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보살은 왜 원효가 아닌 의상을 택했을까.
2022. 7. 31. 11:40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남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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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시대 때 고승으로 의상대사와 원효 대사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함께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행 중에 겪은 이야기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 해골물이야기입니다. 원효와 의상이 당나라 유학길에 오르던 중 한 동굴에 머물게 됩니다. 원효는 한밤중에 심한 갈증을 느껴 주변을 더듬다가 바가지에 든 물을 마시고는 갈증을 해소하게 됩니다. 하지만 다음날 사실 바가지에 든 물이 아닌 해골물에 든 썩은 물이라는 것을 알고는 구역질을 하게 됩니다. 이에 일체유심조의 깨달음을 얻어 원효는 유학길을 포기했습니다. 너무 유명한 이 이야기가 사실 변형된 이야기일 수 있다고 합니다. 애초에 원효와 의상이 잔 곳은 동굴인 줄 알았는데 일어나보니 인골이 흩어져 있던 무덤이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을 알게 된 후 어찌된 일인지 그 곳에 하루 더 묵게 되었ㅅ브니다. 그 날 밤 꿈에서 귀신에게 시달렸다는 내용이 해골물 이야기로 바뀌었다라는 것입니다. 해골물이 사실인지 무덤가에서 자고 악몽을 꾼 것이 진실인지 알 수는 없으나 원효는 의상과 당나라 유학길에 오르다가 도중에 깨달음을 얻어 유학을 포기한 것은 사실로 생각됩니다.
의상과 원효가 등장하는 일화는 더 있습니다. 의상대사는 당나라에서 돌아와 관음보살의 진신이 한 동해 해변의 굴속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의상은 7일 동안 재계하고 앉았던 자리를 새벽에 물을 띄웁니다. 그리하여 용천팔부의 시종들의 안내를 받아 굴 안으로 들어갔고 의상이 하늘에 예를 올리자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동해의 용도 여의보주 한 알을 바쳤습니다. 친견한 관음보살은 자기가 앉은 자리에 대나무가 솟을 것이니 그 곳에 불전을 지어달라고 부탁합니다. 의상은 굴을 나와 대나무가 땅으로 솟아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금당을 짓고 관음상을 만들어 모셨는데 얼굴과 모습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아 낙산사라 이름 지었다고 합니다. 원효도 역시 이곳에 와서 예를 올리고자 했습니다. 원효는 논 가운데에 벼를 베고 있는 흰 옷을 입은 여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원효는 농담으로 벼를 달라고 말했는데 여인은 벼가 영글지 않았다고 합니다. 원효는 다리 밑에 왔는데 그 곳에서 어떤 여인이 월경에 쓰이는 수건을 빨고 있었습니다. 원효는 마실 물 좀 달라고 하자 그 여인은 더러운 물을 그대로 떠서 주었습니다. 원효는 그 물을 버리고 냇가의 물을 떠서 마셨습니다. 그 때 소나무에 있던 파랑새가 “휴제호 화상”하고 숨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소나무 밑에는 신발 한 짝이 있었습니다. 원효는 절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관음보살 자리 밑에 소나무 밑에서 보았던 신발 한 짝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전에 만났던 여인이 관음의 진신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원효는 굴에 들어가 관음의 진신을 보려고 했으나 풍랑이 일어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이 설화를 보면 의상과 원효를 대하는 느낌이 확연히 다릅니다. 의상과 원효는 당대를 대표하는 고승이었을 것인데 왜 이렇게 차이나는 이야기가 전해질까요. 이것은 당시의 상황과 맞물려 생각하게 됩니다. 당시는 당나라와 전쟁을 치르고 난 후였습니다. 신라입장에서는 늘어난 영토와 인구에 걸맞는 새로운 국가체계가 필요했습니다. 불교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단 의상은 진골출신으로 엄격성과 규범성을 내세우며 호국신앙을 강조한 반면 원효는 육두품 출신으로 민중과 함께 하는 불교를 설파했습니다. 아무래도 신라의 왕실에서는 원효의 사상보다는 의상의 사상이 더 맞았던 것으로 판단했고 그에 따라 의상을 더 추켜세우는 일화를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의상은 어느 정도의 고승일까요. 의상은 한국 화엄조의 개조로 추앙받는 사람입니다. 