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어떻게 세계 최고가 되었을까.

2022. 8. 4. 14:29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남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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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구정광대다라니경

사찰에 가면 동탑과 서탑이 있습니다. 보통 이 두 탑은 모양이 똑같거나 아주 흡사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절 이름을 따서 ○○사의 동탑 혹은 서탑이라고 부른답니다. 그런데 불국사 쌍탑은 동탑과 서탑이라는 명칭 대신 다보탑과 석가탑이라는 명칭이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중 다보탑의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화려한 모양 덕분에 사람들의 이목을 받았습니다. 시각적으로는 다보탑에 쏠리지만 극적인 이야기는 석가탑이 간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무영탑이라고 불리는 것이 바로 석가탑입니다. 바로 아사달과 아사녀의 이야기입니다. 알만한 사람은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석가탑은 20세기 중요한 발견의 터로서 또 하나의 이야깃거리를 제공하게 됩니다. 그 시기는 1966년의 일입니다. 
당시에는 도굴꾼들이 많았나 봅니다. 일제시대 때에는 일찌감치 다보탑의 보물들을 가져갔으므로 해방되고 나서 국내 도굴꾼들에게 표적이 된 건 바로 석가탑이었습니다. 당시 경주 골동가게에 네 명의 도둑이 모여 석가탑을 목표물로 삼고 도굴모의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1966년 9월 3일 도둑들은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러나 도둑들에게 보물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삼일동안 도둑들은 석가탑을 훑었지만 석가탑은 자신의 보물을 내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석가탑

