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를 정복한 고선지
2022. 8. 2. 14:25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남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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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나라의 후예로서 중국에서 크게 이름을 떨친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고선지, 그가 태어났을 때에는 이미 고구려가 망한 30여 년 정도 지난 뒤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조국은 고구려였을까 당나라였을까. 그는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 고사계도 정4품의 벼슬이 있었으므로 이미 멸망한 고구려 출신이었지만 일반 평민계급은 아니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것은 당시 국제적인 성격으로 말미암아 다른 이민족들에게도 많은 기회를 주었던 당의 정책 덕분에 고선지의 아버지가 지금의 스타급 군간부 진출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한족왕조인지라 과거 시험을 통한 등용은 쉽지 않았을 것이고 무예가 출중하여 정치계로 진출을 꿈을 꾸었을 것입니다. 고선지는 20여 세 쯤 유격장군이라는 지위에 올랐는데 그것은 음보라는 제도 때문이었습니다. 음보라는 것은 아버지가 높은 관직에 있는 경우에 자식에 관직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조상의 음덕으로만 출세를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740년 쯤에는 투르크 계열의 부족이 당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자 안서도호부 책임자였던 부몽영찰은 고선지에게 정벌을 명령, 진압한 것입니다.
이 때 즈음에 당나라는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당시 티베트 지방의 토번이라는 나라가 막강하여 서역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는데 소발률국의 왕에게 토번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이게 하여 혼인동맹을 맺어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두게 하고 그 방면의 20여개의 나라들을 당나라와 관계를 단절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실크로드가 차단되어 당나라에게 큰 손실이었습니다. 따라서 당나라는 3차례에 걸쳐 원정을 보냈지만 사막과 산지라는 험난한 지형과 전략부재가 맞물리며 토번군들에게 패퇴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서역의 여러 나라들의 이동통로인 연운보를 공략할 작전을 세우고 이 전투를 고선지에게 맡깁니다. 1만 여명의 원정군을 받은 고선지는 기존 루트인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단 길이 아닌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단에 있는 천산산맥을 통과하는 길을 선택합니다. 뻔한 길로 갔다가 토번군에게 기습에 어려움에 처할 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삥 돌아가는 길이라 들킬 염려는 없겠으나 사막의 북부와 산악지대를 넘으며 장시간 행군을 지속해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고선지 장군은 병사들은 독려하며 연운보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리하여 과정은 험난했으나 급작스런 당나라의 기습에 토번군은 당황했고 당나라군은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어두워질 때까지 토번의 군사를 추격하여 5천명을 죽이고 1천 명을 생포하였으며, 그 나머지는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말 1천 여필을 노획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량과 병기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 고선지는 변령성을 남겨두며 긴 행군과 전투로 지쳐 병든 허약한 병사 3천 여명으로 그 성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그렇게 조치한 후 고선지는 계속 진군하였다.” 『신당서』
고선지는 이렇게 7천 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소발률국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힌두쿠시 산맥에 위치한 탄구령을 넘는 행군이 시작된 것입니다. 해발고도 4000미터가 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병사들이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로 떨어지기도 하고 고산병에 힘들어하기도 하여 장병들은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발률국 주민들이 고선지 장군을 기다렸다면서 항복해 왔습니다. 이에 병사들은 사기가 올라 눈 덮인 산악길을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소발률국의 수도 아노월성이 다다랐습니다. 사실 이 때 항복한 소발률국 주민들은 고선지가 앞서 보낸 부하들로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꾸며낸 것이었습니다. 고선지는 사람을 보내 소발률국에 항복을 권했지만 그들은 토번과의 혼인동맹을 믿고서 버텼습니다. 고선지는 이에 토번군이 구원해 올 수 있는 다리를 끊어버린 후 당나라군은 다시 소발률국의 왕에게 항복을 권했습니다. 그들은 투항했고 이 서역원정으로 근처 72개국이 당나라를 두려워하여 조공을 바치게 되었습니다. 이 승전은 곧장 당나라 현종에게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상관인 부몽영찰에게 보고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함을 당할 뻔 했으나 같이 갔던 신하인 변령성의 말로 고선지는 부몽영찰이 맡았던 안서절도사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는 신하들의 모함과 고구려인이라는 멸시가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고선지는 직급이 낮을 때부터 한족관료에게 금품을 바쳐야 했고 고선지가 안서절도사 자리에 오를 때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변령성은 대놓고 전리품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원정한 도시를 약탈하고 전리품을 챙기는 데 집착했다고 전해집니다. 아마 이것은 주변에 현물을 줘야했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고선지가 재물을 좋아해서 탐학했을까요.
