화가 예상되는 가운데 수도 천도로 인한 여러 가지 사업은 경제적으로 타격을 주고 이는 민심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철원으로 이전하면서 인구가 증가했을 테지만 철원평야의 생산력이 이를 따라가지 못해 민심에 더욱 악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습니다. 
더욱 이러한 궁예의 치세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바로 주변을 향한 숙청입니다. 왕권초기에 왕권강화를 위해 주변세력을 견제하고 심지어 처단하는 것은 심심치 않게 발생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궁예는 그 과정에서 잔혹했고 궁예 자신은 미륵불로 자처하면서 이 과정에서 종교계와 마찰을 일으킨 것으로 보입니다. 궁예에게 독설을 날린 석총이라는 승려는 철퇴로 쳐 죽인 것입니다. 그는 미륵불을 자처하며 자신에게 반하는 세력을 처단하며 왕권을 강화하려 했지만 왕권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강화된 상황에서 이루어져야 할 숙청이 성급하게 이루어졌고 이러한 것이 왕건이 정변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 후 왕건이 고려의 태조가 되면서 그가 궁예가 호족에 대한 포섭정책을 실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 과정에서 왕건은 절대 권력에 관심이 없었으나 특유의 포용력과 리더쉽으로 왕으로 된 인물로 묘사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궁예는 필요 이상으로 민심에 의해 당연히 축출되었어야 할 권력자로 그려지게 된 것입니다. 『삼국사기』 열전에서는 궁예가 원래 신라 헌안왕 혹은 경문왕의 아들로 후궁의 소생이었는데 길흉을 점치는 일관이 “이 아이가 나라를 위태롭게 할 것”라고 하여 사람을 시켜 죽이게 하려 했으나 운좋게 버려져 목숨을 건졌다고 합니다. 어쩌면 궁예는 왕이 돼서는 안될 인물로 그리기 위해 궁예의 출생부터 조작한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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