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는 왜 청해진을 설치했을까.
2022. 8. 7. 14:36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남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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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 대사 궁복은 성이 장씨다. 일찍이 당의 서주로 건너가 군중소장이 되었다가 나중에 신라로 돌아와 흥덕왕을 만났고 왕은 병졸 1만을 주고 청해진을 설치하도록 하였다.”-삼국사기-
청해진을 설치한 사람은 남북국시대의 신라 사람으로 그 유명한 장보고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신라의 왕은 그에게 1만이라는 군사를 주었던 것일까요. 장보고는 청해진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말타기, 수영과 활쏘기에 능했지만 신라에서는 신분이 낮아 성공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삼국사기』에서는 장보고에 대해 궁복 또는 궁파라고 하는 우리나라 이름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당나라에 오기 전까지 그는 성이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장(張)씨가 중국에서 가장 흔한 성씨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를 성으로 삼고 복을 한자이름으로 표기하면서 보고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신라에서 신분이 미천했던 그는 당나라로 건너갔습니다. 당나라로 건너간 장보고는 말과 창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났고 당시 서주에서는 그를 당해낼 자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서주 무령군의 군중소장의 자리까지 오릅니다. 그리고 그는 당나라에서 군직에서 있던 동시에 해상무역가로서도 활약했었습니다. 그리고 신라로 돌아와 청해진 설치를 흥덕왕에게 건의하게 됩니다. 당시 장보고의 위세가 신라에까지 알려져 신라의 흥덕왕은 그에게 군사를 내어줄 수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흥덕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바로 중국에 팔려나가는 신라의 노비를 막기 위해서 청해진을 설치하고자 한다는 장보고의 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8세기 초에는 해적이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신라 사람들이 당나라에 노예로 붙잡혀와 있는 것을 목격한 장보고는 이를 막고 서남해안을 방어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822년에는 김헌창이, 그리고 825년에는 그의 아들인 김범문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신라사회에 혼란을 야기시켰습니다.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그 사이 신라는 어려움에 처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828년에 귀국한 장보고가 신라왕실에 경제적으로 지원을 해주고 대신 장보고에 그에 걸맞는 지위를 맡긴 것으로 이해할 수 잇습니ㄷ. 그리하여 흥덕왕은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하고 청해진 대사가 된 장보고는 약속대로 해적들을 소탕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장보고의 꿈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해적을 소탕한 그는 무역으로 눈길을 돌렸고 청해진을 그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당시 당나라 물품에 대한 신라와 일본의 수요가 많았는데 그 길목인 완도에 청해진을 마련하여 무역의 거점으로 삼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해적 소탕은 반드시 이루어져야할 작업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나라의 자기, 비단, 보석 등을 일본에 팔았으며 이슬람의 여러 물품들도 유통되었습니다. 신라와 일본의 물건을 이슬람 상인들에게 팔기도 하고 중계무역으로 장보고는 동아시아의 큰 손이 된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본래 군진으로 설치되었던 청해진은 무역거점으로 역할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청해진에서 발견된 수많은 기와들은 무역거점으로서의 청해진을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흥덕왕이 아들 없이 죽자 왕위다툼이 있었고 희강왕이 올랐습니다. 그러던 희강왕의 경쟁자였던 김우징이 청해진으로 찾아옵니다. 김우징의 아버지는 김균정으로 희강왕과 민애왕에게 대항해 싸우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김우징은 자신이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하였고 장보고는 이를 수락합니다. 장보고가 김우징의 제안을 수락한 이유는 흥덕왕에게 군사를 빌리러 할 때 상대등이 김균정이었고 그의 도움이 작용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더불어 장보고는 자신의 딸을 김우징과 결혼시키도록 약속합니다. 그리고 장보고의 도움으로 군사를 일으킨 김우징은 민애왕에게 복수를 하고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신무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신무왕은 3개월 만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문성왕입니다. 하지만 장보고의 딸은 왕비가 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신하들이 장보고의 신분이 미천하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장보고는 반란을 꾀하고 있었다고 『삼국유사』에서 전하고 있으며 『삼국사기』에서는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켰는지 반란의 뜻만 가지고 있었는지 진실은 알 수 없으나 이후 부하 염장에게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장보고의 죽음 이후 청해진은 점차 약해져 그가 죽은 5년 뒤인 851년에 폐쇄되었습니다. 그리고 반란의 근거지를 없애기 위해 청해진의 주민들은 벽골군으로 강제 이주되었습니다.