그리고 당나라는 2차 원정을 나서게 됩니다. 당시 파미르 고원의 서쪽의 석국과 돌기시를 정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들은 이슬람 세력과 더 친하게 지내고 당나라를 멀리하였기에 2차 출정이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이 때 석국으로 쳐들어간 고선지 군대는 순순히 항복한 석국의 왕을 체포하고 왕궁과 수도일대를 약탈했습니다. 고선지는 각종 보석과 귀중품들을 잔뜩 챙겼으며 몸약한 자들은 살해하고 젊은이들은 노예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약탈이 변령성을 포함한 뇌물을 요구했던 한족 관료들의 집요한 요구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중국사서에는 성품이 탐욕스러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때의 대대적인 승리로 중앙아시아 여러 국가들은 당나라에 조공을 바쳐왔고 고선지는 중앙아시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당나라는 실크로드 교역을 통해 번영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항복한 석국의 왕을 처형했다는 소식과 함께 당나라 군대의 약탈소식이 서역의 여러 나라에 전해졌을 것입니다. 석국의 왕자가 도망쳐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에 중앙아시아에서는 반당세력이 결성되었으며 아바스 왕조는 이븐 살리흐 장군에게 3만 명을 주어 당나라와 싸우게 했습니다. 그리고 751년 음력 7월 당나라와 이슬람 세력이 최초로 부딪힌 탈라스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당과 연합했던 케를룩 부족이 반란을 일으켜 이들이 당의 뒤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고선지 부대는 대참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적 진영에 깊숙이 들어가는 고선지의 고집적인 작전이 이번에 먹혀 들어가지 않았고 상대의 힘이 결집된 상황에서는 더욱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석국 원정에서 고선지 부대가 보인 약탈과정은 반당세력을 늘려놓았고 아마도 케를룩의 군대도 이미 반란을 계획을 했을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이 전투로 제지술이 서양으로 전파되었지만 더불어 중앙아시아에 대한 주도권을 이슬람 세력에게 내줌으로써 이 지역이 현대까지도 이슬람의 영향 야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후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고 당은 위기에 빠졌습니다. 고선지는 장안으로 들어오는 반란군을 막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고선지는 조정에서 보낸 환관 변령성과 상의하지 않았고 변령성은 이에 앙심을 품어 현종에 고선지를 모함하였습니다. 당나라 현종은 고선지에게 사형을 내렸고 고선지는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이 때 고선지에게 금품을 받았던 한족관료들은 도움이 되지 못했고 수도 장안은 안록산의 군대에게 함락당하고 말았습니다. 당나라 현종과 놀아난 양귀비는 자살하고 변령성은 안록산에게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안록산의 난이 진압되면서 변령성도 죽음을 맞이합니다. 고구려인의 후예로서 어떤 누구보다도 영화같은 삶을 살았던 고선지, 그에 대해 프랑스의 역사학자 르네 그루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고선지의 파미르 서부 원정으로 당나라의 중앙아시아 팽창 정책은 그야말로 절정기를 맞았다고 할 수 있다. …… 고선지는 중앙아시아의 총독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2차 원정 때 고선지 부대가 항복한 석국에 약탈정책을 하지 않고 탈라스 전투에서 승리했더라면 현대의 모습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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