우리나라 불교에서 첫 머리에 위치하는 고승 중의 한 사람으로 고려 숙종에게 ‘해동화엄시조 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라는 시호(諡號)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위의 일화로 보면 의상대사가 신라왕실의 지원을 대폭 받았을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신라의 왕은 의상의 명성을 듣고 그를 경주로 초대했지만 응하지 앉았으며 의상이 머무른 절도 갈대나 짚, 풀 따위로 지붕을 엮은 암자였다고 합니다. 그의 저술은 많지 않았으며 그것도 전해지는 것이 적다고 합니다. 그리고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를 포함한 짧은 글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는 화엄 사상의 핵심적인 내용을 210자의 글자에 담아 상징적인 정사각형 도안으로 배열하여 쉽게 설명하려 한 것입니다. 이 안에는 “하나 가운데 모든 것이 들어 있으며 많은 가운데 하나가 있다. 하나의 티끌 속에 온 우주가 포함되어 있고 모든 티끌 속에 온 우주가 있다.”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부처는 모든 중생을 헤아리고 수행을 통해 자신이 본디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원효는 많은 저술을 남겼습니다.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십문화쟁론> 같은 저술을 남겼으며 중국과 일본에까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원효의 행동은 절제된 승려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요석공주와 결혼하여 설총을 낳았으며 이후에는 계율을 어겼다고 하여 승복을 벗고 스스로 소성거사라 부르며 신라 곳곳을 떠돌아다녔습니다.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거나 술집과 기생집에 드나들었고 돌에 글을 새기거나 사당에 가서 음악을 즐기는 등 거리낌 없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갔으며 동시에 불교를 민중에게 전파시켰습니다. 한편 원효의 아들 설총은 경서와 역사책에 두루 통달한 인물로 글의 뜻을 풀이하여 쓰는 방법인 이두를 고안하기도 하였습니다. 원효는 기이한 행동을 일삼으면서 “나무아미타불!”을 외치며 다녔습니다. 이 말은 아미타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뜻으로 아미타불을 지성으로 부르면 어려운 불교 교리를 몰라도 죽어서 서쪽에 있는 극락정토에 태어난다고 하였습니다.
한편 1967년에는 도쿄의 엿장수가 엿을 팔고 있었는데 그가 책에서 종이를 뜯어 엿을 팔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학자는 책을 얻어 분석했는데 원효가 쓴 <판비량론>이었습니다. 8분의 1정도만 남은 이 책은 당나라 승려 현장의 불교교리 해석을 논리적 비판한 책이었습니다. 당시 이 책이 나왔을 때 중국승려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을까 싶지만 당시 승려들은 6세기 때 유명한 인도 승려 진나가 환생했다고 했을 정도로 극찬했으며 송나라 때 승려 찬녕의 <송고승전>에서는 그를 극찬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판비량론이라는 책이 신라에서 만들어져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일본에서는 예쁜 책을 잘라서 표구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판비량론도 조각조각 잘려져 많은 사람들이 나눠가진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던 이 조각들이 수집되면서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었는데 여기서 상아나 뾰족한 나무로 글자를 새긴 각필이 확인되었습니다. 각필은 신라사람들이 글을 읽기 쉽도록 한문의 뜻이나 조사, 어미 등을 다는 구결이라고 하는데요. 일본의 가타가나 글자의 구원이 이러한 구결임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견해입니다.
이 둘은 승려이지만 비교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8살의 나이 차이에도 형제처럼 지냈습니다. 낙산사의 창건 일화처럼 세간의 이목처럼 서로를 라이벌로 의식했다기보다는 서로를 존중하며 인정하였습니다. 의상은 신분에 관계없이 설사 노비라 하더라도 제자로 받아들이며 만물은 평등하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실천하였으며 원효도 천한 노비나 무지한 백성도 깨달을 수 있다는 교리를 설파하며 저술로도 남겼습니다. 하물며 각자의 활동으로 저술과 사상을 남긴 이들의 노력으로 당시 신라의 불교는 비약적으로 발전해 오늘날에도 그 이름을 남기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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