“아직 직접 뵈옵지는 못했으나 높으신 이름을 오래 전부터 듣고 있었기에 우러러 존경하는 마음이 더해 갑니다. 봄이 한창이어서 이미 따사롭습니다. 바라옵건데 대사의 존체에 만복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저 엔닌은 오랫동안 품어온 뜻을 이루기 위해 당나라에 왔습니다. 부족한 이 사람은 다행히 대사께서 발원하신 법화원에 머물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감사와 기쁨 이외에는 달리 표현해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입당구법순례행기>
이 글은 엔닌이 쓴 책 <입당구법순례행기> 중 장보고에 감사함을 표현한 글입니다. 엔닌은 일본의 승려로 천태종의 발상지인 천태산을 순례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당나라에서 허가서를 발급해 주지 않아 포기하게 되었고 귀국길에 오르려 했지만 풍랑이 기다리고 있어 이마저도 쉽지 않았습니다. 다시 천태산 순례를 할 수 있던 방법을 모색하던 엔닌은 법화원의 도움으로 여행허가서도 받고 천태종 대신 오대산을 순례하며 고승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법화원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무사히 귀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엔닌은 이후 일본 불교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천태종 산문파의 개종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법화원이란 곳은 어떤 곳일까요. 당시 당나라에는 신라인들이 집단거주지가 마련되었는데 이와 더불어 신라원이라 불리는 신라 사람들을 위한 절들이 만들어졌습니다. 법화원은 이러한 신라원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법화원은 신라와 당나라를 잇는 문화적인 거점역할을 하였을 것입니다. 당나라 속의 작은 신라 타운으로서 역할을 했을 것이고 신라의 불교예법에 따라 여러 행사들을 진행하며 많은 승려와 유학승들이 활동했던 곳입니다. 법화원은 장보고가 신라로 돌아가 청해진을 설치하기 전에 세워진 절입니다.
엔닌이 쓴 『입당구법순례기』에 보면 재당 신라인과 그들의 조직한 신라방, 신라소에 관련한 내용이 있습니다. 엔닌이 신라인의 도움을 받아 당나라에 올 수 있었기에 그럴 수 있지만 아마 당대 신라인의 활약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신라인들이 만든 신라방, 신라소, 신라관 간에 유기적인 연결관계는 상호 정보를 공유하며 그 일대 해안을 장악하고 해상항로까지 운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일찌감치 해상으로 진출한 백제인들의 활약이 컸을 것이라는 시각도 존재합니다. 백제는 전성기 시절 중국까지 진출했었고 더불어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백제의 거점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660년 백제가 멸망하더라도 그들이 활동한 거점은 여전히 살아남아 상업과 무역에서 활발하게 유지되었을 것이라는 것인데요. 백제가 멸망한 후 그를 계승한 나라가 없었으므로 아마 백제인이라는 말 대신 신라인이라는 말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백제가 결국 신라에 흡수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리하여 청해진을 설치한 장보고는 선조들이 건설한 해상왕국의 부활을 꿈꾸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장보고도 결국 옛 백제 땅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해적을 소탕한 장군으로 많이 알려진 장보고는 동아시아 일대를 아우르는 주요한 무역거상으로 활발히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법화원이란 절을 통해 문화교류에도 이바지한 바가 큰 인물입니다. 당나라 시인 두목의 <번천문집>에서는 ‘장보고는 인의지신(仁義之心) 과 명견(明見)의 뛰어난 통찰력을 겸비한 훌륭한 사람’이라고 표현했으며 일본에서도 ‘보배롭고 높은 사람’이란 기록하였습니다. 장보고는 중국과 일본에서도 영웅으로 추앙받는 역사상 첫 번째 한국인이었지만 그가 꿈꾼 해상왕국의 부활은 정치싸움에 연루되어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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