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석정은 신라 망국의 현장인가

2022. 8. 5. 14:31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남북국

728x90

포석정

‘신라는 포석정에서 망하고 백제는 낙화암에서 망했다.’ 『세종실록』15년 기사 중
신라가 포석정에서 망했다는 이 기사는 신라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료가 전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 포석정은 경주 금오산 서쪽 두메에 있는 것으로 신라의 귀족이나 상류층이 나라 생각을 하지 않고 유흥으로 지새운 망국의 현장으로 그려볼 수 있습니다. 때는 927년이었습니다. 문경 방면을 공격하던 후백제의 견훤은 갑자기 방향을 남으로 돌려 영천을 급습하고 마침내 경주로 쇄도하였습니다. 당시 신라의 경애왕은 비빈과 종척을 거느리고 경주교외의 포석정에서 연유를 즐기고 있었는데 급변을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왕은 도망쳤으나 곧 붙잡혀서 자결을 강요당했습니다. 이후 견훤왕은 죽은 경애왕의 고종인 김부를 신라왕으로 세웠는데 많은 포로와 약탈을 가지고 신라를 떠났습니다. 이렇게 하여 오른 신라의 왕이 바로 경순왕입니다. 당시 후백제군이 경주로 가까이 갔을 때 신라는 고려에 원병을 청했습니다. 고려는 1만의 병사를 보냈으나 이미 때는 늦었고 친히 5천의 병사를 거느리고 견훤과 팔공산에서 마주쳤습니다. 하지만 고려군은 대패하였고 대장 2인이 전사하는 와중에 왕건은 몸만 빠져나온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포석정은 사적 1호로 지정되었다.

