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대사와 선묘아가씨 그리고 부석사

2022. 8. 3. 14:27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남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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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묘와 의상대사

신라의 고승이었던 의상은 우리나라 불교역사에 있어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상가입니다. 그는 625년 신라의 귀족 김한신의 아들로 태어나 20세가 넘어서 승려가 되기로 하였습니다. 항복사로 출가한 그는 당나라에서 화엄교학이 크게 일어났다고 하자 원효대사와 함께 당나라로가게 됩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순라군에게 잡혀 첩자로 오해받았으며 이후 수십일 동안 잡혀 있다가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10년 뒤에 의상과 원효는 다시금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고 이 때 해골물일화가 전해집니다. 원효는 신라로 돌아섰지만 의상은 중국으로 향한 것입니다. 
의상은 등주에 머물게 되었는데 당시 이 곳 적산포에는 신라의 사찰인 법화원이 있었습니다. 의상은 이 곳에 머물렀고 그 곳에 선묘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선묘는 의상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지만 의상대사는 이미 불교에 귀의한 몸이었기에 받아줄 수 없었습니다. 선묘는 의상스님앞에서 생생세세(生生世世)부처님께 귀의하기를 발원하였고 의상스님은 곧 법화원을 떠났습니다. 이후 의상은 지엄스님을 만났습니다. 의상과 지엄스님이 만나기 전에 지엄 스님이 꿈을 꾸게 됩니다. 해동에서 큰 나무가 자라 가시와 잎이 중국 전체를 뒤덮는 꿈이었습니다. 나무 위에는 봉황이 있었고 그 안에는 여의주까지 열렸으니 기이한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찾아온 이가 바로 의상이었습니다. 의상은 그렇게 지엄의 제자가 되었고 화엄종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화엄학을 배우던 중 의상은 꿈을 꾸게 되었는데 신인(神人)이 나타나 의상이 배운 바를 저술해 사람들에게 베풀라는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선재동자가 나타나 총명약을 주었고 청의동자가 나타나 그 비결을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지엄화상의 가르침을 받들어 670년에는 『화엄일승법계』를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스승 지엄이 열반하자 의상은 귀국을 결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법화원에 들르게 되었고 선묘아가씨가 궁금하여 그의 옛 집을 찾아가게 됩니다. 선묘는 불단 앞에 조용히 꿇어앉아 오직 한 마음 부처님께 정성을 드리고 있었습니다. 의상대사는 이 모습을 흐뭇하게 여기고는 이내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신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배가 떠난 뒤 선묘아가씨는 의상스님이 왔다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배는 떠나가고 있었습니다. 선묘는 의상을 위해 준비해둔 옷을 멀리 띄워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선묘는 신라로 안전하게 의상이 도착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바닷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선묘는 용으로 변하여 의상스님의 바닷길을 지키며 따라왔다고 합니다. 이 안타까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의상스님은 임금의 명을 받들어 부석사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는 적당한 절터로 태백산맥 기슭의 경북 영주에서 봉황의 모양을 하고 있는 산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온갖 잡신들이 의상이 절을 세우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용이 되어 따라온 선묘가 큰 바위로 변하여 공중에 떠서 잡신들을 모두 몰아내고 돌로 화한 용이 되어 절 자리에 꿈틀 누워있게 되었습니다. 죽어서까지 의상을 돕고 싶었던 선묘의 마음을 알아서일까. 의상은 큰 바윗돌을 공중에 띄워 자신을 도운 선묘아가씨의 마음을 헤아려 절이름을 부석사(浮石寺)라 하였고 선묘각이라는 사당과 무량수전, 석등을 세웠습니다. 그 시기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당나라를 몰아낸 676년이었습니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이렇게 세워진 부석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무량수전과 석등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특히 배흘림기둥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배흘린기둥이란 중간정도가 직경이 크고 위 아래로 갈수록 직경을 점차 줄여 만든 기둥을 말하며 고구려 고분벽화의 건축도에서 그 모습이 묘사되어 삼국시대 이전부터 사용된 건축기법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배흘림기둥은 이어지고 있는데 특히 고려시대의 건축물에서 두드러진다고 합니다. 위와 아래를 같은 직격으로 세운다면 기둥머리 부분이 넓어보일 수 있는데 무량수전을 가운데를 볼록하게 하여 이러한 착시현상을 막아준다고 합니다. 여기에 건축물의 무게가 기둥의 중간에 집중된다는 건축구조역할을 고려한 것이니 미적감각과 건축과학이 결합된 결과이기도 합니다. 뿌만 아니라 건물의 귀기둥을 가운데 기둥보다 높게 꾸미는 기술인 귀솟음과 건물 가운데보다 귀퉁이 처마 끝을 더 튀어나오도록 만든 기술인 안허리곡으로 주목받는 것이 무량수전입니다. 여기에 보통의 절들은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 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부석사는 곡선배치를 통해 암시효과를 주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나의 건축물이 사람의 눈에 한꺼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암시를 통해서 서서히 대상 건축물로 접근하도록 한 배치는 ‘공간전이’라고도 부르는데 부석사에서는 무량수전으로 들어올수록 그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독특하면서 창의적인 배치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무량수전 앞에는 석등이 있습니다. 석등은 돌로 만든 등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석등은 불교의 종주국인 인도에는 전혀 없다고 알려졌으며 네팔이 7개 정도가 있는데 그나마 5개 정도는 힌두계 계열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중국에서도  2개만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280여 개의 석등이 전해지고 있으며 그 중에서 60개 정도가 완전한 형태로 전해지고 있고 그 중 하나가 부석사에 있는 석등입니다. 석등은 기능적으로는 어두운 밤에 밝히는 역할이지만 중생을 교화하는 종교적 목적도 있습니다. 보는 신도로 하여금 신앙심을 고취시키는데 그 의의가 있던 것입니다.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은 남북국 신라의 석등으로 해당 시대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석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름다움과 화려함 그리고 단아함을 모두 지닌 석등으로 정교한 조각으로 현재에도 이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석등을 지나 무량수전 안에는 소조여래좌상이 있습니다. 소조란 것은 흙으로 만든 것을 의미하는데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은 나무로 심을 만들고 흙으로 조각한 다음 그 위에 금칠하였습니다. 높이는 2.78m로 뒤에는 광배를 만들고 아름다운 보상 꽃무늬와 불꽃무늬가 새겨져있어 이러한 작품기법으로 보아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소조상으로 그 가치가 있습니다. 이 외에도 여러 문화유산을 품은 부석사는 2020년에는 CNN이 선정한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사찰'에 뽑혔습니다. 

