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을 유리 너머로 보아야 하는 이유

2022. 8. 1. 14:2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남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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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우리가 신라 혹은 경주 하면 떠오르는 여러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역사의 도시, 신라의 도읍지라는 것입니다. 특히 경주로수학여행을 갈 때면 꼭 들리는 곳. 하지만 먼 발치서 바라봐야만 하는 곳이 있습니다. 세계 문화유산임에도 말입니다. 그 곳은 바로 석굴암입니다. 석굴암의 정식명칭은 석굴암 석굴이고 석불사라고 불렸습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불국사에 예속되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석불암 대신 석굴암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석굴암은 가지고 있는 예술성과 조형미에 의해 신앙심 깊은 사람의 미술작품 정도로 생각될 수 있지만 뒤에 절 사(寺)가 붙으므로 이곳은 엄연히 절입니다. 하지만 유리 너머로 우리가 알고 있는 석굴암의 이미지를 바라보아야 하는 데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요. 
석굴암은 751년 신라 경덕왕 때에 김대성이 창건하기 시작하여 774년 혜공왕 때에 완성되었습니다. 석굴암은 말 그대로 석굴사원인데 이러한 석굴사원은 인도나 중국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이나 인도에 있는 석굴사원은 자연석굴 안에 만들어진 것인데 석굴암은 토함산 중턱에 만들어진 인공석굴입니다. 즉 석굴암은 산 중턱의 화강암을 일일이 깎고 다듬어 인공적으로 만든 것으로 이런 식으로 만든 인공 석굴은 전 세계에서 석굴암이 유일합니다. 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했는데 인도는 날씨가 무척 더워 서늘한 곳에 불상을 모시고 수행하기 위해 굴을 팠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중국을 거쳐 신라에도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돌은 대부분 단단한 화강암입니다. 그리하여 단단한 재질의 화강암으로 만든 절임에도 불구하고 내부와 불상들이 섬세하고 우아한 것은 길로 감탄할만합니다. 게다가 화강암은 서로 다른 재료가 섞여 있기 때문에 한치라도 실수를 한다면 처음부터 작업을 해야 합니다. 다른 나라의 압도적 크기의 조각품이나 건축물들이 석고나 대리석, 혹은 조각하기 쉬운 재료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석굴암은 이들 작품들에 비해 크기가 작다고 해서 예술성이나 가치가 떨어진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굴을 판다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었지만 김대성과 신라인들은 불심으로 석굴사원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석굴을 파다보면 위쪽에서 짓눌러 주저앉을 위험성이 있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아치형 구조로 만들어 힘을 골고루 분산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108개의 돌이 지붕을 이루고 있는데 이를 30톤이나 되는 쐐기돌이 30여개가 지탱하여 그 무계를 감당하고 있으니 이도 신라기술의 절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석굴암의 내부는 어떻게 구성될까요. 석굴암은 입구역할을 하는 전실, 그리고 통로, 그리고 집의 안방이라고 볼 수 있는 주실로 구분됩니다. 그런데 주실의 천장은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1년이라는 시간을 연상케 합니다. 그리고 석굴암은 당나라에서 길이를 쓰던 자인 당척으로 설계되었는데 원형의 반지름이 12당척, 벽에 새겨진 조각상의 아래에서 윗부분에 이어진 판석의 길이도 12당척, 본존불에 참배하는 사람의 위치는 본존불에서 12척의 두 배 되는 지점이라고 합니다. 즉 석굴암의 내부는 12당척으로 설계된 완벽한 구조물입니다. 더욱이 본존불상의 얼굴은 2.2자, 가슴 폭은 4.4자, 어깨 폭은 6.6자, 양쪽 무릎의 너비는 8.8자로 1:2:3:4의 비율을 갖고 있는데요. 이러한 비율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정감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줍니다. 
그런데 석굴이라는 게 습기가 찰 수 있습니다. 게다가 토함산은 구름과 안개가 많은 지형이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당시 신라인들은 석굴암 바닥에 차가운 물을 흐르게 했습니다. 이는 석굴암 내부의 습기가 내부로 스며들게 하고 땅 속으로 사라지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석굴암이 천 년이 넘게 유지될 수 있던 비결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돌과 돌 사이에 작은 틈을 두어서 바람이 잘 통하게 해두었고 지붕을 둘러싼 자갈층은 제습역할을 하여 내부를 쾌적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석굴암은 동지 때 해 뜨는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어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러한 석굴암의 모습은 동양과 서양의 건축양식의 만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단 석굴암은 간다라 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불교의 발상지는 인도입니다. 하지만 인도에서 불상을 처음부터 만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알렉산드로스대왕이 동양과 서양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는데 이 시기에 헬레니즘 문화가 인도 서북부에도 전파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조각상을 만드는 모습을 보고 인도인들도 불상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간다라미술입니다. 이러한 미술적 경향이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도 들어왔고 석굴암의 양식에도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앞서 이야기한 돔구조는 로마건축문화의 대표적인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돔구조를 볼 수 있는 불교건축물은 전 세계에서도 석굴암 밖에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신라인이 만든 그 어떤 불교건축물에서도 돔구조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석굴암에서 발견되는 돔구조는 신라인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창조해낸 건축양식이라고 단정짓기는 힘듭니다. 그러면 로마의 돔구조가 신라에 들어왔을까요. 역사적으로 보면 동로마에서 쫓겨난 네스토리우스파 교회가 중국에 들어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신라에도 교회까지는 아니더라도 돔건축양식이 유입되지 않았을까요. 그렇다 하더라도 유독 석굴암만 돔구조를 하고 있는 것은 재미있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동양과 서양이 만난 석굴암의 건축기술에는 신라인들이 가지고 있던 예술감각과 과학적 산물이 더해져 화룡점정을 찍게 됩니다. 