한 때 국보와 보물 뒤에는 번호가 붙었고 국보1호는 숭례문, 그리고 보물 1호는 흥인지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적 1호는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겠지만 이것이 바로 포석정입니다. 때는 일제강점기시기로 일본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문화재를 약탈하거나 읍성들은 무너뜨렸습니다. 읍성은 고려와 조선시대 왜적들이 출몰하던 전라, 경상, 충청도 해안 58곳과 내륙 요충지에 세운 정치, 경제, 사회의 중심지입니다.. 일제강점기시기인 1910년에 조선총독부는 ‘조선읍성 훼철령’을 발표하고 이에 따라 조선의 읍성들이 대부분 철거되었습니다. 일제가 조선의 읍성을 훼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읍성이 한민족의 정체성과 일본에 대한 항전의 표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허물은 자리에는 시가지가 들어섰으며 한양의 도성과 사대문도 표적이 되었지만 그 중 남대문과 동대문은 살아남았습니다. 그것은 임진왜란 당시 이 두 문으로 일본의 장수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출입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 문들은 1호와 2호로 지정되었는데 그 이유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승전과 관련 있는 건축물이기도 했고 일제가 정한 것 중에 우리나라의 국보가 없는 것은 식민지에는 국보가 있을 수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리고 고적 1호도 지정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포석정입니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이와 같은 것이 고스란히 이어져 국보 1호로 숭례문, 보물1호로 흥인지문, 사적 1호로 포석정이 정해졌습니다. 그런데 왜 일제강점기 때에는 포석정은 고적 1호였고 해방 이후에는 사적 1호가 되었을까. 고적과 사적은 비슷하지만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적은 오래된 유적이란 의미이고 사적은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유적이란 뜻으로 일제는 고적이란 말을 사용하여 우리 민족에게는 단지 오래된 유적만 존재할 뿐, 이것들에 대해서 역사적 가치를 부인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럼 왜 하필 우리나라에 많은 역사적 가치를 가진 유적지 중에 포석정을 일제는 고적 1호로 정했는지 경애왕이 이곳에서 후백제가 급습해와 자결을 당한 것을 보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신라라는 나라는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후백제군이 쳐들어오는 와중에도 흥청망청 술을 마시다가 죽음을 당했고 이러한 무능한 신라의 지배층이 조선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것을 강조하려던 것입니다. 그리고 일제 당시 조선의 똑똑하다고 하는 젊은이들은 일제의 치하 아래 식민지 역사관을 학습했고 해방이 되고 나서도 별생각 없이 보물 1, 2호는 국보 1호와 보물 1호로로, 그리고 고적 1호인 포석정은 다시 사적 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음력 11월에 수도가 경주가 함락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럼 이 때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다가 화를 당한 것입니다. 하지만 음력 11월은 한겨울입니다. 상식적으로 찬바람을 맞아가며 왕이 이곳에서 연회를 즐겼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게다가 당시 신라가 아무리 국력이 쇠하였다 하더라도 정보원이 국경이 배치되어 후백제군이 경주로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연회를 즐겼다는 것은 이야기의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게다가 근처에 안압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연회를 연 곳이 과연 포석정이었을까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학계에서는 이 곳 포석정을 바로 남산 성지의 일부로 보고 있는데요. 견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아마 신라 경애왕은 호국신 즉, 남산신에게 신라의 안위를 빌며 저항을 다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문헌 속의 유포석정연오(遊鮑石亭宴娛)에서 유를 놀았다로 해석하는 것이 아닌 갔다 유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포석정은 물리학의 유체역학이 서려있는 문화재입니다. 포석정은 돌을 이용해 구불구불한 길을 만든 후 물을 흘려보내는 수로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로 수로에 술잔을 띄우면 일정기간 머무르거나 갇히게 하는 현상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므로 재현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지난 1999년 한 연구진은 포석정의 모형을 통해 16군데에서 수로의 벽면을 따라 작은 소용돌이가 생기는 와류현상을 관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회돌이현상이라고도 하는데 쉽게 말하면 소용돌이 현상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에 복잡한 유동을 계산하기 위해 상사변수, 점성력, 표면장력 등 17가지 조건을 감안했으며 특이한 설계로 갖가지 물의 흐름을 만들어내 술잔이 회전하고 갇히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술잔을 한 자리에 머물게 하는 현상은 재현하지 못했습니다. 1998년에 있었던 경주엑스포에서는 임시로 만든 포석정에서 오히려 술잔이 물의 흐름을 거꾸로 타고 올라가는 기현상이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포석정과 같은 물에 술잔을 띄어 보내는 수로는 일본과 중국에도 있지만 포석정처럼 술잔이 한 자리에 머무는 현상은 기록된 바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러한 회돌이현상은 오히려 일어나지 않게 만드는 것이 보통인데 포석정은 정반대의 케이스로 당시 선조들이 이에 대한 지식 없이 우연적으로 회돌이현상을 일으키는 포석정을 만들었다는 것은 더욱 믿을 수 없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보기엔 간단한 수로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의 과학으로도 풀기 만만치 않은 원리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고대 신라와 고려의 기록에서는 팔관회를 음력 11월에 열었다고 합니다. 아마 경애왕은 포석정을 찾아 제사를 지내다 변을 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리 고대 국가라지만 나라가 적군이 쳐들어오는 상황에서 호국신에게 제사를 지내 이를 물리치려 했다는 것은 다소 불합리한 방식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경애왕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당시 말이 후삼국시대지 사실상 고려와 후백제가 다투는 형국이었고 신라는 이미 지고 있는 달과 같은 형국이었습니다. 귀족 간에 왕권 다툼으로 나라는 어지러워져 갔고  진성여왕 이후 이전부터 내리막길을 걷던 민심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각지에서는 반란과 호족들이 들고 일어섰으며 신라는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다시 일어서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신라를 지탱할 군사력까지 분열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는 수 없이 신라는 고려에 의존하는 외교정책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였으며 그런 위태위태한 신라를 이어받은 52대 왕이 바로 경애왕인 것입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나라의 힘을 키워야 했지만 당시의 상황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고 경애왕은 선대 왕인 경명왕이 했던 것처럼 친고려적인 행보를 보이는 게 최선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경애왕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바로 종교적인 힘으로 나라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남는 의문은 이곳이 호국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면 이곳에 신라인의 과학의 담긴 물길이 왜 존재하는지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는 것입니다. 

728x90