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가 왜 우리 역사일까.

2022. 7. 30. 11:38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남북국

728x90

발해의 영역

발해는 698년에 건국된 나라로 중국측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발해 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려(고구려)의 별종이다.’ 『구당서』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 고구려에 복속되었던 자이며 성은 대씨이다.’ 『신당서』
이 두 사료를 종합하면 발해를 건국한 사람은 대조영으로 말갈과 관련 있는 사람입니다. 『구당서』에서는 고려의 별종으로 보고 있는데요. 이는 고구려와 다른 사람이 아닌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온 인물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은 대씨라 하였는데 『신당서』에서는 대조영의 아버지의 이름을 걸걸중상이라 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신당서는 대조영이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던 말갈인으로 고구려인과 다른 민족으로 기술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하여 걸걸조영이 발해를 세우면서 성을 대씨라 하고 대조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반면 유득공은 발해고(渤海考)에서 ‘그 대씨(大氏)는 누구였던가? 그는 고구려 사람이었다. 그들이 차지했던 땅은 우리의 고구려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대조영이 말갈인이 되었던 고구려인이 되었든 중국의 한족과 무관한 사람이 됩니다. 그럼 그는 고구려인이라 할까. 아니면 말갈인이라 할 수 있을까. 구당서가 신당서에 비해 115년 정도 앞서 편찬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시기적으로 앞서 쓰인 구당서가 발해가 존속했던 시기와 가깝기 때문에 구당서의 기술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입니다. 다만 신당서가 구당서의 내용을 기술하되 당대 국제정세와 자신들의 처한 상황에 빗대어 역사의 사실을 왜곡하여 기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갈은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장수왕 시기에는 말갈의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신라의 실직주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으며 영양왕 때에는 말갈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공격했다고 합니다. 이는 말갈도 고구려의 일부였다는 말입니다. 
말갈은 사냥과 채집에 기반을 둔 호전적인 사람들로 말갈이 중국에 알려진 것은 서기 6세기 이후입니다. 고구려로부터 독립해서 만주 일대에 독자적인 세력을 만들다가 고구려의 유민이 발해를 세우고 난 뒤에는 그에 포함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발해가 멸망하면서 이들은 여진으로 커졌고 그러면서 제국을 형성하였습니다. 이들의 주거처는 두만강이었는데 여기는 옥저가 있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럼 말갈과 옥저는 어떻게 구분했을까. 아마 산속에서 살며 사냥을 하며 말갈인으로 살아갔을 것이고 정착하여 농사를 지은 이들은 옥저인으로 살아갔을 것입니다. 또다른 예로는 삼국시대엔 강원도 지역 사람들을 말갈 혹은 예맥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들이 오랑캐라서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니라 농사보다는 사냥에 의지해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들을 통틀어 그리 불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말갈은 고구려에서는 주민의 구성원이었을 것이며 발해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고구려가 668년에 망하고 같은 영역에 발해가 698년에 세워집니다. 그런데 고작 40년도 안되는 기간에 주민이 고구려인에서 말갈인으로 바뀌었고 발해의 피지뱨층은 말갈이라 단정하는 건 이해되지 않습니다. 고구려의 멸망 당시 고구려 주민이 350만 명에서 400만 명이라 한다면 그 많던 주민이 증발했다거나 이 모든 주민이 다른 곳으로 뿔뿔히 흩어지고 그 자리에 주민들을 말갈인으로 채워졌다는 것인데 사실은 이것을 설명할 사료가 있을까요. 