석굴암 천정에 쪼개진 부분이 보인다.

‘…장차 석불을 조각하고자 하여 큰 돌 하나를 더듬어 감개를 만드는데 돌이 갑자기 세 조각으로 갈라졌다. 대성이 분하게 여기다가 어렴풋이 졸았는데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 다 만들어 놓고 돌아갔으므로 대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남쪽 고개로 급히 달려가 향나무를 태워 천신을 공양했다.…’ 『삼국유사』
이는 석굴 천장 중앙의 돌덮개가 세 조각으로 깨어져 있던 것을 설명한 기록입니다. 어쩌면 덮개석을 덮는 작업은 가장 마무리작업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길어진 공사기간에 덮개석이 깨져 그만한 돌을 다시 구하는 일은 자신과 작업을 도와준 인부들에게 맥이 빠지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751년에 시공한 석굴암이 774년에 완성되었음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깨진 덮개석으로 공사기간을 늘려 인부들을 힘들게 하므로 김대성은 이를 부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그리하여 신성시되는 불교사원의 깨진 천정을 설명하기 위해 이러한 이야기를 지어내 후대에 전하도록 한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제 강점기 때 석굴암 모습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건축과학기술이 들어간 석굴암이라도 세월의 힘에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1912년 당시 석굴암을 조사했을 당시 천장의 3분의 1 가까이 파손되어 구멍이 생겼고 그 구멍으로 흙이 쏟아져 본존불상이 파손될 위험에 처했습니다. 당시 일제는 보수공사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쓴 콘크리트와 시멘트는 석굴암 내부에 습기를 차게 하여 상태가 더욱 나빠졌습니다. 일제가 고의로 석굴암을 훼손했다기보다는 당시 문화재 보존기술의 한계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물론 당시 일제는 순수한 마음으로 석굴암 복원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석굴암의 조각상들은 반출하려고 했으며 현지 관리인에게 거절당하자 이를 보수하기로 합니다. 그 이면에는 일제는 석굴암 복원을 통하여 문명화된 일본이 조선의 옛 영화를 되찾아주었다고 선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보수 이후 결로와 누수 현상이 일어났으며 일제는 이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가 일제가 보수를 결정하면서 예견된 것이었다며 그 원인들만 여러 개 제시할 뿐, 오늘날의 첨단과학으로도 완벽하게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유리벽 너머로 석굴암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 것도 이러한 사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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