선묘각

부석사에는 한 쪽 편에 선묘각이 있습니다. 바로 선묘아가씨를 모시고 있는 사당입니다. 사실 절 안에 아리따운 아가씨를 모시는 사당이 있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을 법한 일이지만 의상대사가 신라로 가는 배를 안전하기 지키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어 용이 변했다는 이야기를 통해 선묘가 사람들에게 화엄종을 지켜준 수호신으로 여겨지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선묘각이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와 함께 부석사에서는 석룡의 전설도 함께 전해집니다. 무량수전 밑에 묻혀있는데, 머리 부분은 아미타불상 바로 밑에서 시작하며, 꼬리 부분은 석등 아래에 묻혀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최첨단 레이더 장비로 석룡이 있다고 하는 자리를 조사해 보니 석룡으로 추정되는 암반이 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은 설제 용이 아닌 용의 몸체를 닮은 13m에 달하는 바위에 흙을 덮고 절을 지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불화에서는 용은 부처님과 불제자들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용으로 변한 선묘설화는 신라사람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요. 절이 창건된 676년은 삼국통일 직후이므로 전쟁으로 인한 수많은 희생자들과 이로 인해 지친 백성들을 위로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희생자들이 극락세계에서 왕생하기를 바라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의상대사는 화엄사상을 전파해야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이런 선묘설화를 들은 신라 사람들은 의상대사를 더욱 높이 떠 받들었을 것이고 부석사에서 불심을 새겼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의상대사의 안전한 뱃길을 도운 선묘아가씨를 기리며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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