 그러던 9월 6일 아침이 밝았습니다. 불국사 뜰을 쓸던 스님이 석가탑 탑신이 기울어 있는 것을 보고 경찰서에 신고하였고 문화재 관리국에도 보고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석가탑을 본래 모습으로 되돌려 놓기 위해 해체와 보수 그리고 복원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9월 8일 한 신문사에서는 불국사 대웅전 오른쪽에 위치한 석가탑이 8월 29일에 있었던 지진으로 심한 균열이 생기고 이로 인해 쓰러지기 직전이라는 기사를 내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도둑들이 석가탑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습니다. 물건을 들어 올리는 도구인 잭을 이용하여 석가탑 탑신부 1층 옥개석을 들어 올리고 소득이 없자 탑신부 3층 옥개석을 들어올렸습니다. 하지만 헛수고였고 도굴꾼들은 엉성하게 뒤처리를 하고 현장을 빠져나온 것입니다. 경찰은 용의자를 추적하여 그들이 구슬 300여점과 비취 9개를 대기업 그룹 회장의 형에게 팔아넘겼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그리하여 경찰의 조사와 수색이 이어졌고 해당 문화재를 구입한 사람을 구속하게 됩니다. 
이제는 석가탑을 복원할 차례였습니다. 석가탑의 제 1탑신을 해체하고 제 2탑신을 해체해야 했습니다. 제 2탑신의 덮개가 되고 있는 옥개석을 들어내려고 하는 찰나 옥개석이 땅바닥으로떨어졌습니다. 한 쪽이 부서졌고 조사단원들의 얼굴은 잿빛으로 굳었습니다. 그러나 덮개를 드러내고 1200여년 동안 잠자고 있던 조상들이 숨겨둔 보물들이 나타났습니다. 이 유물들은 조사와 함께 당시의 기록으로 작성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시에 옥개석을 손상한 것과 관련된 사람들은 사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조사단이 경주로 내려왔습니다. 그들은 발견한 것은 청동사리 외함, 금동사리 외함, 그리고 달걀모양의 은제 사리함, 사리 소병 등이었습니다. 그중 금동사리함 위에 놓인 물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비단으로 싸인 물건이었는데 본래의 형태를 알 수 없는 종이 두루마리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거에는 경문(經文)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었습니다. ‘다라니’는 ‘주문’을 의미하고 ‘무구 정광’은 ‘한없이 맑고 깨끗하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라인들은 무병장수와 행복을 기원하며 이 인쇄물을 두루마리 형태로 석가탑 밑에 모셔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두루마리 형태로 모셔둔 이유는 당시에는 제본하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무구정광 대다라니경’이 언제 만들어졌는지가 궁금했습니다. 다라니경을 처음 산스크리트어에서 번역했던 것이 704년까지 올라갑니다. 그럼 연대를 언제까지 낮춰지게 될까. 석가탑을 세운 것이 경덕왕 10년이므로 서기 751년 그러니까 발견 당시 1966년 기준으로 최소 1211년 전의 인쇄물이 발견된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듣고 일본은 바로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반론이야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일이지만 종전까지만 하더라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은 770년에 발행된 일본의 <백만탑다라니>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최고(最古)라는 타이틀을 일본은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일본은 751년은 석가탑이 완공한 해가 아닌 착공한 해가 아니냐,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중국에서 인쇄한 것을 수입해 온 것이다라며 딴지를 걸었습니다. 일단 석가탑은 혜공왕의 태자 시절에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혜공왕이 765년에 왕위에 올랐으니 석가탑은 그 이전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수입해온 인쇄물을 넣었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종이의 재질인 우리 나라 고유의 종이인 닥나무 재질이니 이 부분은 논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옛날 물건이나 유적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이란 수식어를 달려고 할 때에는 그만큼 심사숙고가 필요합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대한 연대가 남북국시기의 신라가 아닌 고려시대 때가 아니냐는 반론이 제기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석가탑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더불어 종이뭉치가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묵서지편으로 이후에 이 기록을 판독해보니 불국사 중수기록을 담고 있었습니다. 기록에서는 1036년과 1038년에 지진이 나서 1038년 탑을 보수하면서 ‘무구정광다라니경 1권을 탑에 넣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렇게 해석된 것은 지워진 글자를 문맥상 ‘넣다’는 의미의 ‘納(납)’ 자로 추정하여 얻은 결과입니다. 1036년 경주에는 큰 지진이 났고 이에 따라 석가탑이 무너질 위험에 처했는데 이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인쇄물을 넣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넣었다는 것이 신라 때 인쇄한 것을 소장했다가 지진으로 파손되어서 새로 넣은 것인지 논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사를 통하여 다라니경에 쓰인 글씨체가 신라 특유의 형태를 보인다는 점, 종이 역시 신라의 가공법으로 만들어진 점과 더불어 현미경으로 확대해 보았을 때 기존의 고려 시대 인쇄물에 비해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섬유가 떨어진다는 점이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신라시대 때 만들어졌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다라니경에는 당나라 측천무후가 집권한 690년부터 704년까지만 통용된 측천무후자(字)가 10차례 쓰여졌다는 점이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신라에서 제작한 것임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됩니다. 고려시대 때 측천무후자를 쓸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하실 텐데요. 측천무후의 몰락 이후 측천무후자의 사용은 곧 역모에 해당되기 때문에 8세기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석가탑에서는 발견된 종이뭉치는 <보협인다라니경>의 일부와 <불국사 무구정광탑중수기> 그리고 <불국사서석탑중수형지기>, <불국사탑중수보시명공중승소명기>입니다. 이를 통해 보면 석가탑을 무구정광탑 혹은 불국사서석탑이라고 부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절에서 탑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는 상징물입니다. 이러한 탑에서는 부처님의 진신사리인 신사리, 그리고 부처의 고귀한 정신이 깃든 불경을 의미하는 법사리를 넣는다고 합니다. 석가모니가 열반할 때 8말 4되에 달하는 많은 양의 사리가 나왔다고 하더라도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불교가 퍼지면서 그 많은 절들에 진신사리를 넣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따라서 대승불교를 믿었던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불경을 넣었고 이러한 법사리 신앙으로 인해 탑 안에서는 이러한 유물들이 발견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석가탑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었으니 무구정광탑이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나온 유물들은 도굴 사건 이후 43년간 불국사를 떠나 서울중앙박물관에 보관되었다가 조계종단에 돌아오게 되었으니 거의 반세기만의 일입니다. 석가탑은 무구정관대다라니경과 더불어 탑의 역사를 담은 문서를 전하기 위해 경주에 일어났던 지진을 견뎌온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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