그리고 수많은 말갈 중에 일부는 중원에 진출했을 여진으로 분화했을 것이며 일부는 발해의 주민으로 편입되었다가 나중에는 고려와 조선으로 자연스레 흡수되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말갈이라는 단어 자체에 우리가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지 어쩌면 그들도 한국사의 일부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던 말갈이 고구려를 계승하고 그 자리에 건국된 발해의 피지배층이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따라서 피지배층이 말갈인이 다수라 해서 발해를 한국사에서 빼려는 주변국들의 생각은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발해 전성기 때의 도읍지인 상경용천부 궁성 축대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출신이었습니다. 일단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구려의 왕이라 했으며 일본에 갔던 32명의 발해의 사신들 중 32명 중 22명이 고씨, 그리고 발해의 왕족들에게 밝혀진 성씨들도 거의 다 고구려 귀족이었습니다. 만약 대조영의 정체성이 말갈에 있었고 고구려인과 분명한 선을 그었다면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발해의 유적에서 발견된 온돌장치는 우리 민족 고유의 것입니다. 또한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려라 칭하며 국서에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에서 전해 내려온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라는 글을 포함하였습니다. 이에 더해 ‘발해는 옛날 고구려다’라고 기록한 『속일본기』의 기록을 보면 오히려 발해가 건국되었을 당시 나라이름을 고려라고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의 문집에는 태사시중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는데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중략)… 고구려의 잔민들이 서로 모여 북으로 태백산 아래 의지하여 국호를 발해라 하였습니다.’『삼국사기』-최치원전-
발해를 고구려의 유민이 모여 세운 나라라고 밝힌 최치원은 발해를 싫어했던 것 같습니다. 872년에는 당나라에서 시행하는 빈공과 시험에 발해 유학생 오소탁이 신라 유학생 이동을 제치고 수석을 차지합니다. 최치원은 이를 분통해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897년에는 발해의 국력이 신라에 앞서니 외교사절이 앉는 자리를 바꿔달라고 요구까지 합니다. 최치원이 이러한 사실을 알았는지 알 수 없으나 7세기 중후반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나당전쟁을 겪는 과정에서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을 포섭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구려가 멸망하고 하고 또다른 고구려가 세워졌으니 이에 대해 불편해하는 신라인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최치원도 그 중 하나였다면 그가 발해에 대해 설명하면서 말갈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그들은 항상 고구려를 복종했는데 문득 아무도 없는 땅을 점령하여 발해를 세웠다면서 그들에 대한 안좋은 생각을 적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달리 생각하면 당나라와 연합한 신라가 멸망시켰다고 생각한 고구려가 다시 부활하여 신라와 다시 국경을 맞대고 있으니 당대 신라인들에게는 아찔한 상황일 수 있습니다. 결국 최치원이 발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든 간에 발해라는 나라는 분명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것입니다. 
‘8월 15일 절에서 수제비와 떡을 장만하고 8월 15일 명절을 지냈다. …신라가 옛날 발해가 싸웠을 때 이 날 이겼기 때문에 명절로 정하여 음악과 즐거운 춤을 즐기던 전통이 오래도록 이어져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입당구법순례기』
일본의 승려 엔닌이 쓴 책에 기록된 내용으로 신라가 이긴 발해는 아마도 고구려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고구려가 자연스레 발해로 이어진 것으로 당대 신라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 발해는 거란의 침공으로 멸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발해가 멸망할 즈음에 발해는 신라에 구원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발해가 신라 혹은 어쩌면 고려나 후백제에 구원을 바랬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라는 발해를 돕기로 했다가 약속을 어기고 거란을 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 926년이라는 시기를 생각하면 과연 신라가 발해를 도울 수 있는 상황이었는지 의문이 듭니다. 발해 입장에서는 정치외교적으로 신라가 라이벌이었지만 워낙 긴박한 상황이라 구원을 요청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동족의식이라는 발동했는지 모릅니다. 신라가 발해의 구원을 외면한 진실은 알 수 없으나 후에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가 거란이 보낸 낙타를 만부교 아래에 묶어 놓아 굶어죽게 하고 거란의 사신을 유배보냈습니다. 거란의 침략을 유발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고려는 왜 그랬을까요. 많은 이유 중 하나 바로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가 동족이라 여긴 발해를 거란이 멸망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발해가 멸망하였을 때 고려가 그 유민을 받아들인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인 것입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